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21. 풍전등화의 회사 생활
주은은 번화가에서 한 블럭 들어간 곳에 위치한 꽤 힙한 분위기의 술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럼 맘대로 시켜도 되죠?"
우리는 홀과 분리된 아늑한 룸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주은이 다시 메뉴판을 들고 고르기 시작했다.
"그래요. 편하게 골라요."
슬쩍 메뉴를 펼쳐보니 생각처럼 비싸지는 않았다.
뭔가 잔뜩 시켜도 얼마나 나올까 싶다.
"자기는 뭐 먹고 싶어?"
주은이 남자 친구에게 골라보라며 메뉴판을 펼쳤다.
"난 배불러.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네."
남자 친구는 조금 미안한 얼굴을 하며 거절을 표시했다.
"이거 어때? 수란과 이베리코 하몽을 곁들인 치즈 플레이트."
주은은 무척이나 꽤 복잡한 이름의 음식을 시켰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딱히 먹고 싶은 메뉴가 없는 지 주은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결국 주은 마음대로 두어 가지를 더 시키고 술을 주문했다.
"그런데 창욱씨는 하시는 일이 뭐에요?"
정 팀장이 주은의 남자 친구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 공부하고 있어요."
대답을 한 것은 주은이었다.
"그래요? 어쩐지 하게 공부할 사람처럼 생겼더라. 무슨 공부?"
"공무원 시험 준비요."
계속해서 주은이 대답했다.
딱히 정 팀장에 대해 경계심을 보인다기 보다는 오히려 남자 친구의 일에 관심을 가져주니 반기는 것 같았다.
"세상에. 요즘 공무원 경쟁률이 굉장히 높다던데, 많이 힘들겠어요?"
"그래서 우리도 한 달에 많아야 두세 번 보는 게 전부에요."
"기숙 학원에 다니고 있어서요."
남자가 부연 설명을 했다.
"그렇게까지 열심이면 좋은 결실 맺을 거예요."
"주은이 한테 미안해서라도 그래야죠."
"그래. 나 생각해서라도 올핸 꼭 붙어. 응?"
대충 주은이라는 여자는 남자 친구에게 무척 애정을 쏟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남자 쪽도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 친구를 바라보는 눈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염치도 알고, 쾌활하고, 악의도 없어보인다.
더군다나 멀끔하게 생겼으니, 딱히 직업이 없다해도 주은이란 여자가 사귀고 있는 것이 이상하다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 남자도 바로 건너편의 거대한 가슴에 슬쩍 슬쩍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주은이 자신을 보지 않을 때면 그의 눈은 자신도 모르게 정 팀장의 가슴에 자꾸만 눈이 가고 있었다.
그 남자의 잘못은 아니다.
어느 남자가 그렇지 않을까?
정 팀장의 가슴은 그만큼 압도적이다.
더군다나 그녀도 주은의 눈을 피해 슬쩍 슬쩍 앞으로 상체를 숙이며 안쪽을 잠깐씩 보여주곤 한다.
브레지어로는 도저히 가려지지 않는 풍만하고 하얀 가슴에 남자는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했다.
"그런데 요즘도 코인 투자는 할만 해요?"
주은은 내게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다.
술과 가벼운 안주가 나온 이후로 주은은 계속 내게 이것저것 묻고 있었다.
"나야 모르죠. 본격적으로 투자를 한 것도 아니고, 사놓은게 나도 모르는 사이게 그렇게 올라버린 것 뿐이에요. 그리고나서는 오르내리는 게 무서워서 팔아버렸더니 또 쭉 떨어지더라고요. 잠깐 동안은 코인에 관심을 가져봤죠. 근데 하루에도 수십 퍼센트를 오르고 떨어지는 걸 보니까 보통 위험한 게 아니더라고요. 아! 이건 평범한 사람이 할 게 못되는 구나. 그냥 도박판이에요. 넣어 두고 오르면 운이 좋은 거고, 떨어지면 전부 날리는 거죠."
대충 남들 아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걸로 큰 돈을 번 사람의 말이라 그런지, 주은은 아주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럼 지금은 투자는 더는 안 하는 거예요?"
"뭐 남들 하듯이 주식이라든지, ETF라든지 조금씩 손은 대고 있어요."
"그런 거는 잘 되요?"
"뭐 그럭저럭이요. 투기하듯이 공격적으로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투자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
"네. 우리 아빠도 한창때는 사업을 운영하시면서 꽤 적극적인 투자자이셨나 봐요. 요즘은 기력이 딸리셔서 그러신지 투자는 하지 않으신다는데, 어려서부터 그런 걸 봐서 그런지 아무래도 관심이 가네요."
"그런데 공무원 시험 공부는 굉장히 힘들죠?"
