〈 219화 〉@29. 비밀을 지닌 여자는 그만큼 매력적이다.
"뭔데? 이게..."
신경질적인 말투로 내놓는 서류를 받아 읽어보던 여자의 얼굴에 곤욕스러운 표정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게 뭔데? 뭘 어쩌라고?"
짜증이 잔뜩 난 표정의 여자가 서류를 북북 찢으며 화를 냈다.
"그 서류는 복사본입니다. 아시겠지만."
"그래서?"
"회장님이 정윤수 군의 부친이 아니시라는 사실. 부정하시는 겁니까?"
변호사가 물었다.
회장의 부인은 새파래진 얼굴로 변호사와 하 과장을 번갈아가며 노려보았다.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이제는 변호사에게도 하대를 한다.
"회장님께서는 문제를 크게 만드시고 싶어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 사인을 해 주시지요."
변호사는 다른 서류를 꺼내놓았다.
"이게 뭐... 뭐야? 이제와서 날더러 그냥 물러서라고?"
"서로를 위해서 그게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합의해주시면 서로 섭섭치 않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미쳤어? 그 영감 죽으면 어차피 내 상속분이 제일 커. 그걸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어차피 그렇게 되지 않을 겁니다. 합의하시지 않으시면 재판으로 넘어가고, 아주 난장판이 될 겁니다. 그 와중에 윤수군이 가장 힘들어지겠군요. 자신의 삶이 전부 부정되는 상황을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사실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넌 뭔데 여기서 지키고 있어?"
회장 부인의 화살이 이번에는 하 과장에게로 향했다.
"회장님의 지시로 상황을 지켜봐야 합니다."
"갈보년이..."
"그래도 전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속이는 짓은 하지 않았습니다."
"뭐라고?"
"그만들 하시지요."
변호사가 중재에 나서고야 두 사람은 입을 닫았다.
하지만 정 회장 부인은 하 과장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고, 하 과장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지금 나한테 이걸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 이혼 한다고 해. 그래서 얼마나 줄건데?"
"청담동의 가산 빌딩과 지금 거주하시는 자택을 사모님 명의로 돌려드리는 것이 회장님의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깟 5층짜리 빌딩 얼마나 한다고? 나한테 그걸 먹고 떨어지라는 거야? 웃기고 있어."
"어차피 소송에 들어가면 그나마도 못 받으실 겁니다. 아무리 예전과 달라졌다해도, 재산 형성에 기여가 없으시니 10%를 받으시기 어렵습니다."
변호사는 여자의 날선 목소리에도 조금도 기분나빠하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흥! 안 해주면 어쩔건데? 이혼."
"유책 사유가 너무 명확해서 사모님께 승산이 없습니다. 뭐. 다시 변호사를 찾아 알아보시겠지만, 누굴 찾아가도 회장님께서 하신 제안이 굉장히 관대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시게 될 겁니다."
다시 변호사가 차분하게 이야기 하는 동안 여자는 변호사 대신 이제 대놓고 싱글거리고 있는 하 과장과 눈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안 해. 아니. 못 해줘. 어차피 그 사람 명줄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그사람 가고 나면 내가 받을 거 다 받을 수 있는데, 이제와서 내가 왜?"
여자가 열을 받은 것은 아마도 자신을 비웃고 있는듯한 하 과장의 웃음 때문인 것 같았다.
"회장님 지금 안정기에 들어서셨습니다. 원래가 건강하신 분이었고, 회복만 되시면 금세 활력을 되찾으실 겁니다. 그때 가서 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신다면..."
하 과장이 말을 하다말고 잠시 숨을 고른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고 해. 누가 이 나이에 진흙탕에 구르는 걸 두려워할 줄 알고?"
회장 부인은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고 있다.
하지만 나름 계산도 선 모양이다.
어차피 이혼을 하게 된다면 최대한 받아내거나, 아니면 충분히 시간을 끌어 회장이 죽기를 기다리려는 모습이다.
"사모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가장 상처를 받는 사람은 윤수군이 될 겁니다."
하 과장은 다시 그녀의 아들을 거론했다.
