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화 〉@28. 당신의 결혼식. 어느 신부 대기실의 풍경
이제 남자의 미래 계획까지도 무너져버렸다.
음.
딱히 그 남자에게 어떤 악감정 같은 것이 있지는 않다.
사실 오늘 처음 보는 그 남자에게 무슨 원한 따위가 있을까?
사랑하던 사람을 배신하는 것?
그런 것이야 늘상 있는 것 아닌가?
만일 그게 그렇게 커다란 죄가 된다면, 세상에 헤어지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니까 저 남자는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하필이면 그 남자가 배신한 여자가 나 같은 남자를 만나게 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할 수 있었으랴.
"오빠. 고마워요."
윤진과 키스를 하고 나서, 나은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마울 거까지야."
사실은 내가 더 고맙다.
이런 완벽한 이벤트를 즐길 기회를 주어서.
"이제 만족해?"
그녀의 계획과는 꽤 달랐지만, 그녀에게도 나쁠 것은 없다 생각해 물어보았다.
"물론이죠.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에요."
대답하고 있는 나은의 눈은 희열로 가득차있었다.
"어지간히 변태로구나."
"맞아요. 나. 그런 여자에요. 학!"
나은은 내 앞에서 자신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에 이젠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내가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기쁜 모양이다.
내 무릎 위에 올라탄 나은이 엉덩이를 움직이며 다시 느끼기 시작한다.
새하얀 웨딩드레스가 너무 잘 어울리는 윤진은 다시 욕정으로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오늘이 자신에게 그토록 중요한 날이라는 사실 따위 그녀에게 더이상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너도 잘 했어."
내 앞에 무릎 꿇고 앉아 날 빤히 바라보는 윤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헤에... 감사합니다."
윤진은 기쁜 표정을 지었다.
"저녁에 일정이 끝나면 다시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하자."
"정말이죠?"
윤진이 해맑게 웃는다.
그녀는 이제 내게 그 어떤 거부감도 남아있지 않았다.
확실히 가장 쉬운 여자였다.
그리고 아마 가장 내게 충직한 여자로 다시 태어난 듯 하다.
물론 나은과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가 있지만, 그건 두 사람 사이의 일이다.
그리고 난 신부 대기실 한가운데서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남자의 눈빛이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슬슬 충격에서 벗어나는 모양이다.
재미있는 남자이다.
이런 꼴을 보고도, 신부의 말 한 마디에 꼼짝을 하지 못한다.
아무리 자신의 미래를 위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까지 자존감을 포기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
나였다면 결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스스로의 존엄을 뒤찾기 위해 싸우려들까?
아니면 아무리 굴욕스러워도 자신에게 보장된 대가를 위해 머리를 숙일까?
그 남자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고 있는 것이 많지 않다.
그저 명문 대학교를 나온 똑똑한 사람이고, 어디서든 인정받는 수재였다는 정도가 전부이다.
그러니 그가 이제 어떤 선택을 할 지에 대해서도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다.
더군다나 저 남자에게는 캐스팅 카드 < 빼앗기는 남자 >도 적용하지 않았다.
나름 이유는 있다.
나은에게 저 남자가 무너지는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윤진에게도 자신이 사랑하던 남자가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주고 싶었다.
어쩌면 비굴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혹은 그런 위태로운 장래 따위 깨끗하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어느쪽이 낫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 남자가 어떤 선택을 하든 나은과 윤진은 완전히 내 소유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저 사내의 진심을 보고 싶을 뿐이다.
"어때. 이제 마음의 결정을 내렸어?"
신부가 자신에게 다가온 신랑에게 물었다.
"적어도..."
신랑이 입을 열었다.
"내 위치를 보장해줘."
남자는 섹스의 삼매경에 빠져있는 옛 애인에게는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까지 감정을 나눌 여유는 없는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남자의 표정이 조금전과는 무척 달라져있다.
확실하게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
"어차피 당신에게 진짜 반려자가 되기는 이미 그른 것 같군."
남자는 냉철하게 말했다.
