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화 〉@26.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죄송해요. 윤진씨."
하 과장이란 여자는 기가 약한 것 같았다.
아니. 하긴 대표의 딸이라면 아무리 기가 센 남자라도 함부로 하지 못하겠지.
그런데 윤진이라는 여자의 성격은 보통이 아니다.
"하아... 진짜... 짜증나."
나도 하 과장도 위로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니 한참을 그걸로 짜증을 내다가 엘리베이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거야? 하 과장. 다시 소리 질러봐."
"살려줘요!"
하 과장은 목이 쉴 때까지 소리를 질렀다.
그동안 윤진이란 여자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소리치는 일은 없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할게요."
하 과장이 다 쉰 목소리로 부탁을 해왔다.
"저기요. 그쪽이 좀 해 봐요."
"소용 없는 거 같은데 그냥 기다립시다. 괜히 더운데 힘빼면 더 힘들어질 테니."
"진짜..."
"하아... 하아..."
더위에 한참을 소리까지 지르고 난 하 과장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더워서 안 되겠어요."
"뭐하는 거예요? 하 과장."
"덥고 지쳐서 너무..."
그녀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단추를 풀었다.
"지금 저기 남자 있는 거 몰라요?"
"아는데... 너무 더워서 죽겠어요."
더운것은 맞지만 죽을만큼은 아니다.
성인물을 찍는 환경이 견디기 힘들 정도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거기요. 이쪽 보지 말아요."
윤진이 다시 내게 뾰족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보라 그래도 안 봐요."
"진짜 무슨 생각이야. 남자가 이상한 마음 품으면 자기만 당해?"
여전히 그녀는 하 과장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아! 짜증나! 언제 고치는 거야?"
하 과장이 옷을 벗는 소리가 들려오는 동안 윤진은 쉬지 않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기운도 한때 뿐인지 점차 그녀의 짜증 소리는 줄어들었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윤진도 하 과장도 아무말 없이 묵묵히 앉아있는 모양이다.
"덥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연 윤진은 그때부터 덥다는 소리를 쉬지 않고 내뱉었다.
"더우네요. 하아..."
"벗으니까 좀 나아요?"
"조금요. 아까는 정말 너무 더워 줄을 거 같았어요."
"진짜... 이 사람들... 나가기만 해 봐라..."
"윤진씨도 더우면 하나 벗어요."
"미쳤어요?"
다시 정적이 흘렀다.
"더워..."
윤진은 다시 덥다는 소리를 반복했지만, 하 과장은 더이상 그녀에게 벗으란 말을 하지 않았다.
"저기요. 거기 진짜로 이쪽 보지 말아요!"
더는 참을 수 없겠는지 윤진이 그렇게 말하고 부스럭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옷을 벗기 시작한 모양이다.
"조금 낫다. 진짜로. 이게 무슨 꼴이람."
정말로 참을 수 없는 더위라면 옷을 벗는 것 만으로 더위가 가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옷을 벗는 것으로 훨씬 더 쾌적해진 모양이다.
"목말라."
그리고 다시 윤진의 투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네요."
하 과장이 힘없이 대답했다.
"어떻게 하지? 죽을 거 같아."
윤진이 하 과장에게 칭얼거리고 있었다.
"저도 힘들어요. 조금만 참아봐요. 우리."
"하아... 아! 맞다. 거기요. 내려놓은 거 물병 맞지요?"
그녀가 내가 들고 있던 펫 병을 기억해낸 모양이다.
"이거 먹는 물 아니에요."
"먹는 물이 아니면 도대체 뭔데요?"
윤진은 다시 짜증을 참지 못하고 도전적으로 물었다.
"연구용 샘플이에요. 먹는 거 아녜요."
"샘플? 무슨 샘플이요?"
윤진은 쉽게 믿으려하지 않았다.
"팔종 자화... 설명해줘도 몰라요. 여하튼 먹는 거 아니니까 신경 꺼요."
"마시면 죽는 거라도 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지만, 먹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이걸 만들려고 굉장히 투자를 많이 했으니까."
"무슨. 기껏 물 한 병에. 그러지 말고 좀 줘 봐요. 목말라 죽겠어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진짜! 짜증나게! 하 과장! 어떻게 좀 해 봐요."
"예? 아! 저기 죄송한데 좀 나눠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의 물음에 난 더이상 답하지 않았다.
나도 살짝 목이 말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못견딜 정도는 아니다.
이건 내 체력 때문인지, 아니면 여자들에게만 더 강하게 적용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봐요! 사람이 말하는 데 안 들려요?"
윤진이 거칠게 내 등을 밀며 윽박지른다.
"윤진씨!"
놀란 사람은 오히려 일행인 하 과장이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깟 물 한 병이 뭐가 그리 대수라고? 한 병도 아니고 몇 병이나 있잖아?"