"어쩌라고? 이제와서 그 못된 남자가 아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되면 슬퍼할 거 같아?"
"유쾌하지만은 않을 테죠."
"웃기고 있네. 자기 친 아빠를 찾게 되면 더 좋아하겠네."
"너무 흥분하신 것 같습니다. 우선은 회장님의 의사를 전해드렸고요. 돌아가셔서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변호사를 찾아 상담도 해보시구요. 그러면 회장님의 제안이 무척 관대하다는 사실을 아시게 될 겁니다."
변호사는 이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사모님도 잘 알고 계시겠죠? 회장님이 얼마나 냉철하신 분인지?"
하 과장은 마지막까지도 상대를 자극하려 했다.
"냉철? 웃기고 있네. 그렇게 냉철해서 너같은 여우한테 그렇게 휘둘린단 말이야?"
그녀는 모든 일이 하 과장의 음모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적어도 이 사태에 탓할 상대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생각보다 회장님 다정하신 분이에요."
하 과장은 생글거리며 여자의 말을 받았다.
"그래. 그 사람이 너한테는 그렇게 다정하게 해줬다고 자랑이라고 하고 싶은 거야?"
여자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거렸다.
"그게 아니라 사모님한테 말이죠.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남편의 아이라고 속여 키워온 여자에게 그렇게까지 하시는 걸 보면 보통 자애로우신 분이..."
하 과장이 다시 한 번 모욕하는 말을 내뱉자, 도저히 참지 못하겠던지, 여자는 물컵을 들어 하 과장의 얼굴에 뿌렸다.
"더러운 계집애. 아무대서나 다리를 벌리고 다니는 화냥년이 뚫린 입이라고..."
여자는 부들거리고 있었다.
하 과장의 말이 그녀에게 충분한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인 모양이다.
"정말로 아무대서나 다리를 벌리고 다닌 여자가 누군지..."
찰싹!
여자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하 과장의 뺨을 휘갈겼다.
찰싹!
하 과장이 지지 않고 여자의 뺨을 후려쳤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더 힘이 좋은 모양이다.
중년 부인은 예기치 못한 반격에 몸을 비틀거리며 두어 발자국 물러섰다.
"너! 너어!"
분노가 너무 크면 말도 차마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여자는 손가락으로 하 과장을 가리키며 연신 너 라고 할 뿐이었다.
"너무 힘들게 가지 말자고요. 괜히 일을 크게 만들면 누가 더 피를 보게될지 모르시겠어요?"
아무래도 하 과장은 일부러 상대를 계속 도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허 변... 당신도 저 년이랑 한패인 거지?"
갑자기 이번엔 변호사에게로 화살을 돌리는 여자.
"전 어디까지나 회장님의 말씀을 전해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 뿐입니다."
"이. 더러운 것들..."
여인은 도저히 상대가 어렵다 생각했든지, 의자에 내려놓았던 핸드백을 손에 들고, 다시 한 번 하 과장을 노려본 뒤 방을 나가버렸다.
"고생하셨어요."
하 과장이 변호사에게 인사를 했다.
"예에. 뭐. 고생이라고 할 거 까지야. 그런데 이혼 소송이 길어질 수도 있습니다. 회장님께서 그때까지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
"그건 걱정 마세요. 정말 튼튼하신 분이니까 금세 자리에서 일어나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대로 양도 문제라든지, 주식 배분 같은 것은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변호사는 하 과장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넓은 방에 홀로 남은 하 과장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표정으로 잠시 의자에 편하게 앉아있었다.
그러길 얼마나 있었을까?
전화기를 들고 어디엔가 전화를 했다.
"예. 저예요. 하 과장."
그녀가 들고 있는 전화기 화면에는 함 이사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예. 지금은 괜찮아지셨어요. 그럼요. 걱정하실 거 없어요. 맞아요."
하 과장은 대화를 나누며 가방에서 담배 케이스를 꺼냈다.
"으흥! 음..."
케이스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녀가 직책은 몰라도 함 이사라는 사람에게 아랫 사람의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그녀가 대외적으로 보이는 모습과 회사 중요 인사들 사이에서의 위치에는 꽤 차이가 있는 듯 했다.
