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22. 용의자
주은의 집은 그리 넓지는 않지만, 꽤 깨끗한 곳이었다.
인테리어도 상당히 고급스럽다.
그러니까 여자들이 좋아할만한 곳이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주은은 들고 있던 가방을 천으로 싸서 장식장을 열고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 모니터 >로 이미 그녀의 집과 행동을 보아왔기에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가방을 벗어놓기 무섭게, 그녀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뭐해요?"
"응?"
"진짜! 내가 왜 당신을 불렀는데..."
잔뜩 서운한 얼굴로 그녀가 말했다.
"왜 불렀는데?"
일부러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물어보았다.
"하고 싶다구요! 알면서 그래! 그걸 꼭 내 입에서 나오게 만들어야 겠어요?"
주은의 얼굴이 붉어졌다.
"빨리 벗어요!"
그냥 두면 아무래도 울어버릴 것 같아 원하는 대로 들어주었다.
나보다 먼저 벌거벗은 주은이 내게 달려들어 허겁지겁 내 옷을 벗겼다.
주은은 내 몸을 밀어 침대 위로 쓰러트려 버리고 올라탔다.
"오늘도 죽어보자구요!"
뭐. 나로서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는 쉬지 않고 두 번을 연속으로 했다.
며칠 전의 첫 만남에서와는 달리 섹스도 꽤나 적극적이었다.
"이제 밥 먹어요. 뭐 먹고 싶어요?"
섹스를 끝내고 함께 씻고 나오자마자 주은이 스마트폰에서 배달 어플을 켜고 물었다.
"난 가리는 거 없으니까 주은씨 좋아하는 걸로 시켜."
"알았어요. 그럼 치킨?"
"집이 꽤 멋지네."
음식이 오기 전까지 시간이 있었다. 난 그녀의 방을 둘러보았다.
"열심히 꾸몄으니까요. 다 필요해서 한 거예요. 나름 투자지요."
"투자?"
"네. 나 부업하고 있거든요."
그런 소리는 처음 들었다. 얼마전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을 구경했을 때에도 그런 거 본 적 없는데?
"궁금해요?"
"응."
"그럼 보여줄게요."
주은은 잠겨 있는 캐비넷을 열쇠로 열었다.
안에는 꽤 많은 쇼핑백이 늘어서있다.
"이게 뭐야?"
"가방이요."
주은이 쇼핑백 하나를 꺼내어 안을 보여주었다.
쇼핑백 안에는 부직포 가방으로 쌓여진 여자 가방이 들어있다.
"명품이네?"
"맞아요. 전부 비싼 가방들이에요. 여기 있는 거 전부 합하면 꽤 될 거예요."
그녀의 말처럼 전부 가방이라면 얼추 일억은 안 되도, 수천만 원은 될 것이다.
"무슨 명품 가방이 그렇게 많아?"
"해외에서 들어올 때 신고 안하고 들어온 것도 있고, 중고품도 있고 그래요. 나 이런거 알음 알음으로 팔고 있어요. 나한테 사서 실증이 나거나 바꾸고 싶은 사람한텐 적당히 마진을 붙여서 바꿔주기도 하고요."
"말하자면 중고 명품을 사고 파는 건가?"
"맞아요."
주은이 미소를 지었다.
음... 그러면 회사에서 사람들한테 자기가 부잣집 출신이라고 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던 건가?
"장사가 잘 되는 모양이네?"
"손해는 안 보고 있어요. 뭐. 시작한지 그렇게 오래 되지는 않았지만요."
대략 1년이 조금 넘었단다.
그러니까 그녀가 회사를 들어오고 몇 달 쯤 지나 시작한 모양이다.
"한 달에 가방 하나 더 살 돈은 모아요. 나 한테는 이 가방이 전부 재산이에요."
"그정도라면 굳이 회사에 다닐 필요 없잖아?"
대충 회사 월급 보다는 훨씬 더 많이 벌어들이는 모양이다.
"뭐 언젠가는 그만 두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우리 회사에도 고객들이 되게 많아요. 우리 회사 여자들 중 1/3은 나한테 가방을 샀을 걸요?"
그녀는 굉장히 뿌듯하게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정도라면 꽤나 유능한 것은 맞아보인다.
"가끔은 SNS로 팔고 사기도 하고 그래요."
하지만 그래도 제일 큰 고객은 회사 사람들이라 했다.
그녀가 왜 그렇게 열심히 가방을 바꿔 들고 다니는지, 또 왜 그렇게 발이 넓었는지 이해가 갔다.
"우리 회사 그렇게 급여가 높은 편은 아니잖아요?"
중소 기업이란게 다들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명품 가방에 대한 수요는 있었다.
