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22. 용의자
"아 짜증나. 오늘도 사람들이 온통 그 얘기만 하더라니까."
도연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투정을 부렸다.
"뭐. 그런 소문이 돌고 있으면 그럴만 하잖아?"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자의 말을 받아넘겼다.
"진짜 웃긴 거 있지? 아침엔 나은 언니가 그 남자한테 먼저 접근했다더라. 어쩜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지. 나은씨야 달리 사귀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한테 관심이 생겼을 수도 있잖아?"
"그게 관심이야? 욕심이지? 진짜. 추잡하게..."
도연은 얼굴을 찡그리며 나은의 흉을 보았다.
"얼마전까지만해도 그 남자 꼴보기 싫다고 툭하면 그래놓고."
"하하. 사람 마음이야 바뀔 때도 있는 거지. 안 그래?"
"자기는 사람이 왜 맨날 그렇게 착해?"
도연이 남자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착한 게 아니고. 뭐 다들 저마다 사정이 있으니까 굳이 안 좋은 점을 찾으려고 들출 필요 없다는 거지."
"그게 착한 거지!"
여자는 영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자기 그때 그 남자 때문에 사장님한테 눈밖에 날 뻔 한 거 기억도 안 나?"
"그게 뭐 영웅씨 때문이었나? 내가 실수한 거지."
"그걸 왜 자기가 굳이 들춘대? 지가 뭐라고."
"그러지 말고 밥 먹어. 식겠다. 응?"
남자는 어떻게든 여자 친구를 달래보려 노력했다.
"아! 짜증나! 나 당신 다 좋은데, 그렇게 착한 거 정말 싫어. 그렇게 착하게만 사니까 자기 팀 사람들이 맨날 자기한테 일이나 떠넘기고 그러잖아?"
"미안. 내가 좀 고쳐볼게. 그러니까 자기가 화 풀어. 정말로 노력하고 있다고."
"진짜... 나 한테만 착하면 되지..."
도연은 마지 못해 다시 포크를 들었다.
"근데 다들 어쩜 그렇게 속물 같아? 하룻밤 사이에 평판이 백팔십도로 확 바뀌고..."
"속물이라 그러는 게 아니라, 그냥 좀 신기한 거지 뭐. 나도 그런 이야기 들어보기만 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까 신기하던데 뭐."
"아니. 그러니까 좀 사람 좀 미워하고 그래보라고. 좀!"
"응. 그래."
"진짜 술에 술탄듯, 물에 물탄듯!"
"하하..."
"그것도 하지마. 하하! 하하!"
"알았어."
남자는 여자가 짜증을 내는 동안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웃음으로 받아주었다.
"진짜. 내가 오빠 사랑하니까 참는다."
결국은 남자의 인내가 승리했다.
도연은 더이상 남자 친구에게의 애꿎은 화풀이를 포기했다.
"제일 맘에 안 드는 건 나은 언니란 말야. 나랑 그렇게 말을 맞춰놓고."
"이제 그만 해. 괜히 엄한 소리 퍼트려서 좋을 게 뭐가 있어?"
"난. 그 남자 회사에서 얼쩡거리는 거 보기 싫다고. 정말로. 나은 언니도 그랬단 말이야. 그런 험악한 남자 진짜 눈에 거슬린다고."
"근데 얘기 들어보니 돈도 많다며. 그럼 뭐 조만간 그만두지 않을까?"
"몰라. 아! 진짜. 짜증나. 무슨 그런 놈한테 그런 행운이 온데?"
도연은 포크로 파스타를 돌돌 말았다가 풀어버리고, 다시 돌돌 말았다가 풀어버리기를 반복했다.
여자 친구가 식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이제 더이상 그녀에게 식사를 권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점심 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간신히 식당을 나설 수 있었다.
"나야. 요즘 어떻게 지내?"
여자는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공원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갈 무렵이라 공원에 남아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각기 자기 회사로 들어가기 바빠 공원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도 잘 지내지. 사귀는 사람? 그런 거 없어. 자긴 아직도 그 사람이랑 잘 되고 있는 거지?"
말을 하다 말고 여자는 담배를 깊숙히 빨았다.
"하하. 그래. 잘 됐다. 언제?"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여자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 없었다.