"그만하시죠."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을 돌리고 그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상했던 대로 두 여자 모두 속옷 차림이다.
"고개 돌리지 말하고 했잖아요!"
"아아!"
윤진은 냅다 내게 소리쳤고, 하 과장은 불편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눈을 어디 두건 그거야 내 맘이고,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자꾸 건드려요?"
윤진은 평범한 정도의 키였고, 하 과장은 조금 큰 편이다.
그래도 나에 비하면 머리 하나는 훌쩍 넘게 차이가 난다.
"윤진씨 그만해요."
"하 과장이야 말로 그만해. 뭐 어쩔건데? 그렇게 노려보면 어디 겁먹을 줄 알고? 눈이나 돌리지 못해?"
어지간히 안하무인인 여자였다.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건드리면 가만 있지 않겠어."
그녀에게 눈을 부라리고 몸을 돌려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그녀들을 보고 있다해도 무슨 상관이 있으랴만, 스토리의 진행을 위해 그리 해본다.
"윤진씨. 저사람 좀... 무섭게 생겼어. 우리 조금만 참자."
하 과장이 다시 윤진에게 귓속말을 한다.
"진짜... 치사하게."
윤진도 내게 조금이나마 겁을 먹은 것 같다.
그 뒤로는 다시 조용해지나 싶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두 여자는 연신 덮다 소리를 하고, 목이 마르다는 소리를 했다.
"안 되겠어. 나 더는 못참아. 저기요."
윤진은 참을성이 부족한 여자인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나은의 남자 친구였던 남자에게 궁금한 것이 생겼다.
정말 이 여자와의 결혼 생활이 나은과의 결혼보다 낫다 판단한 걸까?
물론 사람마다 각기 바라는 것은 다를 것이다.
그 남자의 경우라면 아마도 성공을 가장 중요한 가치라 생각했겠지?
그렇다고 저런 여자와 평생을 함께 한다고?
물론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라면 다르겠지만, 사람의 본성이 어디 가는 것 아니지 않은가?
"돈 줄게요. 얼마면 되요? 한 병 팔아요!"
방법을 바꾼 모양이다.
"안 팔아요."
냉담하게 한 마디 했다.
"팔라니까요! 한 병에 만 원. 어때요?"
"꿈도 꾸지 말아요."
"그럼 2만 원!"
"3만 원! 4만 원! 아! 진짜! 사람이 말하면 좀 대답 좀 하라고요! 5만 원. 5만 원이면 되죠!"
내 등 뒤로 5만 원 권 지폐 한 장이 날아왔다.
그리고 뒤를 이어 그녀의 손이 내 앞에 놓인 페트 병으로 향했다.
탁!
난 윤진의 손을 가볍게 내리쳤다.
"아! 이제 폭행이야! 너 이딴 식으로 하면 무사할 줄 알아?"
악다구니가 보통이 아니다.
어쩐지 그 남자에게 이 여자와 결혼 생활을 이어가게 도와주는 편이 나은에게는 훨씬 더 나은 복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연애를 할 때야 모르겠지만, 살다보면 언제고 본성이 드러날 것이다.
아마도 그리 길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난 벌떡 일어났다.
"뭐! 뭐 하려는 거야?"
윤진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아니! 옷은 왜 벗는 거야?"
그녀는 내가 셔츠를 벗어버리니 덜컥 겁이 난 모양이다.
"나도 더워서 견딜 수가 없네."
셔츠를 벗고, 바지까지 벗어버렸다.
"하, 하 과장! 빨리 동영상! 동영상 찍어요. 증거! 나쁜 자식!"
"그쪽이 찍으면 나도 찍지."
"어? 아!"
그제서야 자신들도 이미 옷을 벗은지 오래라는 사실을 떠올린 모양이다.
"윤진씨. 너무 자극하지 마세요."
다시 하 과장이 윤진의 귀에 속삭였다.
"아니. 저 남자가 돈은 받아놓고."
그녀가 말하는 동안 난 다시 자리에 앉아 그녀가 던진 5만 원을 뒤로 던졌다.
"도대체 원하는 게 뭐야? 5만 원으로도 모자라단 거야? 그럼 10만 원! 아주 물 한 병으로 뽕을 뽑네!"
"더운데 괜히 힘빼지 말고 조용히 있지 그래? 그렇지 않아도 언제 고칠지 모르는데, 그러다가 나중에 버틸 기운도 없을 걸?"
"뭐? 당신 뭔데 나한테 반 말이야?"
"윤진씨. 저 사람 말이 맞아요. 아직 고장난 거 모르는 모양이에요."
"하 과장은 도대체 누구편이야?"