주은은 나름 치밀했다.
명품 가방을 들고 세련되게 입고 다니며 여자들의 욕망을 자극했다.
신품이나 다름 없는 중고 가방을 싸게 넘긴다고 유혹하며 회사 여자들에게 퍼트렸다.
회사에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니는 여자들이 하나씩 늘어났다.
그걸 본 다른 여자들도 명품 가방을 손에 넣고 싶어했다.
"사람들하고 친해지려고 진짜 열심히 살고 있다구요. 나. 사실은..."
주은은 정 팀장에게 접근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우선 대화를 나누고, 얼마 되지 않은 돈을 빌렸다가 바로 갚으면서 사소한 선물 같은 걸 해주면, 상대가 굉장히 좋아한단다.
"원래는 명품 브랜드에서 나온 열쇠 고리 같은 거 선물로 주곤 해요. 그런 것도 나름 명품이라서 꽤 비싸서 다들 좋아해요."
주은은 나름 그걸 싸게 손에 넣었다고 한다.
정 팀장의 경우는 그런 사소한 선물을 주기 어색했던 모양이다.
아직 그녀는 정 팀장이 자신에게 그런 악감정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모양이다.
"사실은 나 그렇게 부잣집 딸 아니거든요."
주은이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그녀는 그런 비밀을 털어놓을만큼 내게 친밀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옛날엔 제법 잘 살았어요. 그래서 그런걸 아주 잘 알아요."
주은은 자신의 부친이 사업에 실패한 사실도 말해주었다.
"그래서 도로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뭐. 사실 그렇게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도 아니니까..."
"여하튼 돈에 대해서는 집착이 강해요. 나. 그러니까 그 게임 죽어도 포기 안 할 거예요."
그녀가 자신의 사생활을 내게 이야기 한 이유가 정말 게임에 대한 집착을 알려주려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알았어. 나도 이 즐거운 게임을 손에서 놓을 생각은 전혀 없어. 그런데 같이 게임할 사람은 찾은 거야?"
"아직은요. 당신 말이 맞아요. 1억 원이라면 하루종일 발가벗고 돌아다닌다고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니까."
그녀는 다음 번에 게임에서 이긴다해도 그걸로 끝낼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내게 밝혔다.
"당신이 말했죠? 내가 원할 때까지 계속할 수 있다고? 그 말 후회하게 될 거예요."
그녀가 같이 게임에 참여할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명확했다.
한 번이 아니라 두번 세번 이어질 때마다, 게임을 끝내지 않고 두배로 묻고 갈 배짱있는 파트너가 필요한 것이다.
그때쯤 치킨이 왔다. 내가 옷을 걸치고 치킨을 받아왔고, 주은이 상을 차렸다.
"나 욕심이 아주 많은 여자에요. 해야 할 일도 많구요. 그러니까 당신도 각오해야 할 거예요. 이 게임 농담이 아니라고요."
치킨을 뜯으며 주은은 의욕에 차서 날 도발했다.
"그러게. 정말 각오해야 겠는데?"
"웃지 마요. 진짜로 울면서 그만하자고 할 때까지 그만 안 둘 거니까."
"그런데 다음 벌칙은 훨씬 더 심할텐데?"
"알아요. 하지만 뭐든지 한다고요. 손에 잡은 기회를 놓칠 생각 따위 없어요."
그녀는 마치 인생을 건 사람처럼 말했다.
"근데 정말로 그렇게 돈이 있는 건 맞는 거죠? 나중에 없다고 하면 곤란해요."
"그럼. 게임을 할 때마다 당신한테 보여주지. 현금으로."
"알았어요. 믿을게요."
이미 AV제작이 완료되어 캐스팅 카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있을 텐데도, 그녀는 게임에 대한 열의가 가득했다.
아마 그녀의 성격인 모양이다.
뭐. 그렇게 욕심 많고 투지에 넘치는 여자는 싫지 않다.
"근데 지난 번에 사무실에서 정 팀장님이랑 마주친 적 있지?"
지나가는 것처럼 그녀에게 물어봤다.
"하하. 맞아요. 사실은 그때 정 팀장님이랑 친해질 기회라고 생각했었어요. 원래 사람들이 비밀을 공유하면 좀 친해지기 쉽잖아요.
좀 계산적이긴 했죠. 나 좀 못됐죠?"
그녀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날 정 팀장에게 생글거리며 자기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한 것은 전혀 다른 의미였다는 말이다.
정말 믿을 수 있을까?
설정 카드 < 성역 > 때문에 그녀가 내게 해를 입힐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거짓말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거 소문이 퍼졌든데?"
"아! 그거..."
주은이 난감한 얼굴이 되었다.