"정말? 음... 아니. 난 안 갈래. 내가 가면... 아무래도 자기가 불편하겠지? 마음만은 고마워. 대신 축의금은 보낼게."
상대방이 말을 하는 동안 여자는 다시 한 번 담배를 빨았다.
후우...
"그래. 그렇게 할게. 그럼 전화 끊는다."
전화를 끊고 나서 여자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더 피웠다.
그 사람과 헤어지고 나서 좋은 거라고는 이거 하나뿐인 것 같다.
후우...
더이상 그 남자 눈치를 보지 않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것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고마웠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여자의 눈에 흐르던 눈물은 이미 말라붙어있었다.
언제까지고 과거에 얽메어 있을 수야 없지.
"뭐. 잘된 일인지도 모르지."
여자는 억지로 그렇게 좋은 면을 보려 했다.
"뭐. 못 할게 뭐가 있어."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다.
그런 남자 하나 쯤 손에 넣는 거 뭐 그리 어려울까?
회사로 걸어가며 그녀는 생각해보았다.
안 간다고는 했지만...
만일 생각대로 된다면...
그 남자랑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뭐. 얼굴은 조금 빠지지만, 몸은 좋으니 잘 꾸며놓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차는 어떤걸 타고 다니는 거지?
시계 두 개를 수천만 원이나 주고 냉큼 샀다고 하니, 차는 그 이상이겠지.
좋아.
어차피 잃을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해보는 거야.
회사 앞에 다다른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니까 회사에서 나한테 안 좋은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이 적어도 세 명은 있다는 거지?
문희양과 주은과 대화를 나누며 회사 분위기에 대해 알아보았다.
문희가 말하기를 도연이라는 여자는 키가 작은 편이고, 귀엽게 생겼다고 한다. 발랄한 성격이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여자들은 물론이고 얼마 안 되는 남자들 중에서도 그녀를 흠모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라 했었다.
주은이 없는 자리에서는 주은과 함께 우리 회사에서 제일 인기 많은 두 사람 중 하나라고 했다.
주은에게 듣기로는 생긴 것에 비하면 꽤나 성격이 있는 모양이다.
상사한테 잔소리를 들으면 위축되기 보다 끝까지 할 말은 하는 여자란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한 것은 밀어붙이는 타입이라고 했지?
권나은. 아침에 내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던 여자.
그녀가 뒤에서 날 욕하고 다녔다는 말에 꽤나 놀랐다.
회사 여자들 중에는 키가 가장 큰 편이고 몸매가 좋다.
꽤나 쿨한 성격이라 여자들 사이에서는 큰언니 역할을 한다고 했다.
키와 매력있는 몸매, 그리고 시원한 성격 때문에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두루 인기있는 여자였다.
주은의 평가로는 무척 계산적인 여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희.
꽤나 조용한 성격에 그다지 다른 사람 앞에 나서지 않는다 했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나도 기억을 한다.
키는 좀 큰 편이고 몸도 꽤나 육감적이어서 그냥 걸어가고 있어도 눈에 띈다.
그녀는 나은이나 도연과는 같은 무리 사람은 아니다.
CS팀 팀장이고 올해 초에 결혼을 해서 한참 신혼인 모양이다.
문희와 주은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참 고민해본다.
내가 그녀들에게 원한을 살 이유가 도대체 뭘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녀들과의 접점은 아무것도 없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요. 사람들이 누군가를 미워하는 거야 흔히 있는 일이에요. 진짜 사소한 이유로 한 번 밉보이면 꼴도 보기 싫어질 때도 있어요."
문희가 없을 때, 주은이 해준 말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누군가가 날 미워한다고 해서 그리 신경쓰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너무 달랐다.
누군가가 내게 원한을 갖고 있었고, 내게 해코지를 하려 한다.
아직까지는 사진 몇 장을 보낸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더군다나 날 따라다니며 사진을 찍는다고?
그건 틀림없이 위험 신호이다.
며칠 동안 탐정 사무실에서는 조사 결과를 알려주지 않았다.
내가 지정한 두 사람, 그러니까 정 팀장과 나를 탐정 사무소의 베테랑이 뒤쫓으며 누가 따라다니는지 알아보고 있지만, 아직 눈에 띈 사람은 없단다.
