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화 〉@26.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그런데 요즘 뭐 안 좋은 일 있어?"
지난번 나은과 모텔에 갔던 날에도 그랬는데, 가끔씩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어려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때때로 눈가가 부어있기도 했다.
나 때문인건가?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그녀는 꽤 단단한 여자이다.
"응? 고객님 웬일로 나같은 창녀한테도 관심을 갖으셨어요?"
비꼬는 듯 아닌 듯 애매한 말투였지만, 어딘지 감정을 숨기려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 친구 때문인가?"
언제부터인가 난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때 거리끼는 것이 없어졌다.
"음... 네. 좀 그런 거 같아요. 미안해요. 신경쓰이게 해서. 그래도 다시 만나고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주은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미안해서 그런 건가?"
"미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며칠전엔 전화를 해서 아무말도 없이 끊더니... 아까는 나한테 당신이랑 잘 되냐고 묻더라고요."
그날 있었던 일은 주은과 그녀의 옛 남자 친구에게는 모두 엄청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도대체 뭐가 알고 싶은 거냐고 했어요?"
"그냥 궁금해서라고 하더라고요. 기껏 전화를 해서 그런 거나 묻고... 하... 참. 미안해요. 괜히 신경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어?"
"아뇨. 절대로... 이미 늦었어요."
주은이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을 알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고객님."
고객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의 주은이 짓고 있던 웃음은 그 어느때보다 서글펐다.
그녀 또한 내 태도에 슬퍼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녀도 나은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여하틑 앞으로는 다시는 신경쓰이게 하지 않을게요. 오빠... 그 사람한테도 다시는 전화하지 말라고 했어요."
주은도 나름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노력에 대해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탐정 사무소로부터 메시지가 와 연락을 해 보았다.
"의뢰하신 두 분을 쫓아다니던 자들에게 의뢰를 한 사람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금융 기록으로는 의뢰인을 찾을 수 없어 직접 만나서 알아보았다고 한다.
"그쪽도 누구인지는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선글라스를 낀 여자가 와서 의뢰를 맡기고 메일로 자료를 받아보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지금은 메일 주소로 상대를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찾아내겠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의뢰에 대해서는 벌써 자료를 정리해서 보내주겠다고 한다.
전화를 끊고나니 바로 메시지가 왔다.
확인해보니 나은의 전 남자 친구와 그가 결혼할 여자에 대한 정보였다.
정윤진.
대양 실업 대표의 1남 1녀 중 장녀.
나이는 25
대학을 졸업하고 부친의 회사에 다니다 나은의 남자 친구와 사귀게 되어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대략 나은에게 들은 내용들, 그리고 그들이 다닌다는 대양 실업이란 회사에 대한 내용들이 세심하게 적혀있었다.
사실 그 회사에 대해서는 딱히 내가 관심을 가질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사진이라든지, 거주지 등은 내게 필요한 정보였다.
그 외에도 소소하지만 알아두면 좋을 것들이 있었다.
그녀의 부친은 딱히 아들에게만 회사를 물려줄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딸에게도 기회를 주고, 아니면 사위에게 회사를 물려줄 생각도 있는 것 같았다.
나은의 옛 남자 친구가 제법 쓸만한 사람이었나보다.
탐정 사무소에서 찍어보낸 사진을 보니 제법 괜찮은 여자였다.
나은의 의뢰가 아니었다해도 손에 넣을 가치는 충분해보였다.
그렇다면 나은의 의뢰를 실행하는데 필요한 것은 전부 갖춰졌다.
이제 내가 선택할 것은 그녀를 어떻게 손에 넣을까 하는 것 뿐이다.
당장 그 여자를 상대로 캐스팅 카드 < 여배우 >를 사용하고 액티브 카드 < 모니터 >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꽤나 미녀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 능동적 주인공 >이나 < 수동적 주인공 >을 사용할 필요를 느끼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난 차를 몰고 강남의 한 빌딩으로 향했다.
