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22. 용의자
스토커라고?
주은의 말을 계기로 사건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정말로 날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있다 생각한 것은 아니다.
스토커라면 누군가가 보통은 어떤 왜곡된 애정을 지닌 사람이 대상의 의지에 상관없이 따라다니는 경우를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이 회사에, 아니 굳이 회사에 국한되지 않아도, 누군가가 내게 애정을 지니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보다는 차라리 원한이라면 더 그럴듯해 보인다.
물론 타겟은 정 팀장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하지만, 나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참. 회사에 나에 대해 떠도는 소문 있죠?"
내친 김에 주은에게 물었다.
"네? 당신한테요?"
주은의 얼굴이 살짝 어색하게 변했다.
"괜찮아. 아는 게 있으면 말해봐."
"당신이 어린 여자랑 모텔에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던데..."
주은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걸 본 사람이 누군데?"
"도연씨라고..."
그건 또 누구지?
회사에 여직원이 잔뜩 있는데,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 여자는 정작 얼마 되지 않는다.
그보다 정 팀장에게 들은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데?
우선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자.
"도연씨가 얼마 전에 광진구의 모텔 앞에서 당신이 굉장히 어린 여자를 억지로 끌고 들어가는 걸 봤다고 했어요."
억지로?
아무리 기억을 되살려보려 노력해보아도 누군가를 억지로 끌고 간 기억은 나지 않는다.
어린 여자라고 했다면 지연이나 수빈일 터인데...
"도연이란 여자가 자기가 직접 본 게 맞다고 하던가?"
"네. 제가 똑똑히 들었어요."
"그리고 소문을 퍼트린 건 너였고?"
"어... 음..."
주은은 눈을 굴렸다.
"제가 사실은 좀 사정이 있어서... 헤..."
그녀는 혀를 내밀고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 사정 알잖아요. 사람들이랑 친해지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거... 여자들이랑 친해지는 데에 수다만큼 좋은 게 없거든요."
수빈이 말을 옮기고 다니는 사람이란 것은 정 팀장과 문희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었다.
"잘못했어요. 정말 죽을 죄를 졌어요."
주은이 입술을 요상한 모양으로 접으며 사과를 했다.
"뭐 어쩔 수 없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진짜요? 그럼 용서해주는 거지요?"
"그건 다른 문제지. 어쨌든 주은씨가 그러고 다닌 바람에 내 평판이 아주 바닥을 치게 된 거 같으니까."
"딱히 나 때문이라기엔... 원래 좀 소문이 그랬는데..."
주은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사실은... 좀 무섭게 생기셨잖아요..."
주은이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래서?"
"진짜로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이에요. 특히 도연씨가 그랬구요."
다시 그 이름이 나왔다.
"그런데 도연씨? 그 사람이 내가 누구를 억지로 끌고 들어가는 걸 봤다고 했다고?"
"네. 무척 이쁜 여자였는데, 정말 마지 못해 들어가는 것이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것 같다고 했어요."
"그 사람이 날 무서워한다고? 어떻게?"
"전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강 뭔가 안 좋은 쪽 사람이 틀림없다고 그러고, 전에도 회사 근처에서 험악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본적이 있다 그런 적도 있고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회사 근처에서 누굴 만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딱히 인상이 험한 사람은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어쩐지 그 여자가 퍼트리고 있다는 말에서는 악의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내 이미지가 굉장히 나쁘겠네?"
"아무래도 그렇죠. 근데 전부 그렇게 나쁘게만 보는 건 아니에요.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관심있는 사람도 있어요."
"나한테?"
"예. 사진 찍으시잖아요? 회사 SNS에도 올리고.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한 번 사진이라도 찍어달라고 해봤으면 하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근데?"
"아무래도 좀 접근하기 무섭다고 할까?"
누군가의 음해로 난 굉장히 위험한 종류의 인간으로 낙인이 찍혀버린 모양이다.
"근데 나도 사실은 당신이 찍은 사진 맘에 들어요. 언제 한 번 찍어줄래요? 나도 SNS에 올리게."
주은은 때때로 돈을 들여 스튜디오에서 프로필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아무래도 비용을 지불한만큼 퀄리티가 나오기 마련이다.
주은의 그저 만족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이미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고급스러운 이미지, 명품에 어울리는 모습의 사진을 찍고, 항상 명품 가방 따위를 강조해서 올린다고 한다.
