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8화 〉@22. 용의자
"혹시 김도연씨랑 권나은씨?"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맞아요. 누구세요?"
"나 CS팀 서희에요."
"반 팀장님?"
지금까지 묵묵히 듣고만 있던 여자도 입을 열었다.
"네. 누구시죠?"
"나 정지혜에요. 아시겠어요?"
"정 팀장님?"
그렇게 네 사람은 서로 통성명을 했다.
그리고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아는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에 안도를 하다가, 누구인지 모를 사람들이 그녀들을 잡아왔다는 현실에 다시 두려움에 휩싸였다.
시간이 흘러갔다.
점점 두려움은 커져갔다.
도대체 누가 어떤 이유로 그녀들을 잡아온 것인지 알 수 없으니 더욱 무서웠다.
"집에 가서 밥 해야 하는데..."
가족을 남겨두고 온 유부녀들의 걱정은 그런 것이었다.
"흑! 엄마!"
아직 처녀인 여자들은 가족 이야기가 나오자 눈물을 터트렸다.
"흑! 어떻게 해..."
눈물을 전염성이 강했다.
잠깐 사이에 여자들은 전부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다시 시간이 흘러갔다.
이젠 모두 울음을 멈추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가시지는 않았다.
아니. 그녀들의 두려움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커지고만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요?"
"어디다 팔아버리려는 거 아닐까요?"
"요즘 세상에 인신 매매가 어디있어..."
자신들을 가둬놓은 상대가 나타나지 않으니 각자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모르죠. 그런 것도 있다잖아요. 그..."
누군가가 아주 끔찍한 상상을 했다.
"사람을 잡아다가 장기..."
"악!"
한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그런 소리 하지 마요!"
"흑!"
누군가가 눈물을 터트렸다.
다시 눈물이 전염되기 시작했다.
시간은 내 편이었다.
그저 가두어 놓기만 한 것으로도 그녀들에게는 아주 충분한 두려움을 줄 수 있었다.
이제 자신들을 납치해온 악당들의 보스가 등장하기 적당한 시점인 듯 하다.
"가만히 있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보라의 뒤에서 가지고 온 안대를 채웠다.
"또 무슨..."
보라는 무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어차피 내가 시키는대로 해야 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보라의 눈을 가리고 패널에 감옥으로 내려가는 카드를 가져대었다.
엘리베이터는 중간에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지하 8층까지 내려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카드를 사용하면 외부에서는 내가 탄 엘리베이터를 멈출 수 없는 모양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난 앞을 볼 수 없는 보라를 인도해서 복도를 지나 그 문 앞에 섰다.
다시 카드로 문을 열자 응접실이 나온다.
꽤 넓은 공간 한쪽에 소파가 놓여있고, 저쪽으로 문이 두 개 보인다.
두 개의 문 중 고풍스러운 나무문을 열고 들어갔다.
감옥의 관리자가 사용할 것 같은 사무실에는 커다란 책상 하나와 침대가 놓여있다.
사무실의 한 가운데까지 가서 걸음을 멈추었다.
"여긴 어디야?"
계속 눈을 감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한지 기어이 보라가 입을 열었다.
"니키타 로마노바."
그리고 난 그녀에게 부여된 다른 이름을 불렀다.
순간 보라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난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가린 안대를 풀렀다.
"아!"
눈앞이 밝아오자마자 그녀는 날 바라보고 깜짝 놀란다.
니키타 로마노바는 아직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도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잠자코 지켜보았다.
지난번에 난 그녀에게 내가 그녀를 죽일 것이라 말했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에 기억하는 장면이 그랬을 것이다.
과연 그녀는 그걸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이 리셋되고 처음부터일까?
아무래도 전자인 모양이다.
"당신! 당신.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저 적개심으로 가득한 눈을 보니, 그날의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모양이다.
잘됐다.
"정신이 드나? 니키타 로마노바."
난 침착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잠입 수사요원 니키타 로마노바 코스튬을 다시 사용하기 전, 두 가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한 가지는 물론 그녀의 기억이 완전히 리셋되는 것.
그럴 경우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저 신뢰할만한 상관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 그만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경우.