바로 오늘의 목표인 윤진이라는 여자의 부친이 운영하는 사업체가 들어있는 곳이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트렁크에서 가지고 온 페트 병과 비닐 봉투를 꺼내 손에 들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주말이라 그런지, 오가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엘리베이터에서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니, 저쪽에서 두 여자가 또각거리며 걸어왔다.
두 여자는 내게 신경쓰지 않는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내가 먼저 올라탔고, 두 여자도 함께 올라탔다.
여자들이 15층을 눌렀고, 난 페트병을 내려놓고 12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1층에서 문이 열렸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타는 사람은 없다.
다행이다.
하마터면 헛걸음을 할 뻔 했다.
다시 엘리베이터가 올라간다.
대략 절반 쯤 올라갔을 때 카드를 찢었다.
Special!! 카드 < 정지된 엘리베이터 >
- 엘리베이터가 정지합니다.
- 외부와 소통이 가능한 모든 통신 수단이 불통됩니다.
- 온도가 서서히 올라갑니다.
- 옷을 벗고 싶어집니다.
- 목이 마르는 군요.
- 어쩐지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습니다.
- AV 메이킹을 끝낼 때까지 엘리베이터는 외부와 완전히 단절됩니다.
- 카드를 사용하시려면 카드를 반으로 찢어 주세요.
텅!
순간 엘리베이터가 멈춘다.
"어? 갑자기 왜 그러지?"
먼저 입을 연 것은 오늘의 목표인 윤진이라는 여자였다.
"그러게요? 잠깐만요."
윤진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탄 여자가 엘리베이터 패널에서 관리소와 연락하는 단추를 눌러본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연결이 되지 않는다.
"무슨 일이지? 연결이 안 돼요."
여자가 걱정스럽게 윤진에게 말했다.
"뭐야? 토요일이라고 퇴근한 거야?"
윤진이 짜증을 낸다.
"잠깐만요. 제가 전화라도 해볼게요."
"빨리 해 봐."
"응? 왜 신호가 안 잡히죠?"
"응? 잠깐만. 내 것도 그런데?"
두 여자 모두 각자의 전화기를 꺼내보고 신호가 잡히지 않는 것을 보고 당황해한다.
"저기요. 죄송한데 그쪽은 전화 신호 잡히세요?"
윤진과 함께 탄 여자가 내게 물어왔다.
"아뇨. 저도 안 잡히네요."
대충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확인해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 진짜! 뭐야?"
윤진이 짜증을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
"왜 안돼지?"
다른 여자가 다시 엘리베이터 패널을 마구 눌러본다.
"뭐하는 거야? 그러다가 더 고장나면 어쩌려고?"
"죄송해요."
윤진보다 서너 살은 많아보이는 여자는 윤진의 말에 꼼짝을 못했다.
"진짜... 왜 이런 거야?"
"저. 소리쳐서 사람을 불러보면 어떨까요?"
"그럼 빨리 해 봐!"
윤진이 동행을 윽박지르듯 말했다.
"저기요! 여기 엘리베이터가 멈췄어요! 누구 없어요?"
여자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 진짜! 에어컨도 멈춘 거야?"
엘리베이터가 멈추는 순간부터 위에서 내려오던 바람도 멈추어버렸다.
벌써 7월도 중순이다.
한참 더울때라 좁은 공간에 갖혀 에어컨이 멈춰버리니 바로 더워오기 시작했다.
"여기요! 누구 없어요?"
여자가 소리쳤다.
그녀가 한참을 소리쳐도 그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다.
"토요일이라 사람들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에요."
"아! 짜증나!"
윤진이 엘리베이터 벽을 크게 한 번 찼다.
"위험하니까 그런 행동은 안하시는 게 좋겠어요."
내가 처음으로 그녀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요. 윤진씨."
"아! 몰라! 어떻게 좀 해 봐요."
"예..."
여자는 다시 목이 쉬도록 밖을 향해 소리쳤다.
"저기요. 거기도 구경만하고 있지 말고, 어떻게 좀 해봐요."
윤진이 내게 말을 던졌다.
"지금 그렇게 불러도 오는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이 층에 사람이 없는 것 같은테요."
"아니. 그래도 어떻게든 해봐야 할 거 아니에요?"