나름 계산적이고 열심이었다.
"그렇게 하지."
나도 이쁜 여자와 작업하는 것은 좋아한다.
이 여자라면 꽤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신경쓰여요? 내가 나서면 당신 이미지를 바꿀 수 있을 거 같은데."
주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딱히 그럴 필요까지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녀의 속셈이 궁금했다.
"음... 역시 그거죠. 당신 투자로 돈을 벌었다고 했잖아요. 그거 소문 좀 퍼트리면 금세 이미지가 바뀔걸요."
"하하..."
굳이 그런짓까지 하면서 사람들에게 어필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하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 말이죠."
주은이 다시 음모를 숨긴 웃음을 내 비쳤다.
"어떤 대가?"
"세상에 대가라면 한 가지 밖에 더 있어요?"
주은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을 비비며 웃었다.
"나한테 가방... 음... 아니. 시계라도 좀 사주면 좋겠어요. 어때요? 시중가보다 싸게 줄게요."
"시계도 팔아?"
아마도 명품 시계를 말하는 듯 하다.
"루트가 있다구요. 중고이긴 하지만 새거랑 하나도 차이 안나는 걸로 뭐. 돈을 막 쓰고 싶다면야 새걸 사는 것도 좋겠지만, 시계야 어차피 하루만 차고 다녀도 중고 아녜요? 음... 보자. 당신한테는 역시 롤렉스가 어울리겠어요."
주은은 한참 동안 내게 시계에 대해 강의를 했다.
"그렇게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 시계 하나 쯤은 필수라고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보니 정말 시계를 차고 다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주은씨 돈에 관심이 많아."
전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다.
"당연하지 않아요?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있다구요. 돈 싫다는 사람은 전부 거짓말쟁이에요."
주은의 돈에 대한 철학은 무척이나 확고했다.
"난 돈이 필요해요. 하고 싶은 일도 많고, 쓸데도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녀는 그런 스스로에 대해 당당했다.
"열심히 돈을 모아서 몇 년안에 명품 편집샵을 차릴 예정이에요. 그거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생각보다 돈이 돼요. 어때요? 그러면 시계 하나 살 거죠?"
"그렇게 돈이 좋다면 아르바이트 하나 할래?"
"뭔데요? 당신이 말하는 거면 진짜 돈이 되는 거겠네요?"
"앞으로 나랑 섹스를 할 때 마다 돈을 줄게. 얼마나 줄까?"
내 말을 듣고 주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당신 사람 가지고 노는 거 좋아하죠? 지난번 그 게임도 그렇고."
싸우기라도 할 것 같은 얼굴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응. 좋아해."
물론 그보다는 어차피 그녀에게 개런티를 주어야 한다는 이유가 더 크다.
하지만 그녀 말처럼 갖고 논다는 말도 크게 틀리지는 않는다.
돈에 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렇게 하고 싶었다.
"좋아요. 그럼. 줘요. 뭐. 돈 준다는데 설마 거절할까봐?"
하지만 주은의 얼굴은 결코 즐거운 표정은 아니었다.
"어차피 나도 즐기는데, 돈도 받고 즐기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아요? 그래서 얼마나 줄 건데요?"
"얼마면 좋겠어?"
"진짜로 당신 날 무슨 창녀 취급 하려는 거로군요?"
주은의 얼굴은 점점 더 딱딱해졌다.
내가 하는 말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모양이다.
"알았어요. 그럼 창녀처럼 호가를 부를게요. 백만 원. 어때요?"
"하룻밤에?"
내 말에 주은은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설마 이렇게까지나 진지할 거라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네. 하룻밤에."
"아니. 한 번에 20만 원."
"하... 진짜... 나 지금 당신 얼굴에 물을 끼얹고 나가버리고 싶은 거 알아요?"
"너무 싸게 불러서?"
"일부러 그러는 거죠? 나 모욕하고 싶어서?"
"그런 거 같아?"
"모르겠어요."
주은은 잠시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았다.
"여하튼 나쁜 사람이란 것은 틀림없어요. 도연씨 말이 틀리지 않았어. 저질스러워."
"맞아. 그런 사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해요. 앞으로 당신이랑 섹스를 하는 대가로 20만 원씩 받고 싶어요."
처음부터 그녀에게 거절이란 옵션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의 섹스에서 충분하고도 넘을 쾌락을 얻고 있었고, 또 그 게임을 계속 진행해야 했다.