나와 주은이 투자에 대한 소재로 대화를 나누는 동안 정 팀장은 그녀의 남자 친구와 대화를 이어갔다.
남자 친구도 내가 코인이나 주식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관심을 보였지만, 그보다는 그 거대한 가슴에 대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정 팀장과 대화를 이어갔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대화는 둘로 나뉘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명문 디자인 스쿨 다니셨다면서요?"
"예. 근데 졸업은 못 했어요. 캘리포니아 대학 다니다가 편입으로 들어갔는데, 나랑 잘 안 맞더라고요. 내가 너무 자신을 과대 평가 했던 거죠. 그런데 그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회사에서 사람들이 이야기 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그 이야기 듣고 주은씨가 굉장한 분이란 걸 알게 됐죠."
"하하. 그거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데... 사실은 졸업장을 받은 것도 아니라 경력도 인정 안 되잖아요. 우리 회사에 입사 할 때에도 그건 안 썼어요."
주은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뭐. 우리 회사 입사하는데 그정도 스펙까지 필요하겠어요. 그래도 대단한 분인 건 맞네요."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여자였다.
그냥 주변 사람들에게 슬쩍 거론해서 회사 내의 평판을 높이는 데에만 사용한 모양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그걸로 발목 잡힐 일은 없는 모양이다.
결국 탐정 사무소에서 알아온 정보로는 협박할 거리는 되지 않는다.
상관은 없다. 어차피 이 여자에게 비밀을 폭로한다는 협박을 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한동안 서로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가며 술자리가 이어졌다.
잠시 뒤에 우리가 시킨 요리가 전부 나왔다.
직원에게 팁을 넉넉히 주며 부를 때까지 오지 말라 요청했다.
"그런데 우리 너무 따로 논다. 이제 같이 얘기 좀 해요."
정 팀장이 한 마디 했다.
"맞다. 자기야. 계속 정 팀장님 하고만 마시고 있어."
주은이 남자 친구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아무리 그가 소심하게 눈길을 준다 해도 여자친구의 눈치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나마 주은이 한창 나와 투자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그리 눈총을 주지는 않고 있었지만, 남자 친구가 매력적인 가슴을 가진 여자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보며 마땅할 리는 없었다.
"난 자기가 영웅씨 투자에 관심이 많은 거 같아서..."
남자 친구가 말을 흐렸다.
어쩐지 자신감이 많이 흐려진듯 했다.
대충 어떤 상태인지 짐작이 갔다.
그쪽이 훨씬 잘 생겼다해도, 비슷한 연배에 투자에 크게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은 위축된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네 사람의 공통의 화제를 찾아보았다.
"근데 두 사람은 사귄지 얼마나 됐어요?"
정 팀장이 주은에게 물어볼 때, 난 정 팀장의 가까이 앉아, 슬쩍 그녀의 다리에 손을 얹었다.
그걸 보는 주은이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 3년 됐어요. 근데 정 팀장님이랑 영웅씨랑 그냥 일 이야기 하러 나온 건 아니죠?"
"뭐. 사실은 좀 그렇지. 어차피 이제 주은씨랑은 친구처럼 지내기로 했으니까 숨기지 않을게."
정 팀장은 자신의 다리를 만지고 있는 내 손 위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나. 이렇게 큰 비밀도 자기한텐 안 감추니까, 자기도 꼭 비밀 지켜줘야해."
그녀가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제가 친한 사람들한텐 얼마나 잘 하는데요. 정 팀장이 그렇게 믿어주시는데 당연하죠."
주은은 마치 거봐라 하는 얼굴로 기분 좋게 웃었다.
"사실은 조금 의아했었거든요. 정 팀장님 같은 분이 왜 영웅씨 같은 남자랑..."
"영웅씨가 좀 대단한 면이 있지."
정 팀장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무례한 말을 받아넘겼다.
"어디서 말은 못 하겠는데..."
그리고 날 쌀짝 바라보며 지긋이 웃었다.
"여하튼 우리 앞으로 잘 지내 봐요."
"그럼요. 저도 오늘 영웅씨랑 처음 이야기 나눠봤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었나봐요."
"그런데 우리 술은 거의 안 먹었네?"
정신 없이 대화들을 하느라 술이 비질 않았다.
"그럼 우리 가볍게 게임이라도 하면서 마실까?"
약속했던 대로 정 팀장이 제안을 해왔다.
"게임이요?"
주은이 되물었다.
"그러죠. 뭐. 근데 무슨 게임이요?"
남자가 더 좋아했다.
"음... 난 이제 나이가 있으니까 복잡한 건 싫고. 주은씨 동전 있어?"
"동전이요? 음... 여기 하나 있네."
주은이 지갑에서 오백원 동전 하나를 꺼내 정 팀장에게 넘겼다.
