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21. 풍전등화의 회사 생활
다음 판도 우리가 이겼다.
"포기 하기 전에 벗는 거 잊지 말아요."
정 팀장이 놀리듯 한 마디 했다.
"포기 안 해요."
주은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런데 더는 벗을 게 없는데 어떻게 하죠?"
정 팀장은 신이 났다.
여기서 게임을 끝내면 저 얄미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가 없다.
"그러네요."
나도 한 마디 더했다.
"내가 포기하기 전까지는 끝까지 한다고 했잖아요?"
주은이 항의했다.
지금 그녀에게 벌거벗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게임을 끝내는 것이 제일 안 좋다.
"그러면 벌칙을 새로 정해야겠다."
정 팀장이 한 마디 했다.
"그래요."
주은이 동의했다.
그녀의 굳은 얼굴을 보니 정말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이건 어때요? 키스."
정 팀장은 내가 말한 지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순서에 맞게 다음 벌칙을 꺼내놓았다.
"키스요? 누구랑 누가요?"
주은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음... 그거야 그쪽이 지면 생각해보죠."
정 팀장이 날 바라보며 생글 웃었다.
잠시 주은은 어떻게 대처할지 고민했다.
"어떻게 할까?"
그리고 당연히 남자 친구에게 물어보려 고개를 돌렸다.
"야!"
하필이면 그 남자 친구가 헤벌죽해서 정 팀장의 가슴을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만 주은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응? 왜?"
지금까지처럼 웃으며 남자가 여자 친구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화가 난 것을 참지 못하고 그녀가 물었다.
"해. 해야지."
남자 친구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역시 그에게도 설정 카드 < 게임의 규칙 >이 제대로 적용되는 것이 맞는 모양이다.
< 즐거워지는 사탕 > 때문에 제대로 못할까 걱정을 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지금 그 남자는 마냥 즐거운 상태였다.
남자를 즐겁게 만들 일은 충분히 많다.
맛있는 식사를 했고, 좋은 술을 마셨고, 매력적인 가슴이 눈 앞에서 덜렁거리고 있다.
또 게임에서 이긴다면 거액을 손에 쥘 수 있다.
물론 화가 날 요인도 충분하다.
여자 친구가 팬티 바람으로 다른 남자 앞에 서있다.
하지만 < 즐거워지는 사탕 >을 먹고 나면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진다.
온통 즐거운 일 뿐이다.
그러니 여자 친구가 이제 벌거벗을 차례라든지, 또 다시 지면 둘 중 하나가 누군가와 키스를 해야 한다는 것 따위는 그리 중요치 않게 느껴질 것이다.
"뭐라고?"
주은은 남자 친구의 발랄한 대답에 어이없어하며 다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이겨야지. 얼마나 큰 돈이 걸렸는데? 안 그래?"
이건 어디까지나 설정 카드 < 게임의 규칙 >의 힘이다.
"하아..."
주은은 다시 입을 닫았다.
정말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쩌면 남자 친구의 반응이 그녀를 전부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녀가 제정신이라면 옷을 입고 화를 내며 나가버렸을 것이다.
"해요. 그럼. 이번에 지면 키스란 말이죠?"
주은은 결심했다.
"애매한 건 싫으니까... 이렇게 해요. 10분 동안 상대가 원하는 키스를 하는 걸로. 대신 우리도 전부 벗게 되면 시키는 대로 할게요."
정 팀장은 주은이 아니라 그녀의 남자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해요! 그럼!"
마냥 즐겁기만 한 남자 친구가 냉큼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주은은 이빨을 뿌드득 갈고 있었다.
난 그녀가 정말로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조금 헷갈렸다.
"그럼 주은씨."
아마도 가장 신이 난 사람은 정 팀장인 것 같다.
자신을 협박해온 주은에게 앙갚음을 할 기회였다.
물론 주은에게 여전히 우리가 나란히 모텔 나서는 사진이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말라고 한 날 믿는 것인지, 아니면 이번 기회에 자신도 주은의 어떤 약점을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인지, 정 팀장은 주은을 몰아붙이는 것에 조금도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주은은 앉은 채로 팬티를 벗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남자 친구를 노려본다.
아무래도 그녀에게 가장 큰 미움을 받고 있는 사람은 그쪽으로 확정된 모양이다.
"뭘 봐?"
주은이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 친구에게 쏘아붙였다.
"이쁘다고."
"볼 거 없으니까, 저쪽에 보기 좋은 거나 보셔!"