아까 결혼식장에서 보았던 그녀는 회사 사람이건 누구에게건 깍뜻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만 보였었는데...
아마도 그녀가 회장의 정부라는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회장의 부인이 보는 앞에서는 튀지 않게 행동을 해야 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순간이 되고나니, 어쩐지 진면목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해요. 고마워요. 난 이모부만 믿을게요."
전화를 끊기 전에 하 과장이 한 말은 날 무척이나 놀라게 했다.
이모부?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어째서?
그녀가 전화를 끊고 나서 담배를 마저 맛있게 피우는 동안 난 당황해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흐음...
뭔가 비밀스러운 여자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비밀을 지닌 여자였다.
그런데 왜 나한테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음...
굳이 할 필요가 없었겠지.
내가 물어본 것도 아니었고...
나와 관계를 맺은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내게 어떤 해를 입히지 못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라 강요 받은 적은 없다.
사실 난 그녀들의 모든 것을 상세하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들 나름의 삶이 있고, 나름의 과거가 있을 터이다.
그리고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난 그녀들에게 그걸 말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하 과장의 비밀은 딱히 내게 해를 입히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겠지?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모양이다.
여하튼 재미있게 되었다.
그녀가 지닌 비밀이 딱히 내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상관없다.
하지만 궁금한 것은 참을 수 없으니 한 번 알아봐야겠다.
그런데 그녀가 숨기고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하 과장이 담배를 전부 피우고 났을 무렵, 누군가가 벨을 울렸다.
하 과장이 문을 열자, 문 앞에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남자가 서 있었다.
"왔어?"
하 과장은 놀라지 않은 모양이다. 문 앞의 남자를 두고 거실로 가서 소파에 앉았다.
"예."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와 하 과장의 건너편에 앉았다.
들어온 사람은 윤진의 남편이 된 바로 그 새신랑이다.
하 과장은 다시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저도 하나 주세요."
남자가 손을 뻗었다.
하 과장이 담배를 주자 남자가 그걸 받아 입에 물고, 라이터를 켜더니 하 과장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하 과장의 담배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남자는 자기도 한 모금 빨아들이며 불을 붙였다.
후우...
두 남녀는 거의 동시에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한동안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본다.
각기 할 말이 많은 표정이다.
"하하..."
남자가 너털웃음을 내뱉었다.
"하하..."
여자도 비슷한 웃음을 내뱉는다.
"우리 협상은 여기서 끝인 거 같네요."
남자가 말했다.
"아직 우리가 협력해야 할 일은 남아있어. 우리 관계가 끝난 거지."
여자는 남자의 말을 부정했다.
"그런가요?"
남자는 다시 담배를 크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
후우...
"제기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나도 사실은 그래. 여하튼 우리... 다시는..."
"아까 건내준 그거... 봤어요. 당신도 있더군요..."
남자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하 과장은 그 표정이 아까 정 회장의 얼굴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표정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잘.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는 마. 그래도 예전보다는 낫잖아? 기억나? 아무것도 없던 시절?"
후우...
남자는 다시 한 번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래요. 그때 보다는 낫네요. 그리고..."
남자가 웃었다.
"왠지 모르지만, 썩히 나쁜 기분만은 아니에요."
"그래? 그러면 됐어."
하 과장은 아직 모든 진실에 다가서지는 못했다.
"그거 알아요?"
"뭐?"
"내가 사랑한 사람... 당신이라는 거."
"바보같기는. 우리 같은 인간들한테 무슨 사랑 타령이람."
하 과장의 얼굴은 무척이나 많은 감정을 숨기고 있었다.
"알았어요. 이제 갈게요. 가서 할 일은 해야지."
"그래. 당분간... 아니. 앞으로 윤진이 잘 보살펴. 그게 그 사람이 원하는 거니까."
"그래요. 그럼..."
남자는 상쾌한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사라지고 하 과장은 재털이가 담배 꽁초로 가득찰 때까지 담배를 피우고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요즘 호텔에서 저렇게 담배를 피워도 되는 걸까?
난 그 두사람의 비밀스러운 관계보다, 그 사실이 훨씬 더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