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화 〉@28. 당신의 결혼식. 어느 신부 대기실의 풍경
하 과장의 역할도 아주 적절했다.
여집사.
혹은 하녀장 정도의 역할을 잘 해내었다.
제멋대로인 여주인의 비위를 맞춰주며, 때로는 여주인을 대신해서 말안든는 노예를 함께 괴롭혔다.
그리고 비련의 여주인공 역할을 맡은 윤진도 예상 외로 훌륭했다.
그녀는 마치 귀족가의 영애에서 나락으로 굴러떨어져 노예가 되어버린 여주인공 같았다.
쉬지 않고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녀는 한 번도 위엄을 잃지 않았다.
가혹한 여주인의 괴롭힘 속에서도 윤진은 끊임없이 반항했고, 대들었고, 대가로 훨씬 더 커다란 고통을 받았다.
"학! 하아! 하아! 변태 같은 년... 흐윽!"
윤진은 여전히 독기가 남아있는 눈으로 나은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감내해야 하는 것은 고통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온몸을 감싸고 있는 그 지독한 쾌락에 저항하는 것이 더욱 힘이 든 것 같았다.
"흐으윽! 싫어. 학! 왜 이렇게..."
문득 그녀 또한 이 상황을 즐기게 된 것은 아닌가 싶었다.
아니. 그런 것이 틀림없다.
윤진은 나은에게 받는 고통에서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가 원든 원지 않든, 그녀의 몸은 점점 더 고통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원래의 성향과는 조금도 관련이 없다.
전부 나 때문이다.
나은도 하 과장도, 그리고 윤진도 시간이 흐르며 점점 더 변태스러운 행위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한참 만에 여자들의 쇼가 끝이 났다.
나은을 필두로 세 여자들은 온몸을 깨끗히 씻고 욕실을 나왔다.
"구경은 잘 했어요? 오빠?"
나은이 쑥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그녀의 옆에는 윤진과 하 과장이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쇼는 끝났지만, 세 사람 사이의 관계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내가 변덕이 생겨 셋 사이의 관계에 변화를 주지 않는 이상.
"아주 멋있었어."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 진짜 너무 변태같죠?"
나은은 내 앞에서 정말 스스로의 바닥까지 드러내보였다는 사실을 생각해내고, 조금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어."
"오빠가 좋다면, 나 더 한 거라도 할 수 있어요."
나은은 기뻐했다.
그리고 윤진의 얼굴은 흙빛으로 물들어갔다.
오늘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는데, 더한 거라니...
"어때? 견딜 수 있겠어?"
이번엔 윤진에게 물었다.
윤진이 날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원한 것은..."
그녀는 자신이 겪은 굴욕의 대가를 받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걸 언제 줄지는 내가 정해."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윤진의 얼굴은 실망으로 가득했다.
"오늘도 충분히 즐긴 거 아니야?"
나은이 윤진에게 물었다.
윤진은 대답 대신 독기 서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즐거웠어요. 난."
대답은 의외로 하 과장에게서 나왔다.
그녀는 충족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박쥐 같은 년."
그런 하 과장이 마음에 들지 않은 윤진이 욕설을 내뱉었다.
나은이 그녀에게 마음껏 말하도록 한 것은 아주 잘 한 행동 같았다.
윤진의 그 독기를 입밖으로 내뱉는 것은 세 사람의 관계에 무척 도움이 될 것이다.
"그동안 혼자 외로우셨죠?"
나은이 의자에 앉아있는 내 바지 벨트를 푸르며 말했다.
"이제부터는 오빠 차례에요."
그러고 보니 아직 오늘은 끝나지 않았다.
그날은 승준에게 승리의 트로피를 손에 거머쥐는 날이었다.
결혼식을 몇 시간 앞둔 승준은 경기도 어느 오래된 도시의 빈한한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한 쉬도 쉬지않고 달려온 자신의 삶에 대해 뒤돌아보고 있었다.