속없는 남자 친구의 한 마디가 오히려 불을 지펴버렸다.
그러자 남자는 정말로 고개를 돌려 정 팀장의 가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이... 그렇게 보고 있으면 부끄러운데..."
정 팀장의 얼굴이 붉어진 것을 보니, 부끄럽다는 말은 진실인 것 같다.
"하하... 죄송합니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지금 그 남자의 마음 상태는 한 없이 긍정적일 것이다.
그래서 누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다.
"저도 남자가 바라보는 것은 좀 난처하네요."
정말로 얼굴일 빨게질 뻔 했다.
오늘 주은에게 아주 심한 짓을 할 생각이 없었다면, 그 남자와 함께 술을 마실 일도 없을 텐데...
참자. 잠깐이면 된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이번엔 주은의 반대편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아..."
그 모습을 본 주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도 자신의 남자 친구가 어딘지 비정상이라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저기. 아까 그 술 깨는 약. 혹시 더 있어요?"
"예. 주은씨도 취기가 있나 보죠?"
"아뇨. 이 사람이요..."
"잠시만요."
난 가방에서 물약이 들은 병을 하나 꺼내 뚜껑을 따서 남자에게 주었다.
"응? 잘 먹겠습니다."
남자는 별다른 거부감도 없이 그걸 한 모금에 넘겨버렸다.
"어때? 좀 괜찮아지는 거 같아?"
"응? 좋은데? 아주 좋아. 굉장히 맛있네."
맛은 있겠지. 남자에게 준 것은 수퍼에서 파는 평범한 강장 음료이다.
"주은씨도 하나 마실래요?"
그녀도 이젠 꽤 마신 편이다.
"그럴까요?"
게임에 이기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려야겠다 생각했는지, 흔쾌히 받아들인 주은은 내가 주는 병을 받아 뚜껑을 열고 한 입에 마셔버렸다.
"잠깐 쉬도록 해요."
"그럴게요."
잠시 두 남녀에게 시간을 주고, 난 정 팀장의 가슴을 어루만졌다.
"헤에..."
그걸 바라보던 남자가 헤벌죽 웃어버렸다.
주은이 그걸 보고 화가 치솟는지 남자 친구를 노려보았다.
"어때요? 이제 정신이 드는 거 같아요?"
"예.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이렇게 개운해지죠?"
주은은 머리를 마구 흔들어보았다.
"그러니까말이에요."
정 팀장도 그 마법같은 숙취제의 효능에는 놀라고 있었다.
지금 주은이나 정 팀장 모두 아주 푹 자고 일어난 것 처럼 개운한 느낌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계속 해볼가요?"
정 팀장이 동전을 손에 들었다.
앞이 나왔다.
내가 던져서 뒤가 나왔다.
주은이 진지하게 내게 동전을 받아가 던졌다.
뒤가 나온다.
"잘 해. 이번엔 꼭 이겨야 돼."
남자 친구에게 동전을 넘기며 다시 당부를 했다.
"이겨야지. 절대 지면 안 돼!"
남자는 왠 일로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주은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이제 술이 깬 모양이다.
남자가 동전을 던졌다.
앞...
"이런...XX"
주은의 입에서 튀어나온 적나라한 욕설에 남자 친구가 깜짝 날란다.
"하아..."
주은은 자신이 욕설을 마구 내뱉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동전을 가져간 정 팀장을 바라보았다.
정 팀장이 동전을 던졌다.
그녀와 나는 모두 뒤가 나왔다.
주은의 얼굴이 아주 죽을 상이 되었다.
동전은 이번에도 그녀를 배신했다.
"진짜..."
주은이 남자 친구를 노려보았다.
"괜찮아. 다음엔 이길 수 있어."
남자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주은은 왠지 울고 싶은 표정이 되었다.
"그럼 누구랑 누구랑 키스를 하면 되죠?"
갑자기 남자가 손을 들고 물었다. 왠지 신이 났다.
이쯤 되어서는 주은에게 왠지 미안해졌다.
물론 내가 계획한 일이지만, 남자의 반응은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즐기고 있었다.
여자 친구는 죽을 맛인데...
이제 주은은 정말 살인이라도 저지를 것 같은 눈으로 자신의 애인을 바라보았다.
"주은씨 이리로 와요."
정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주은이 어쩐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러니까 나와 그녀의 키스나, 정 팀장과 남자 친구의 키스 보다는 그쪽이 낫다 생각한 모양이다.