그녀가 그날 내게 마구 능욕당하고, 자신이 살해되는 순간을 기억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라면 당연히 그녀는 내게 적대감을 보일 터이니, 스토리의 진행이 까다로워질 것이 틀림없다.
"말해! 말해봐요!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가요? 그때 나는 틀림없이..."
그녀는 자신이 살해당한다 믿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옷을 갖춰있고, 내 앞에 서있다.
"축하하네."
"네? 뭐라고요?"
잠입 수사관 니키타는 내 말에 무척이나 당황한 것이 틀림없다. 그녀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다.
"자넨 내 테스트를 통과했네."
"설마 그 일들이 전부 테스트였단 말인가요?"
어쩐지 그녀의 얼굴엔 안도감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래. 난 앞으로 세상을 바꿀 아주 위험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그 일을 위해서는 정말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지."
내가 말하는 동안 보라는 묵묵히 듣고 있었다.
"내 지시라면 무엇이라도 따르고, 설사 내가 배반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내게는 결코 이빨을 드러내지않을 사람이 필요했어. 그리고 그 기준에 합격한 사람이 바로 니키타 로마노바, 자네인 거지."
난 준비했던 멘트를 뱉었다.
사실 조금 어색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연기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수시로 바뀌는 니키타의 얼굴을 보니 날 의심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정말... 정말로 그게 다 테스트였던 건가요?"
니키타 로마노바가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의미일까? 또다른 배신감? 아니면 안도감?
확인해보면 알겠지.
"이리 가까이 와보게."
니키타 로마노바는 잠시의 고민도 없이 내 지시를 따랐다.
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녀의 블라우스를 잡고 양쪽으로 확 잡아당겼다.
투두둑!
단추가 벗겨지고 떨어져나가며 블라우스가 벌어졌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계속해서 블라우스를 그녀의 팔에서 벗겨내고, 브래지어를 풀렀다.
니키타는 여전히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며 날 바라보고만 있었다.
출렁!
보라의 가슴이 가볍게 흔들렸다.
보기 좋다.
방금 전에 섹스를 하고 왔지만, 지금 이 여자는 보라가 아니라 내게 충성을 받치는 니키타라는 생각을 하니 다시 아랫도리가 묵직해진다.
"나머지는 알아서 직접 벗도록."
보라는 날 묵묵히 바라보며 옷을 벗었다.
한쪽 팔에 걸려있는 브래지어를 벗겨내리고, 스커트를 벗고, 스타킹에 이어 마지막 남은 팬티까지 벗어내린다.
그렇게 나신이 되어버린 그녀가 날 바라보았다.
난 내 바지를 가리켰고, 보라는 바로 명령을 따랐다.
내 바지가 벗겨졌고, 팬티도 아래로 내려갔다.
그렇게 내 아랫도리를 발가벗긴 니키타는 다시 일어서서 내 상의도 정성스래 벗겨주었다.
"그럼..."
내가 시킨 일을 전부 이행한 니키타가 내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침대로 갈까?"
"네."
어울리지 않게 수즙게 대답하는 니키타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울렁거린다.
그러고 보면 보라는 내게 저런 표정을 지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명백하게 보라가 아니라 니키타이다.
니키타는 침대로 가 살며시 걸터앉았다.
"저..."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명령이다. 누워서 다리를 벌려."
"알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한 보라가 다리를 벌리고 커다란 침대의 한복판에 누워 빨개진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난 네 몸을 취할 것이다. 이의는 없지?"
"네."
간신히 입술을 벌린 니키타의 몸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난 그녀 앞으로 가서 다시 삽입을 했다.
겨우 삼십 분 전까지 실컷 맛을 본 여체인데, 어쩐지 느낌이 다르다.
마치 우리가 오늘 처음으로 몸을 섞는 기분이 들었다.
"으음..."
니키타는 두 손을 위로 올려 얼굴을 가리며 신음을 내뱉었다.
"부끄러운가? 잠입 수사관을 하다보면 많은 일을 겪게될 터인데, 이런게 부끄러우면 어떻게하지?"
"하지만... 본부장님과는..."
"처음도 아니지않은가? 두 손을 얼굴에서 떼도록."
"하지만 학!"