힘겨운 나날들이었다.
가진 게 없다는 것은 수많은 불편함을 안고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승준은 그 불편함에 익숙했다.
결핍에 익숙했고, 참는 것에 익숙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살아왔다.
그의 어깨에는 그 혼자만이 아니라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모든 고난이 끝이 난다.
물론 결혼만으로 그의 인생이 완벽하게 보장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승준도 아주 잘 알고 있다.
준 재벌가의 사위.
사실은 어떤 힘 따위 기대하기 어려운 머슴이나 다름 없는 역할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자라온 그에게는 그 머슴 자리가 사실은 더 높은 곳에 닿을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 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이건 시작이다.
이걸 발판으로 삼아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생각이다.
그걸 위해 많은 것을 포기했다.
어쩌면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영혼의 안식처...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가 포기한 아주 중요한 것이 이 축복의 순간에 그에게 더할나위 없이 다가서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하필이면 그때였다.
"나야. 오늘 결혼하지? 축하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의 인생에 유일한 오점이 있다면 아마 그녀일 것이다.
그가 사랑했던 여자. 그리고 배신하고 만 여자.
잠시 승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좋은 날 방해하려고 전화한 건 아냐. 축하해주려 그랬어."
"어. 그래. 고맙다."
"참. 나 지금 와 있는데, 시간 되면 잠깐 볼 수 있지?"
"그럼. 왜 안 되겠어. 지금 어디야?"
사실은 보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초리 때문은 아니다.
그저 그녀를 보는 것이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왠지 그녀를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다행히 나은의 목소리는 밝았다.
그리고 그 밝은 목소리 때문에, 승준은 도저히 거절의 말을 할 수 없었다.
약속 장소인 2층으로 내려가면서 승준의 가슴은 뛰고 있었다.
물론 그가 알고 있는 나은은 결코 자신의 결혼식을 망치려 들 여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승준은 잘 알고 있었다.
당장 그 자신이 그걸 완벽하게 증명했다.
1년전까지만 해도 승준은 나은과의 미래를 확신하고 있었다.
나은은 성실하며 현명한 여자였다.
인생을 같이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회장의 장녀인 윤진이 그를 눈독 들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인이었고, 더군다나 승준을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줄 권력과 재력을 지닌 여자였다.
물론 승준은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고, 유혹을 해오는 윤진의 괴팍한 성격은 이미 익히 잘 알고 있었다.
나은을 버리는 데에서 올 죄책감은 물론이고, 윤진과 사귄다해서 반드시 밝은 미래가 기다린다는 확신도 없었다.
그저 부자집 따님에게 한때의 지나치는 연인 사이로 끝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윤진이 그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진지했다.
심지어 결혼을 약속하기까지 했다.
유혹은 너무나 달콤했다.
승준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평범한 남자였다.
더 이쁘고 어린 여자.
훨씬 더 좋은 배경을 지닌 여자가 그를 원하고 있었다.
누구라고 그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승준은 만일 반대였다면, 나은도 자신의 곁을 떠났을 것이라 억지로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나은은 화를 내었지만, 선선히 물러나주었다.
"나였어도 그런 유혹에 이겨낼 자신이 없네."
착한 여자였다.
그리고 그의 미래를 기원해주었고, 축복을 빌어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승준은 다시금 그녀를 머리에 떠올렸다.
빌어먹을만큼 착한 여자...
그런 여자였기에 더욱 승준의 마음에 깊이 남아있을 것이다.
한결 같았던 사람...
사귀는 동안 나은은 승준에게 완벽한 여자였다.
쓸데없이 짜증을 낸 적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는 자신에게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오직 사랑만으로...
그때의 두 사람은 그랬었다.
만일 그가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아마 충분히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그에 비해 오늘의 주인공인 윤진은...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은 추호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성품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툭하면 짜증을 내고, 어디로 튈지 모르고, 주위 사람들을 모두 눈 밑으로 본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쓸데없이 비교는...'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승준은 머리를 어지럽히는 생각을 날려버리고, 나은이 기다리고 있다는 곳을 향해 성큼 걸어갔다.
