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27. 남자 친구가 겨우 2m 옆에 있는데...
"너 오늘 영민씨 안 만나?"
나은은 이른 시간부터 자신의 집을 찾아온 도연에게 물었다.
"어. 귀찮아. 오늘은 그냥 언니랑 놀래. 배 안 고파? 내가 뭐 좀 가져왔어."
도연은 가지고 온 봉투 안에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꺼냈다.
"덕분에 점심은 편하게 때우겠네."
"그지? 히히."
도연은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두 사람은 TV를 틀어놓고 빈둥거렸다.
"근데 언니는 오늘 어디 안 나가?"
"나가긴 어딜 나가. 주말은 쉬어야지."
"데이트. 이제 막 시작한 사인데 주말이 황금 같을 거 아냐?"
"그걸 알면서 아침부터 찾아온 거야?"
"아니. 언니 나가면 나도 가려고 그랬지."
"오늘은 안 만나. 바쁜가봐."
"그래? 근데 언니는 그 사람 왜 만나?"
"왜긴 왜야. 좋으니까 만나겠지."
"피! 그런 거 아니잖아."
도연은 다 알고 있다는 투로 말했다.
"그래. 처음엔 오빠가 제법 능력있다고 해서 접근한 거 맞아. 근데 사겨보니까 정말 괜찮은 사람이더라고."
"뭐가 괜찮은데? 솔직히 잘생긴 것도 아니고, 성격이 좋은 거 같지도 않던데..."
"생긴거야 그정도면 남자답고 괜찮지. 키도 굉장히 크고. 성격은... 생각보다 좀 거만한데. 그래도 나쁘지는 않아. 맺고 끊는 것도 확실한 사람 같고, 괜히 질질 끄는 성격도 아니고."
"남자답고? 세상 남자들이 다 그렇게 생겼다면 무서워서 밖에 어떻게 나가?"
"얘는 진짜. 못 하는 말이 없어."
"헤헤. 미안. 응? 근데 생각해보면 언니 예전 그 사람이랑 조금 이미지가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언니 그런 타입이 취향이구나."
"취향 같은 거 없어. 그리고 외모로 사람을 구별하는 것도 싫고."
"진짜... 여튼 언니만 좋으면 그만이지. 근데 언니한텐 잘 해줘?"
"뭐. 만난지 얼마나 됐다고. 근데 그걸 엄청 잘해."
나은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거? 섹스?"
도연은 눈을 떼굴떼굴 굴리며 어색하게 물었다.
"그래. 섹스 말야. 섹스. 나 오선생이 그런 건 줄 처음 알았어."
나은은 도연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 그래? 그렇게 좋았어?"
도연은 어쩐지 나은이 자신의 마음을 뚫어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니까. 오빠가 능력이 없다고 해도, 그것 만으로 충분해. 아니. 그런 말로는 모자라다니까."
"그, 그랬구나."
나은이 섹스에 대해 거론한 뒤부터, 도연은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나은의 눈을 피했다.
"어디가서 자랑할 수도 없고말야. 너니까 말하는 거지만, 진짜 끝내줬어. 진짜. 널 보고 해보라고 해볼 수도 없고 말야. 푸훗!"
나은은 자신의 말이 웃긴지 폭소를 터트려버리고 말았다.
"무, 무슨 말을 그렇게..."
"넌. 모른다. 참. 너 영민씨랑 잠자리는 어때?"
"응?"
도연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조. 좋지 뭐. 하하..."
"그래. 그럼 됐지 뭐. 맞다. 생각해보니까 그건 차라리 모르는 게 낫겠다."
"뭐가 나?"
"오빠랑 섹스 하는 거 말야. 그거 한 번 경험하면, 절대 다른 사람이랑 잠자리 못한다."
"진짜. 어지간히 해라."
도연은 나은을 타박하면서도 눈길을 마주치지 못했다.
"근데 너희 요즘은 섹스 어때? 자주 해?"
"뭘 그런 걸 물어? 우리가 뭐 섹스하려고 만나는지 알아? 난 언니같은 짐승 아니야."
"짐승이라고?"
"그래. 짐승. 섹스 때문에 남자를 만나면 짐승이지, 그게. 그리고 오선생이 뭐야? 그냥 오르가즘이라고 하면 돼지."
"그래. 오르가즘. 근데 너 오르가즘 자주 와?"
"뭐. 가끔..."
도연은 다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거 올 때 막 죽을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멍해지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뭐. 그런 걸 물어보냐?"
"너무 신기해서 그래. 나 전에는 그런 건 줄 몰랐거든. 아. 진짜. 누구랑 이걸 말할 사람도 없고. 진짜. 도연이 너도 겪어 봤어야 하는데."