이 대단한 소동에도 저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
"하지만 이 결혼식을 하겠다면, 당신을 위해 충실한 남편 노릇을 약속하지."
"그래. 그러면 됐어."
윤진은 조금 서운한 표정이 되었다.
남자의 결심이 자신의 생각과 달랐던 모양이다.
"당신이 회장님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당신의 삶에도 관여치 않도록 하지. 대신."
"알았어. 알았어. 원하는 걸 줄게. 그러니까 가서 결혼식 준비 잘 해."
윤진은 시큰둥한 태도로 대답했다.
어쩐지 그 남자가 우습게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도 마지막 순간에 남자다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그녀에게는 미안함이 더 크게 남았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남자는 굴욕을 선택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이런 굴종적인 관계를 이어갈 것을 약속하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그래. 그렇게 하지.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군."
남자는 윤진의 태도에서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하지만 결코 그걸 내색하지 않았다.
절망의 순간에 마지막 희망을 남겨두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한 모양이다.
신랑은 마지막으로 신부의 모습을 눈에 담고 뒤로 돌아서 성큼 성큼 걸어갔다.
그럭저럭 품위 있는 퇴장이었다.
"흐으윽! 사랑해요. 오빠."
그 때 나은은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고, 윤진은 언제 다시 자신의 차례가 올지 기대감으로 가득차 나와 나은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
충분한 쾌감을 누린 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걸 보고 있던 윤진이 상체를 숙이고, 하얀 액체가 흘러내리는 나은의 그곳에 입을 가져대었다.
나은은 이 상황을 정복한 위대한 여왕이 된 듯 당당하게 서서 신부의 혀를 음미했다.
윤진은 나은의 그곳을 흘러내리는 정액을 전부 핥아먹고 나서, 다시 내 물건에 묻은 흔적까지도 전부 깨끗하게 해주었다.
그녀에게 오늘의 주인공이라는 자각 따위는 없었다.
만약 내가 이대로 끝을 내자고 한다면, 서슴지 않고 나를 따라 호텔을 나설 것이다.
"근데 괜찮을까요?"
신부 대기실을 나서며 나은이 물었다.
"뭐가?"
"그... 사람. 눈에 독기가 흐르고 있었어요."
나은은 자신이 저지른 행위의 결말에 대해 아직 안심하지 못했다.
복수는 달콤했지만, 복수는 다시 복수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즐거우셨어요?"
신부 대기실 밖에서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고 있던 하 과장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럭저럭. 문제는 없었어?"
"예. 신랑이랑 함께 있다고 말하고 전부 돌려보냈어요. 음. 냄새가 가득하네요."
하 과장은 신부 대기실 가득한 밤꽃 냄새를 크게 들이마셨다.
"그럼 들어가서 도와주고 이따가 보지."
"알았어요. 그럼 이따 뵐게요."
하 과장은 웃음을 잃지 않고 신부 대기실로 들어갔다.
하 과장이 사라지고 다시 나은과 대화를 이어갔다.
"괜찮지 않으면?"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에요."
나은의 걱정은 계속 되었다.
"걱정할 거 없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나은이는 오늘의 기쁨을 마음껏 즐겨."
"진짜. 이상한 오빠야. 근데... 왜 오빠가 하는 말이라면 전부 믿을 수 있을 거 같은 거죠?"
나은의 얼굴엔 어느새 근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정말로 내가 하는 말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잠시 호텔 로비의 커피숍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가, 윤진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기왕 왔으니, 마지막 순간도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근데... 왜 저렇게 표정이..."
나은은 신랑의 행복해하는 표정을 보고 당황했다.
"즐거운 모양이네. 당연하지 않아? 오늘 같은 날, 저런 표정을 짓지 않는다면, 언제 저런 표정을 짓겠어?"
"하지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리 마음을 숨긴다고는 해도, 방금전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나서, 어떻게 저런 표정이 나올 수 있는 걸까 하는 모습이었다.
나은은 신랑이 신부 대기실을 나간 뒤에 겪은 일을 알지 못했다.