보라가 가까스로 손을 치웠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서 난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어떤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으음... 본부장님... 학!"
니키타는 두 팔을 벌려 내게 안아달라 요구했다.
내가 상체를 숙이자, 그녀는 서슴지 않고 내 몸을 끌어안았다.
무척 즐거운 섹스였다.
평상시 보라와의 섹스는 늘 쾌락과 미움이 뒤섞인 행위였다.
하지만 이번 섹스는 애정으로 충만했다.
"하아! 좋아요. 너무. 기뻐요."
날 바라보는 그녀의 눈과 입을 튀어나오는 단어들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했다.
그건 단순히 코스튬으로 인한 설정일까?
아니면 지금까지 보라가 쌓아왔던 어떤 감정이 표출된 것은 아닐까?
한 번은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걸 대답해줄 사람은 여기 없다.
"하아... 하아..."
절정을 맞이한 보라는 여전히 감정으로 가득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좋았어요. 정말."
문득. 난 보라에게서도 이런 말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코 그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동시에 하고 만다.
그녀의 미움이 애정으로 바뀌면 다시 되돌릴 수 없을 거라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니 사랑을 받는 것은 니키타 하나로 만족하자.
잠시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애정으로 가득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서로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다시 섹스를 시작했다.
한참 동안 난 정신없이 내게 애정을 보내고 있는 보라를 즐기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니키타 로마노바는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저... 지난번에..."
"말하게. 서슴없이."
"지난번처럼 묶여서 하는 것도..."
잠입 수사관 니키타 로마노바의 수줍은 표정이 날 즐겁게 한다.
"그런 걸 좋아했던 건가?"
"좋아했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좋았습니다."
수줍으면서도 또박또박 떨어지는 말
"그럼 기억해두지. 지금은 마땅히 묶을 게 없으니, 이걸로 해볼까?"
난 침대에서 내려가 바지 허리띠를 풀러 그녀의 두 팔을 뒤로 결박했다.
니키타 로마노바의 눈에 기쁨이 스쳐지나간다.
"본부장님."
"응?"
"저... 조금 거친 행위도 참을 수 있습니다."
니키타 로마노바의 취향은 꽤 확실한 모양이다.
어째서일까? 처음부터 그랬던 걸까?
아니면 지난번 죽음의 경험이 그녀를 그렇게 만든 걸까?
만일 원래부터 그랬다면, 그건 보라의 취향일까?
아니면 니키타 로마노바의 취향?
여러모로 생각이 깊어진다.
찰싹!
난 우선 가볍게 그녀의 엉덩이를 때려보았다.
"윽!"
살짝이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아팠던 모양이다.
그녀가 고통을 호소한다.
"하윽!"
그런데 어째서 엉덩이를 그렇게 흔들며 야릇한 신음을 내뱉는 걸까?
"아픈가?"
"아파요. 하지만 본부장님이 내리시는 임무라고 생각하면 충분히 참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그녀는 오직 나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했다.
보라는 내손을 잡아끌었다.
자신의 목으로.
난 어느새 그녀의 목을 살며시 누르고 있었다.
보라의 고개가 뒤로 넘어가고 눈이 거의 감겼다.
그녀는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맞이했던 죽음의 순간을.
확실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 경험이 그녀에겐 어떤 성적 자극으로 남은 듯 하다.
내게 고통을 당하고, 목을 졸리고,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것이 굉장한 쾌감으로 남은 모양이다.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날 그녀는 그 죽음의 고통속에 굉장한 쾌감을 느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설정 < 중첩 >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거의 두 자리 수에 달하는 섹스를 했다.
그녀에게도 내게도 하룻밤에 그렇게 많이 해본적은 없었다.
그에 따라 중첩된 쾌락의 효과가 도대체 얼마나 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 중첩 시 얻을 수 있는 쾌감의 정도는 도박이나 마약 따위로 얻을 수 있는 쾌감을 훨씬 상회합니다.
- 배우가 느낄 수 있는 쾌감에는 한도가 없습니다.
한계가 없는 쾌감을 느꼈다.
동시에 죽음의 공포도 느꼈다.
그녀의 마음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이루 말할 수 없는 쾌감이 동일시 되고 있다해서 이상할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