그러니까 항상 날 따라다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 두 번의 사진은 어쩌면 우연이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제까지고 탐정 사무소에서 우리 뒤를 쫓는 사람을 찾아낼 때를 기다려야 할까?
어느 순간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난 전화기를 켜고 번호 하나를 찾았다.
신호가 두 번 가고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아마 남자일 것이다.
목소리는 변조되어있다.
"예. 호송 서비스입니다."
"지정된 사람의 호송을 부탁합니다."
"대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십시오."
남자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감정이 하나도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물어왔다.
"어떤 정보가 필요한가요?"
"이름. 연락처 정도면 됩니다."
난 네 사람의 이름과 그쪽이 원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원하는 시간은 어떻게 되십니까? 급하시다면 특송료가 붙습니다."
"내일 오후 1시까지면 충분합니다."
"알겠습니다. 확인 후 메시지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정도 지나 문자 메시지가 왔다.
- 총 비용 1,000만 원. 입금이 끝나면 바로 시작합니다.
- 정지혜 외 3인에 대한 호송 서비스 비용 1,000만 원을 출금합니다.
그리고 안내가 왔다.
네 사람의 운반 비용이 1,000만 원이면 비싼 걸까?
글쎄 모르겠다.
솔직히 감도 잡히지 않는다.
탐정 사무소에 의뢰한 것들은 불법과 합법의 중간에 놓여있다면, 이건 명백한 범죄 행위이다.
그것도 중범죄에 해당한다.
액티브 카드 < 죄수 호송인 연결 >
- 지정한 배우를 감옥으로 이송합니다.
- 지정한 배우를 감옥에서 원하는 장소로 이송 후 출감시켜줍니다.
- 본 서비스 이용시 합당한 비용이 청구될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걸 과연 써야 할지 많이 고민했다.
표현은 이송이지만, 실제로는 납치다.
만의 하나라도 문제가 생긴다며?
꽤나 골치가 아프겠지.
하지만 나를 AV마스터로 만들고 이 말도 안되는 능력을 준 바로 그 카드의 서비스이니 믿을 수 있었다.
내가 지닌 다른 능력에 비한다면 누군가를 데려오는 것은 아주 사소한 수준에 불과하다.
다음날은 토요일이었다.
난 평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일어났다.
평소보다 조금 늦은 식사를 하고 씻고 집을 나섰다.
감옥이 위치한 논현동의 그 건물에 도착하니 겨우 1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1층 로비에선 보라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꼭 이렇게 이른 시간에 불러야 해?"
아침부터 불렀더니, 보라는 평소보다 더 날카롭게 날 대했다.
아무래도 남편도 아이도 집에 있는 시간에 나와 먼 곳에 와야해서 마음이 편치 않은 모양이다.
"이제 며칠 안 남았는데,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자고."
"유종의 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보라에게 약속한 한 달이 거의 지나고 있었다.
그러니 며칠만 지나면 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다.
물론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
난 보라와 함께 스파 클럽으로 올라갔다.
언제나처럼 안나들이 날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보라와 함께 스파에 들어가서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흐음... 학! 아!"
처음엔 날 노려보던 보라가 입을 열고 신음을 내뱉는다.
보라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당황해버렸다.
물론 행위가 짙어지면 후반에 가셔야 그러기 마련이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달리 대단한 것을 한 것도 아니고, 겨우 애무만이었는데 그랬다.
"좋은가 보네?"
"하나도 안 좋아... 읍!"
보라는 터져나오려는 신음을 막기 위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굴리며 자신이 오늘따라 왜 그러는지 고민하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내가 오늘 특별히 그녀에게 액티브 카드 < 표현 >을 활성화시킨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이제 그녀와 즐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에 그녀의 선택을 돕기 위해 약간의 장난을 치기로 했다.
"흡! 아!"
내 손길이 닿을 때마다, 보라는 당황했다.
물론 그녀도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몸이 이미 내게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줄곧 그녀는 그걸 부정해왔다.
정말 참지 못하는 순간이 올 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쾌감을 표출하려 하지 않았다.
"윽! 으으..."
지금 내 손길은 그녀의 가슴을 더듬고 있었다.
보라는 오랜만에 얼굴을 붉히고 난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이젠 솔직할 때도 되지 않았어?"
내 질문에 보라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랑은 잠자리도 하지 않는 거 알고 있어."
보라가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