"진짜 바보 같은 여자네. 지금 상황이 편 따지고 있을 때야?"
"뭐어?"
"저기... 윤진씨. 이제 그만해요."
하 과장이 말리지 않았어도 윤진이란 여자가 더 난동을 피우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가 몸을 돌려 그녀들을 향하자 윤진은 움찟하며 내게서 눈을 피했다.
그제서야 정말로 위협을 느낀 모양이다.
"보지... 말라구요."
"죄송합니다. 눈길 좀..."
하 과장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하지만 난 이번엔 그녀들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바닥에 앉아 묵묵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윤진이 짜증을 내려다가 하 과장이 말리는 바람에 입을 잔뜩 빼물고 날 노려보고 있었다.
"하아... 더워. 목말라. 저기요!"
조용히 있는 것도 겨우 10분을 넘지 못했다.
윤진이 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제발 물 좀 나눠줘요. 죽을 거 같단 말이에요."
아까보다 현격하게 기가 죽은 목소리는 그동안 내 얼굴을 보고 겁을 먹은 탓이 아닌가 싶었다.
"죄송한데 그 물... 어떻게든 보상을 해드릴테니 나눠주시면 안 될까요? 아무래도 엘리베이터를 고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계속 물도 없이 버티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그래도 하 과장은 윤진에 비하면 훨씬 더 상식있는 여자였다.
"그래. 보상은 해줄게. 얼마든지요. 우리 아빠가 이 빌딩 주인이에요."
윤진은 부친의 재산까기 거론했다.
"그렇게 물이 먹고 싶다면 주지."
난 여섯 병의 패트 병 중 하나를 그녀들 앞에 내밀었다.
"첨부터 그럴 것이지."
윤진이 재빨리 손을 내밀었다.
그새 의기양양해져서 말도 낮춰버린다.
부친이 이 빌딩의 주인이란 말에 내가 겁을 먹기라도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 패트 병에 닫기 전에 난 그걸 뒤로 다시 치워버렸다.
"장난하자는 거야?"
윤진으 바로 얼굴에 짜증을 잔뜩 표출하며 울컥한다.
"공짜는 안 돼."
"준다니까! 얼마든지 말만해!"
그 기고만장한 성격은 버리기 힘든 모양이다.
"돈은 필요 없어."
"그럼 원하는 게 뭐야?"
"옷을 벗으면 주지."
"뭐라고?"
"진심이에요?"
두 여자 모두 화난 얼굴이었다.
"그래. 하지만 둘 중 한 사람만 벗으면 돼."
"응?"
"그렇지 않아도 갖힌지가 너무 오래 되서 심심해 죽겠거든. 언제 구할 수 있을 지 모르니, 눈 요기라도 해야겠어."
"그럴줄 알았어. 더러운 놈 맞았어."
윤진이 씩씩거렸다.
"싫으면 말고."
나와 윤진은 그렇게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대치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하 과장."
윤진이 입을 열었다.
"예. 윤진씨..."
하 과장은 자신의 불길한 미래를 예상한 것 같았다.
"나. 목말라요. 힘들어. 죽을 거 같아."
윤진도 차마 그녀에게 벗으라 소리를 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하지만 쉬지 않고 그런 식으로 강요하고 있었다.
"벗으면... 정말 줄 거죠?"
하 과장이 입술을 깨물고 내게 물었다.
"그러죠."
"알았어요."
하 과장이 브래지어를 풀기 위해 손을 뒤로 했다.
"대신 엘리베이터에서 나갈 때까지 가리려 하지 말고 있는 조건이야. 옷 벗고 물 받고 도로 입으면 내 손해잖아?"
"읏!"
하 과장의 얄팍한 수 쯤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나쁜 새끼!"
윤진은 내가 무척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잘 됐다. 저 여자에게 이쁨 받고 싶은 생각 따위 하나도 없다.
하 과장은 부끄러운지 뒤로 돌아 브래지어를 풀었다.
그리고 손을 내려 팬티도 벗는다.
"이제 내놔!"
윤진이 다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리지 않는 게 조건이라 했었는데?"
"하 과장!"
윤진이 뾰족한 목소리로 부끄러움에 떨고 있는 여자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몸을 돌리지 못했다.
"뭐해! 하 과장! 하정미씨! 지금 부끄러운 거야? 뭐가 그렇게 부끄러워? 남의 남자 앞에선 그렇게 쉽게 벗으면서 말이야!"
윤진의 목소리는 비난의 감정으로 가득했다.
"윤진아!"
하 과장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윤진을 바라보았다.
"나 목말라. 더이상 짜증나게 하지 말고 우리 쉽게 가자고. 하 과장님. 응?"
윤진의 태도를 보면 하 과장의 옷을 벗기려 협박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녀인 듯 싶었다.
하 과장이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