신부 대기실을 나서는 순간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하 과장이 남자에게 스마트폰 하나를 건내주었고, 남자는 하 과장의 말대로 조용한 곳을 찾아 이어폰을 끼고 안에 들어있는 영상을 감상했다.
바로 자신의 신부가 조금전 그 남자에게 난폭하게 겁탈을 당하며 더할나위 없이 행복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영상이다.
그걸 보고 있던 남자의 표정은 처음엔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남자의 표정은 오묘하게 변해갔고, 영상이 끝날 즈음이 되어서는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신랑은 자신의 신부를 빼앗아간 남자에게 정신적으로 완벽하게 굴복하고 말았다.
나은이 신부 대기실을 나설 때, 나는 캐스팅 카드 < 빼앗기는 남자 >를 사용했다.
그 남자의 진면목을 보았으니, 이제 불안 요소를 제거할 차례였다.
그리고 그 남자가 굴복하는 데에 도움이 되라는 의미로, 하 과장에게 스마트폰을 넘기라 말해놓았다.
내 예상대로 남자는 처음에는 참담하다가, 뒤에 가서는 쾌락에 빠져버렸다.
이제 그 남자는 내게도, 나은에게도, 자신의 신부에게도 나쁜 감정을 지니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그 남자에게 나쁜 감정은 없지만, 내게 원한을 지니고 있을 누군가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남자가 필요하기도 했다.
내가 아니라, 윤진에게.
그녀와 대화를 나눠보고, 하 과장을 통해 얻은 정보를 토대로 간주어보건데, 윤진은 아무래도 경영자로서의 능력은 바라기 어려울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제멋대로인 성격이 문제였다.
만일 언제고 그녀가 회사를 물려받게 되면, 회사가 제대로 굴러갈 것 같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신랑은 아주 제격이었다.
윤진의 부친이 괜히 다른 부잣집 자제 대신 그 남자를 자신의 딸의 남편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다.
유능했다.
그리고 방금 전의 일로 보아 감정을 다스릴 줄 알고, 이익이 된다면 어떤 굴욕이라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여자들에게야 비굴해보일 수 있지만, 무언가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런 남자가 제격이다.
윤진의 남편으로서가 아니라, 그녀를 대신해 회사를 경영할 사람으로 적당할 것 같았다.
그러니 앞으로는 충실하게 윤진의 하수인으로 살아가주기를 바랄 뿐이다.
신부를 바라보며 한없이 관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신랑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아마도 내 생각대로 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신부 표정이 영 아니잖아."
그게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식이 거행되는 내내 신부는 누가 봐도 억지라는 생각이 드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거야 딱히 마음이 없으니까 당연한 거죠."
"그래도 연기를 너무 못하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걸요.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을 수 있는게 더 이상한 거라고요."
나은은 자신의 옛 애인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질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경멸에 가까웠다.
그런 꼴을 당하고도 결혼식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징그러운데, 저렇게 행복한 척 할 수 있다니.
물론 그녀가 그 남자가 지금 정말로 행복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런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사실은 신랑이 이미 완전히 망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은 죄책감을 갖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걸 말해줄 이유도 없고, 앞으로 나은과 윤진은 그 남자의 모든 행동을 가식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저쪽이 동생인가 보네."
"그러네요. 두 살 차이라고 했었죠?"
"잘 생겼군."
"근데 아빠랑은 닮지는 않았네요."
"그거야 신부도 모친과 별로 닮지 않았잖아?"
독특한 가족이다.
부친은 그저 풍체가 좋은 노년의 남자였는데, 그의 부인과 딸, 그리고 아들이 전부 미남 미녀이다.
그런데 아들과 딸은 각기 부친과 모친을 그리 닮지는 않았다.
"아빠를 닮지 않은 게 다행이네요."
"그러게."
만일 윤진이 부친의 모습을 빼닮았다면, 우리가 여기 서있었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동생 쪽도 그랬다. 엄마의 유전자를 잔뜩 물려받은 듯, 누가 봐도 잘생긴 사내였다.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는 결혼식이 벌어진 호텔에 잡아둔 방으로 갔다.
아직 오늘의 이벤트가 전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