나은은 집요하게 섹스의 이야기를 꺼냈다.
도연은 계속 나은과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다.
"너. 근데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 원래 그런 얘기 아무렇지도 안게 했잖아?"
"시. 시끄러. 이 추잡한 여자야!"
"추잡하기는. 세상 사람들 다 하는 건데. 맞다. 근데 오빠랑 하는 건 나만 알지. 흐흐흐. 근데 너도 관심 있어? 그 오빠랑 해보고 싶어?"
"미쳤나봐! 이 여자가!"
도연이 안고 있던 쿠션으로 나은의 머리를 내리쳤다.
나은은 그걸 맞고 까르르 웃었고, 도연이 나은에게 달려들어 그녀를 간지럽혔다.
"진짜! 아주 신이 나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도연은 나은의 겨드랑이를 마구 찌르며 소리쳤다.
"하하. 그만. 힘들어... 잘못했어."
"그렇게 좋으면 빨리 가서 그 남자랑 또 하지 왜 집에 박혀 있냐?"
"그니까말야. 오늘 같은 날 바쁘다니..."
나은은 오늘 아주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을 도연에게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한 행동이 누구에게라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헤어진 연인과 결혼할 사람과 섹스를 하라고 하다니...
미친 짓이지.
하기는 그렇게 친한 동생을 따먹으라고도 했는데...
왠지 나은은 도연에게 무척이나 미안해졌다.
"얼굴 풀어. 주말에 못 만난다고 세상이 무너지나?"
"그래. 여튼 잘 왔다. 너라도 없었으면, 오늘 진짜 재미없을 뻔 했어."
"나밖에 없지?"
도연은 어쩐지 나은에게 조금이나마 용서를 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따 심심하면 우리 나가자. 둘이 데이트도 하고, 맛있는 것도 사먹고 그래. 내가 쏜다."
겨우 그런 걸로 자신이 저지른 죄가 용서될 리는 없지만, 그래도 뭐라도 하고 싶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나은도 도연을 볼 때마다 가슴이 쓰려오는 것을 느꼈다.
왠지 오늘이라도 좀 잘 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연을 다시 본 것은 월요일의 일이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나갔다가 저쪽에서 걸어오는 그녀를 발견했다.
나와 거의 동시에 알아차린 도연은 그자리에서 걸음을 멈추고 날 빤히 바라보며 서있었다.
어쩐지 나도 그래야 할 거 같아 자리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냥 멀뚱멀뚱 서있기 어색해 미소를 지으니, 도연은 오히려 얼굴을 굳혔다.
말을 걸어볼까 싶었지만, 그녀의 눈을 수쳐지나가는 수많은 감정의 흔적이 재미있어, 그냥 웃음기 띈 얼굴로 보고 있기로 했다.
도연은 잠시 날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할듯 하다가 그냥 돌아섰다.
그녀가 내 곁을 스쳐지나 갈 때, 난 어쩐지 그녀에게서 냉기가 풀풀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점심 시간은 나은과 주은과 함께 했다.
어쩐지 두 여자와 잠자리를 한 뒤부터는 늘 이 여자들과 점심을 함께하고 있었다.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돌아와 주은이 자신의 부서로 가고 난 뒤에도 나은은 남아있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다.
"도연이가 무척 힘든 모양이에요."
휴계실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은이 말했다.
"남자 친구랑은 잘 안 되고 있나보지?"
"주말 내내 나랑 있었어요. 영민씨랑은 전화만 하고 말더라고요..."
나은의 얼굴은 그리 밝지 않았다.
"나랑 있으면서도 계속 내 눈치만 보고... 괜히 오빠에 대해 계속 물어보기만 하고... 역시... 그런 거겠죠?"
그런 이라는 말은 너무 많은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거겠죠? 내가 왜 그랬을까요?"
나은은 자신을 흔들어 놓은 그 기이한 감정의 정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명백하게 나은은 도연의 평범한 일상을 파괴해버렸다.
나은 자신이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한 것은 스스로의 의도였다해도, 도연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니었다면 내가 도연과 그런 짓을했을리 없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눈치였다.
물론 난 그녀에게 도연으든 나은이든 이미 그녀들이 알기 전에 나와 관계를 맺고 난 뒤라는 사실을 알려줄 수 없다.
"진짜. 무슨 짓을 한 거야?"
나은은 무척 자책하는 것 같았다.
"나랑 그런 관계가 된 것이 도연에게 나쁜 일일까? 아니면 잘된 일일까?"
나은에게 물어보았다.
"당연히..."