"나. 이제 들어갈래요."
주은은 그렇게 발랄하던 얼굴을 싹 지우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리고 그 시계 내일 받아볼 수 있을까?"
"어마나. 정말 사주시게요? 감사합니다. 고객님."
톤을 높여 대답하는 주은의 얼굴은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이다.
즐거웠다.
왠지 이쁜 여자에게 미움을 받으면 기운이 나는 것 같다.
그녀와 헤어지고, 난 탐정 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나와 정 팀장의 뒤를 쫓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봐달라고 했다.
이번에는 기간이 정해지지 않았다.
누구인지 모를 스토커가 나 또는 정 팀장을 항상 따라다닌다는 보장은 없다.
재수 없다면 적지 않은 비용이 나가게 생겼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돌려받을 생각이다.
그날 오후 지하 스튜디오에서 주은을 만났다.
"왜 불렀어요?"
주은은 여전히 마음이 상한 모양이었다.
"아까 나랑 사진 찍고 싶다고 했었지? 생각난 김에 오늘 해 보려고."
"그래요? 좋아요. 그럼."
주은은 나에 대한 감정은 밀어놓고,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옷은 회사 옷으로 입고 찍자."
비록 내가 관리하고 있다고 해도, 회사 스튜디오를 사용하는 것이니 너무 사적인 작업이어서는 곤란했다.
주은에게 우리 옷을 입히고, 명품 가방을 들게 하고 찍어 그녀의 SNS에 올리면 그다지 나쁜 소리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물론 문제가 생기면 책임은 내가 아니라 정 팀장이 지게 될 것이다.
사진을 찍기 전에 그녀를 대상으로 캐스팅 카드 < 여배우 >를 사용했다.
딱히 그녀와 성인물을 찍고 싶은 생각때문이라기보다, 그녀에게 설정 < 민감 >을 적용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포즈부터 찍어보지."
전문 모델들은 이쪽이 원하는 포즈를 바로 바로 바꿀 수 있지만, 아마추어의 경우에는 각자가 자신 있어하는 포즈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 포즈 위주로 촬영을 하는 편이 자연스러운 결과물을 얻기 좋다.
"이번엔 저걸로 갈아입을까?"
주은은 내가 준비해 놓은 옷들로 옷을 갈아입으며 사진을 찍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가방들 좀 가져올걸."
아쉽게도 그녀가 들고온 가방은 하나 뿐이라 다양한 가방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다음에 또 시간 내면 되지. 저걸로 갈아입을까? 이번엔 브래지어 벗고 입어봐."
"응? 왜요?"
"그 옷엔 그게 어울릴 거 같으니까."
"음... 그럴려나? 그냥 내 가슴이 보고 싶은 거 아니구요?"
사진을 찍으며 조금은 마음이 풀렸는지, 그런 소리도 하게 되었다.
"그것도 있고."
난 솔직하게 대답했다.
"내 가슴은 그렇게 크지 않은데 뭐가 보고 싶어요? 정 팀장님 가슴을 그렇게 실컷 만지면서?"
주은이 살짝 입술을 삐죽였다.
정 팀장의 가슴이 그녀에게 다소간의 트라우마를 남긴 모양이다.
하긴 그날 그녀의 남자 친구의 눈빛을 그리 쉽게 잊을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수빈은 시키는대로 브래지어를 벗고, 내게 가슴을 보여주었다.
"음...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보여주는 것도 돈을 받아야 하는데."
역시 점심 시간에 내가 했던 말이 여전히 앙금으로 남아있었다.
"그건 사진 찍어주는 걸로 비긴 걸로 하지."
"칫! 좋아요. 대신 사진 이쁘게 안 찍어주면 이거 본 것도 청구할 거예요."
주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사실 자존심에는 금이 갈지 몰라도 그녀로서는 손해 볼 것 없는 제안이었다.
물론 남녀 관계에서 자존심만큼 중요한 것도 찾기 어렵지만, 그녀의 경우는 달랐다.
그리고 이렇게 섹스와 금전의 거래를 규정해 놓으면 좋은 점도 있다.
적어도 난 너와 감정적으로는 얽히지 않겠다는 것을 명확하게 선언한 것이다.
그녀도 그렇게 받아들였고, 우리의 관계를 그런식으로 규정하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