"예..."
하지만 막상 일어서는 것은 주저하고 있었다.
누가 여자와 키스할 것을 상상했을까?
"가봐. 주은아."
남자 친구가 또 한 몫을 한다.
주은은 남자 친구를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부러 저쪽으로 돌아 정 팀장에게 다가갔다.
"여기 앉아봐요."
정 팀장이 손으로 가리킨 곳은 나와 정 팀장 사이였다.
주은은 살짝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정 팀장이 시키는대로 그녀와 나 사이에 앉았다.
"창욱씨 시간 재요. 딱 십 분이야."
정 팀장이 말하자, 남자는 정말로 시계를 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주은은 못 볼것을 보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정 팀장이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주은은 썩은 표정으로 정 팀장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정 팀장이 주은의 입에 혀를 넣고 키스를 이어가는 동안 주은은 눈을 꼭 감고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목석처럼 가만히 있었다.
물론 그녀가 캐스팅 카드 < 여배우 > 때문에 모든 자극을 성적으로 받아들이고, 성적 자극에 민감해지기야 하겠지만, 아직 다른 여자의 키스를 받아들일만큼은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두 여자가 키스를 이어가는 동안 테이블 건너편의 남자는 뭐가 그리 좋은지 마냥 즐거워하고 있을 뿐이다.
"어때요? 여자랑 키스를 하니까?"
입술을 떼고 정 팀장이 그녀에게 물었다.
"몰라요."
주은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사실은 나도 그래. 여자랑 키스해본 적이 언제 있어야지. 벌칙이니까 그냥 해 본거야. 풋!"
정 팀장이 너털 웃음을 터트렸다.
"하..."
그걸 본 주은이 어이 없는지 자기도 살짝 따라 웃고 말았다.
"어때요? 여차 친구가 다른 여자랑 키스하는 걸 보니까?"
"좋아요."
뭔들 안 좋을까?
하지만 주은은 영 엉뚱한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잠시 풀렸던 얼굴을 다시 굳히고 말았다.
"그런데 시간은 얼마나 남았어요?"
"8분 27초요."
남자 친구가 발랄하게 대답을 했고, 주은은 다시 썩은 표정이 되었다.
"근데 나 주은씨랑 더는 못 하겠다. 여자끼리 하는 키스가 뭔 재미람?"
정 팀장이 말을 꺼내자 주은이 미약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둘이 해봐요."
하지만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정 팀장이 그녀를 내쪽으로 살짝 밀자, 주은은 사색이 되어버렸다.
"키가 꽤 차이나서 안 되겠다. 영웅씨 안아봐요."
"그럴까요?"
난 정 팀장이 시키는대로 주은의 몸을 안아 내 허벅지 위에 앉혔다.
"뭐... 뭐하는 거예요?"
주은이 날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하지 말까?"
정 팀장이 물었다.
"아니... 그건..."
주은은 게임을 끝낼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나와의 키스를 염두에 두고 허락을 한 것이다.
"그럼 빨리 해요. 안 그러면 포기하는 걸로 안다."
정 팀장은 억지로 밀어붙일 생각이 없다는 듯 부드럽게 권유했다.
주은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본다.
다시 심각한 얼굴이다.
"창욱씨 고민하는 시간은 빼는 거야."
"그럼요."
발랄한 남자 친구의 대답이 주은에게는 결심을 앞당기는 방아쇠가 되었다.
"해요."
주은이 날 바라본다.
난 웃으며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주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정말 죽기보다 싫은 모양이다.
뭐. 잘 생긴 남자 친구랑 비교를 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하지.
그다지 기분이 나쁠 거야 없다. 여자들에게 미움 받는 것은 익숙하다.
그리고 그녀들이 날 미워할수록 기쁨은 커지기 마련이다.
"주은씨 뭐해요?"
정 팀장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난 그녀에게 아무런 강요도 하지 않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으읏!"
잔뜩 기분이 나쁜 얼굴로 그녀가 내게 얼굴을 내밀었다.
간신히 두 사람의 입술이 닿는다.
"흐응? 아직 생각이 없는 모양이네?"
정 팀장은 점점 신이 난다.
"으으..."
주은이 입술을 열고 혀를 내밀었다.
나도 입술을 열어 기꺼이 받아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 팀장이 주은의 몸을 내게로 밀어 밀착시켰다.
이런 것까지 내가 세세하게 지시하지는 않았다.
그저 정 팀장이 신이 나서 사태를 주도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