"사실은 딱 한 사람한테만 말 했어요."
"누구?"
"경리팀 이슬씨..."
주은은 미안한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진짜로 거기서 정 팀장님 얼굴 본 이야기는 한 적 없어요. 그냥 지나가는데 야릇한 소리가 들렸다고만 한 건데..."
주은은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미안해요. 이슬씨한테 절대 말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도대체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말을 하면서, 상대가 비밀을 지켜줄 거라 믿는 것은 뭐란 말인가?
"그런데 그날 늦게 남아있던 사람이 영웅씨랑 문희씨였다면서요? 어떻게 된 거예요?설마 그날 사무실에 있던 게 셋이었어요?"
주은은 내가 그녀에게 갖고 있는 의혹을 조금도 깊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리 보아도 그녀에게서 나나 정 팀장에 대한 악의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이 여자는 아닌 모양이다.
어...
음...
오해였나...
갑자기 미안해진다.
괜한 오해 때문에 그냥 열심히 살아가는 여자를 남자 친구랑 헤어지게 만들어 버린 건가?
이 여자의 잘못이라면 그저 정 팀장을 새로운 고객으로 삼겠다는 욕심과 이슬이란 여자에게 가볍게 입을 놀린 정도인 것 같다.
이걸 어쩔까?
그녀와의 그날 일을 이제와서 되돌릴 수도 없고...
모르겠다.
뭐. 그게 딱히 나 혼자만의 잘못인가?
정말로 그녀들에게는 충분한 기회를 주었다.
물론 설정 카드나 < 즐거워지는 사탕 >의 영향도 있지만.
생각할수록 내 잘못이 맞다.
"진짜 문희씨랑도 그런 관계예요?"
내 머리를 어지럽히는 죄책감을 짐작도 못한 주은은 열심히 문희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왔다.
"아니. 그날 거기 있던 것은 정 팀장님과 나 뿐이었어."
"휴우... 다행이다."
"뭐가 다행인데?"
"경쟁자가 줄어드니까요."
"경쟁자?"
"알면서..."
주은이 얼굴을 붉혔다.
그런 그녀가 너무 이뻐서 난 그녀를 들고 다시 침대로 갔다.
"근데 나 당신이랑 사귀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알아."
"칫!"
자기가 말해놓고 자기가 삐져버린다.
하지만 키스를 하자 그녀는 바로 마음을 열어주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 여자는 정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여자가 아니라면 정 팀장을 노리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지?
경리팀 이슬이라...
아니. 그건 모른다.
이미 주은의 입을 나온 말이 이슬을 통해 또다시 누군가에게 넘어갔을 수도 있다.
다시 하나 하나 짚어봐야 할 거 같다.
"주은씨랑은 얘기해 봤어?"
다음날 정 팀장이 물었다.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요."
난 주은에게 들은 이야기를 적당히 말해주었다.
그냥 친해지고 싶은 욕망이 전부였다는 말에 정 팀장은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주은이 그일의 범인이라 확신할 수도 없었다.
"팀장님한테 서운해 할만한 사람은 없어요?"
역시 문제는 정 팀장이다.
"딱히... 아니... 잘 모르겠어."
그녀를 미워할 사람이라면 같은 팀 사람들이겠지.
업무에는 철저하지만, 부하들에게 사랑받는 상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누군가를 짚을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어떤 방법을 간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날 점심은 주은을 밖에서 만나 같이 식사를 했다.
"이렇게 밖에서 둘이 만나니까 데이트하는 거 같네요. 우리 종종 이렇게 해요."
주은은 식사 초대를 기꺼워했다.
"주은씨 이거 한 번 볼래?"
식사가 끝나고 스마트 폰에서 정 팀장에게 받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게 뭐에요? 세상에! 이걸 누가 찍은 거죠?"
주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진짜로 당황한 기색으로만 보인다.
그게 거짓이라면 주은은 엄청난 거짓말쟁이일 것이다.
"누가 찍은 건지 몰라. 이걸 정 팀장한테 보냈더라고."
"대체 왜요? 변태 아냐?"
"그러게..."
정 팀장에게 받은 사진은 모두 네 장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보여준 마지막 사진은 나와 정 팀장이 모텔을 나서는 사진이었다.
"진짜! 무슨 스토커라도 있는 거 아녜요?"
주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자들은 그냥 기분이 나쁜 정도이겠지만, 여자들은 스토커를 정말로 끔찍하리만큼 두려워한다.
"정 팀장님 따라다니는 사람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런 거 치고는 주은씨랑 나랑 나오는 사진을 찍으려고 아침까지 기다릴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네."
"하기는... 그러면 당신한테 스토커가 있는 건가 보죠?"
응?
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