나은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아무리 좋은 거라고 해도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수도 있잖아요."
"그렇지?"
"하지만... 나라면... 이쪽이 훨씬 나은데... 걔도 그러겠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 따위 없으니까, 난 모르지."
"진짜... 오빠도 공범이라고요."
그때 휴계실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공범이요? 두 사람 무슨짓을 저지른 거에요?"
문희 양이 생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 문희씨."
나은이 어색한 얼굴로 문희를 반겼다.
문희도 주은처럼 발이 넓은 사람이라, 회사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참. 두 사람 요새 사귀는 거 맞죠?"
"그렇게 보여요?"
"네. 내 눈은 못 속인다구요. 음. 주은씨랑 나은씨랑 누굴까 한참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나은씨 같아요."
문희는 언제나처럼 비밀스러운 웃음을 띄고 우리를 떠보았다.
"비밀. 둘 중 누구인지 문희씨가 한 번 맞춰봐요."
나은이 문희처럼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휴계실을 나갔다.
"점심은 먹었어요?"
"예. 먹었어요. 근데 선배."
"응?"
"둘 중 누구에요? 설마 둘 다는 아니겠고."
문희는 비밀을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눈초리로 날 빤히 바라보았다.
"비밀. 한 번 직접 알아봐요. 이거지?"
난 자판기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음료를 뽑아주었다.
"비밀이라. 좋죠. 나 그런거 밝혀내는 거 굉장히 좋아한다고요."
문희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시간 있어요?"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나은에게 연락이 왔다.
"저녁이라. 퇴근하고 바로는 힘들 거 같고."
그날 저녁은 지연과의 약속이 있었다.
집에 들여보내야 하니, 밤새 같이 있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늦은 시간까지는 함께 보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은 때문에 지연과의 약속을 취소할 생각도 없었다.
먼저한 약속이기 때문도 하지만, 지연이 우선 순위가 높았다.
"늦은 시간이면 괜찮아요?"
"응. 이따가 약속 끝나고 전화하지."
"그러지말고 일 끝나면 집으로 올래요?"
"그럴까?"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아무리 늦어도 상관없으니 꼭 들려줘요."
퇴근후 지연과 만나 오랜만에 수영장엘 갔다.
그녀와 함께 물속에서도 물밖에서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늦은 밤이 되어 집에 가기 싫다고 칭얼거리는 지연을 집앞까지 데려다 주고 나은의 집으로 갔다.
"오셨어요?"
나은의 집에서 날 기다리는 사람은 그녀 뿐이 아니었다.
거실 한쪽의 식탁에 두 남녀가 앉아있다가 내게 손을 들어 인사하며 반겼다.
아니. 정확히는 날 반긴 사람은 남자 쪽이었고, 도연은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도연이하고 영민씨하고 조금 투닥거린 거 같아서, 데려왔어요. 화해시켜주려고요."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떠올라있는 묘한 웃음은 절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영웅씨."
도연의 남자 친구는 언제나처럼 사람 좋은 웃음으로 인사했다.
그런데 얼굴이 꽤 붉은 걸 보면 술이 좀 들어간 모양이다.
"예. 오랜만이에요. 그러고보니 거의 일년 만인가요?"
그 남자의 부서와 우리 팀이 가끔은 협업을 하기 때문에 서로 인사는 나누는 사이였다.
1년 쯤 전에는 같이 일을 하다 술자리까지 이어진 적도 있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식탁에 앉았다.
고의인지 나은은 날 도연의 건너편에 앉게 배치했다.
"응? 그런데 도연씨는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두워요? 무슨일 있어요?"
그녀가 불편해하는 이유는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놀리듯 물어보았다.
"신경쓰지 마세요. 도연이 툭하면 그런 표정이니까."
나은도 도연을 놀리듯 한 마디 했다.
"술 받으세요. 늑게 오셨으니 삼배입니다."
남자가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그러죠. 그런데 영민씨 오늘 조금 마신 모양이에요."
"예. 뭐. 즐거운 자리라서 마시지 않을 수 있어야죠. 나은씨가 자꾸 술을 따라주기도 하셨구요. 하하."
내가 알기로 영민은 그리 술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다.
전에도 소주 한 병 만으로 거의 만취에 가깝게 취해버렸었다.
"재미는 무슨."
도연은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다는 투로 한 마디 했다.
"미안."
남자가 바로 사과를 한다.
이런. 그게 문제야.
자꾸 오냐오냐하니까 버릇이 나빠지는 거라고.
누가 보아도 그 남자는 도연에게 한없이 약했다.
그리고 어떤 관계이든 그렇게 상대에게 맞춰주기만 하면 반드시 선을 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