"요즘은 다들 동전을 안 가지고 다니니까. 나도 동전이 하나도 없어."
정 팀장이 그렇게 말하며 주은이 건내준 동전을 받았다.
"팀전 어때? 커플끼리 지는 사람이 마시기야."
"그거 좋죠."
주은도 남자도 전혀 거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백원 짜리 동전을 던져서 음... "
정 팀장은 잠시 고민하는 척 해본다.
"그래. 이러자. 한 명씩 돌아가며 동전을 던지는 거야. 그래서 그 때 커플이 똑같은 팀이 이기는 거야. 만약 양쪽 다 같거나 다르면 다시 던지고. 어때? 커플끼리 얼마나 잘 맞는지 보는 거야."
술 게임 치고는 너무나 단순한 규칙이다.
정 팀장의 말에 주은은 잠시 고민을 해 본다.
뭔가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혹시 함정은 없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뭐. 나쁘지 않네요. 주은이랑 나랑 얼마나 잘 맞는지 보여줄 수 있겠네요."
남자는 별 생각 없이 정 팀장의 제안에 찬성했다.
주은도 뭐 대단할 거 없다는 투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로서도 괜히 반대를 해서 술자리를 파토낼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렇게 게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정 팀장이 동전을 던졌고, 앞 면이 나왔다.
"아이! 자기야! 거기서 뒷 면이면 어떻게 해?"
내가 던져서 뒷 면이 나오자 정 팀장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게요. 처음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하아... 주은씨 받으세요."
난 바꿔치기 한 기프트 카드 < 놀이 도구 세트 >에 포함된 동전을 주은에게 건내주었다.
아무리 손재주가 없어도, 오백원짜리 동전 하나 바꾸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다.
"그럼 내 차례죠?"
주은이 동전을 받아가 던졌다.
나온 것은 앞면.
"자기 잘 해! 뒷면 나오면 알지?"
"그럼. 나만 믿어."
남자가 동전을 던졌다. 나온 것은 앞면이다.
"아아... 역시 오래된 연인의 인연을 이기기는 힘든가봐."
정 팀장이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아뇨.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의 애정의 힘을 보여주자고요."
나도 실업는 소리를 하며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 다시 대여섯 차례 순번이 돌았다.
우리 팀은 딱 한 번을 빼고는 전부 져버렸다.
"이거... 오늘 말리네요."
"그러게. 괜히 하자고 해서 우리만 마시고 있잖아?"
정 팀장이 얼굴이 빨개져서 투정을 부렸다.
나도 취기가 오른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몸을 푸는 흉내를 낸다.
"애이. 뭐예요. 두 분만 계속 마시고, 우리도 좀 마시게 해 줘 봐요."
기가 산 주은이 우리 팀을 비웃으며 말했다.
"음...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냥 술만 마시니까 좀 투지가 안 생기는 모양이다. 잠깐만요."
난 가방을 열고 만원 권 뭉치를 넉넉히 꺼냈다.
"이렇게 해요? 그쪽에서 이기면 내가 여기 돈을 쌓을게요. 처음엔 100만 원, 그 다음엔 200만 원, 그리고 다음엔 400만 원... 그렇게 계속 올라갈 거예요. 그게 상금이에요."
"네?"
"뭐라고요?"
주은과 남자 모두 한 마디씩 내뱉는다.
갑자기 돈을, 그것도 너무나 커다란 돈을 꺼내놓으니 당황한 모양이다.
"응? 자기야? 너무 취한 거 아냐?"
대충 해야할 일을 듣기만 했고, 이런 이야기는 듣지 못한 정 팀장도 깜짝 놀랐다.
"취하기는 했죠. 그래도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아서요. 가끔은 저도 돈을 확 쓰고 싶을 때가 있다고요."
마치 돈을 쓰지 못해 안달이 난 졸부처럼 난 돈 다발을 들고 흔들었다.
정 팀장과 남자는 무척이나 황당한 얼굴이고, 주은은 내가 들고 있는 돈다발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그녀는 돈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어느 누구라고 돈에 관심이 없을까?
나라도 술자리에서 게임을 하다가 큰 돈을 꺼내 쓴다고 하면 거절할 자신은 없다.
"그러니까 한 번 이길 때마다 두 배씩 올라간다가요?"
남자 친구가 살짝 겁을 먹은 눈빛인데 주은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예. 그러니까 주은씨 팀이 이길 때마다 딱 두 배씩으로 만들게요.
그리고 주은씨가 원하는 때에 게임을 그만두면 되요.
단 이겼을 때 그만두면 그때까지 걸린 돈을 전부 가져가고, 졌을 때 포기하면 뭐... 어쩔 수 없이 못 드리는 거죠."
그리고 그녀에게 상금을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누가 봐도 상대에게 유리한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