"오랜만이야."
"그래.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그럼. 참. 이거 선물. 별 거 아니지만, 내 마음이니까 받아줘. 이따 식장에는 들어가지 않을 거야. 그정도로 염치 없지는 않아."
오랜만에 본 나은은 한결 같았다.
얼굴은 밝았지만, 조금은 어두운 기색을 숨기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승준은 나은이 건내주는 봉투를 건내받았다.
선물이라...
사실 그녀가 어떤 선물을 주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이 여자가 자신 때문에 아주 큰 고통을 받았고, 지금도 그 고통에서 회복되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서 마음이 아파올 뿐이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한적한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좋은 사람이야."
나은에게서 그녀가 최근 어떤 남자와 사귀게되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승준은 어쩐지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물론 이기적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길었던 인연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이네."
"그지? 그러니까 자기도 나한테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문득 그녀가 하는 말이 정말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 여자 나한테 일부러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는 걸까?
생각해보면 자신이 알고 있는 나은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잘됐다. 이번엔 나 같은 놈은 만나지 말아."
"그럼. 그 사람... 자기랑은 아주 많이 달라."
나은의 한 마디가 조금은 가시처럼 다가왔다.
나랑 다르다는 말의 의미가 무얼까?
아니. 생각하지 말자.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아! 생각해보니까 생긴 게 조금 비슷하려나? 오빠가 좀 더 키가 크기는 한데..."
나은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렇구나."
어쩌면 그녀는 아직도 자신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 한 걸까?
다시 조금 미안해졌다.
"참! 잠깐 볼래?"
"응?"
"여기 와 있거든."
"아아..."
이번엔 많이 놀랐다.
설마 진짜로 남자가 있다는 거야?
"이리로 와봐. 온 김에 인사나 해. 오래는 걸리지 않을 거야."
나은이 밝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승준은 거절하기 어려워 어색한 발걸음으로 나은을 따라갔다.
그런데 그녀의 행선지가 조금 이상하다.
이쪽으로 가면 신부 대기실인데...
어?
어째서 신부 대기실 앞에 하 과장이 나와 있는 거지?
그리고 신부 대기실 문은 왜 닫혀있고?
그보다 이 상황을 어쩐다?
하 과장은 회장의 심복이다.
아니. 승준은 그녀가 단순한 비서가 아니라 회장과 모종의 관계라는 비밀을 알고 있다.
그녀가 옛 여자 친구와 함께 있는 자신을 본다면?
승준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방향을 바꿔야 할까?
아니면 나은을 모르는 채 걸어갈까?
나은은 눈치가 빠른 여자이니 이해해 줄 것이다.
"안녕. 정미씨."
그런데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성큼 성큼 걸어가던 나은이 하 과장에게 인사를 했다.
그것도 서로 꽤 친한 듯이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오셨어요?"
더군다나 하 과장은 무척이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나은에게 인사를 한다.
하 과장이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회사의 임원들 정도 뿐이다.
뭐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오셨어요?"
하 과장이 승준에게도 인사를 한다.
"예. 수고가 많으시네요."
승준은 하 과장에게는 어떤 악감정도 없다.
그녀도 무척이나 굴곡진 삶을 살고 있었다.
조금은 그녀에게 동병상린의 감정을 느끼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
"오빠는요?"
나은은 계속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 과장에게 전혀 엉뚱한 것을 물었다.
"안에 계세요."
하 과장의 대답은 승준을 점점 더 미궁으로 밀어넣었다.
오빠?
설마?
아니...
그게 말이 돼?
승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나은의 오빠... 아마도 나은의 남자 친구가 신부 대기실에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하 과장은 왜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걸까?
설마...
문득 주말 드라마 같은 데서 나오는 설정이 머리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