"엘리베이터들은 전부 관리실에 연결되어있으니까 그쪽에서 조만간 조취를 취할 거예요. 잠시 기다려봅시다."
"저기요! 살려주세요!"
그리고도 한동안 여자는 밖을 향해 소리지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한동안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힘이 빠졌는지, 여자가 숨을 헐떡거렸다.
"더 해봐."
"예."
여자는 윤진의 한 마디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살려주세요!"
"아니. 계속 구경만 할 거예요? 같이 어떻게 해봐야 하잖아요?"
윤진이 다시 내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라고 딱히 무슨 방법이 있는 게 아닌데요."
"그쪽은 남자잖아요!"
"예. 여자는 아니죠."
"그럼 문이라도 열어봐요."
"안돼요. 그러다가 잘못하면 큰일나요. 윤진씨."
동행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그녀를 말렸다.
"엘리베이터에 갖히면 절대 쓸데 없는 거 건드리면 안 된데요. 잘못하면 추락할 수도 있어요."
"하아... 덥다..."
더운 날씨였다.
나도 슬슬 셔츠 안에 땀이 차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더울 때면 옷이라도 벗고 싶어진다.
"저기요. 그쪽 이쪽 보지 말아줄래요?"
윤진이 내게 불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 보고 있습니다."
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해주었다.
"그리고 엉뚱한 생각 하지 말아요. 지금 카메라로 전부 찍고 있으니까."
윤진은 정말로 스마트폰의 카메라를 내게 향하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왜 합니까?"
"그잖아요? 여자가 둘이나 있고, 엘리베이터 고치러 오지도 않고 있으니까."
"저. 윤진씨. 괜히..."
동행인 여자가 윤진을 잡아당기고 그녀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괜히 자극하지 마세요. 혹시 진짜로 나쁜 생각 먹으면 어쩌려고요."
귓속말이라 해도 겨우 한 평 남짓한 공간이다. 내게 들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쁜 생각 안 하니까 걱정 마세요. 난 엘리베이터가 다시 가동될 때까지 뒤돌아있을테니, 엉뚱한 사람 이상하게 취급이나 말아요."
기분 나쁜 티를 잔뜩 내며 뒤로 돌아 바닥에 앉았다.
"기분 나빠요? 뭐가 기분 나쁜데요? 여자들이 낯선 남자랑 갖혀 있으면 무서운 게 당연하잖아요!"
동행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윤진은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모양이다.
"하아... 덮다."
"그러네요. 큰일이네. 빨리 고쳐야 할텐데..."
"저기요."
윤진이 다시 날 불렀다.
"뭡니까?"
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퉁명스래 대답했다.
"저기 위에 좀 올라가 보세요. 보통 위에 보면 나가는 구멍 같은 거 있잖아요? 그쪽은 키도 큰 거 같은데 쉽게 올라갈 거 아녜요."
"일 없어요. 미쳤어요? 그런 짓을 하게? 잘못해서 떨어지면 거기가 책임질 거예요?"
"무슨 남자가 그렇게."
"하지 마요. 윤진씨."
"아니. 하 과장은 뭘 자꾸 하지 말라는 거예요. 말도 못해요? 그리고 내가 무슨 엉뚱한 소리 했어요? 엘리베이터를 고치든지, 아니면 나갈 길을 찾아봐야 할 거 아녜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직접 하시죠. 다른 사람 시키지 말고."
"뭐에요? 남자가 되서 그게 할 말이에요?"
"윤진씨..."
"아니면 하 과장이 해 봐요."
"예? 뭐를요?"
"저기 보니까 열릴 거 같아요."
"아니. 그래도."
"보통 영화 보면 그렇잖아요? 저거 열고 나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거 아녜요."
"쓸데 없는 소리 하지 마요. 올라갔다가 잘못하면 수십미터 아래로 떨어지는데, 그걸 시키는 게 말이 되요?"
난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당신이 해보든가!"
"윤진씨..."
"아니면 무슨 방법을 찾아봐요! 더워 죽겠는데."
윤진은 이번엔 동행인 하 과장에게 다시 화살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