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21. 풍전등화의 회사 생활
의외인 것이 하나 있다.
주은은 엄마에게 매달 100만 원이나 되는 금액을 송금하고 있었다.
적어도 부모에겐 좋은 딸인 모양이다.
탐정 사무실에 부탁한 결과로는 한두 가지의 그녀의 약점을 찾아냈다.
당장 그녀가 회사에 제출한 이력서가 거짓 투성이라는 것만 밝혀도, 그녀는 곤란해진다.
혹은 그녀의 거짓된 부자 노릇을 폭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난 그녀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게 만들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그날 저녁 그녀가 남자 친구와 약속을 잡는 것까지 확인을 했다.
뭐. 달리 쓸만한 것이 나오지 않으니, 이걸 기회로 삼아야겠다.
퇴근 시간이 다가올 무렵 정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내 오후 시간을 비워두라 지시했다.
그리고 주은이 퇴근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을 무렵 나도 스튜디오로 내려가서 아직 사용하지 않고 있던 카드 하나를 찢었다.
기프트 카드 < 수트 & 슈즈 >
카드가 사라지고 내 앞에는 멋진 정장 세트가 나타났다.
입고 있던 옷을 벗고, 드레스 셔츠를 입고 바지와 자켓까지 입었다.
내 몸에 딱 맞춰놓은 것처럼 아주 잘 피트된다.
뭐. 기프트 카드로 나온 것이니 당연하겠지.
옷을 갈아 입고 주차장으로 가 정 팀장의 차에 올랐다.
"응? 옷 갈아입었어?"
"예. 처음 입어보는 건데, 좀 어색하네요."
"아냐. 아주 잘 어울린다. 그렇게 입으니까 귀티가 나네."
"무슨 귀티에요. 조폭이나 같아보이지 않으면 다행이겡요."
"진짜로 귀티가 나. 음. 부자집 도련님은 아니고... 자기 말처럼 무슨 보스 쯤은 되어 보여."
정 팀장은 그렇게 한 마디 던져놓고 웃음을 터트린다.
"미안... 놀릴려는 건 아니었어."
"괜찮아요.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사실 아무리 비싼 옷을 입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정 팀장의 말처럼 아무리 잘 차려입어도 이 커다란 덩치와 조금 난폭해보이는 얼굴 때문에 잘 봐줘야 성공한 운동 선수 쯤으로 보이겠지.
그걸 알기에 난 다른 여자를 만날 때에도 굳이 이걸 입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이런 고급스러운 정장보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기성복이 차라리 낫다.
"그럼 이제 출발할까?"
"예. 그렇게 하죠."
이미 모니터로 그녀가 회사를 나서 어딘가로 부지런히 가고 있다는 사실을 훔쳐보고 있다.
지금 출발하면 적당히 따라잡을 것 같았다.
"그렇게만 하면 돼?"
정 팀장은 내가 시키는 일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하지만 이어지는 내 요구에는 꽤나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하라는 대로 할게. 그렇지만..."
어지간히 불편한 얼굴이다.
"꽤 재미있을 거예요. 정 팀장님 굉장히 매력있는 여자니까요."
"무슨... 내가 그렇게..."
하지만 매력 있다는 칭찬에 싫어할 여자는 없다.
정 팀장은 살며시 미소를 짓고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를 풀었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다.
단추 하나 푼 것 만으로 그렇지 않아도 치명적인 그녀 만의 매력이 두 배 쯤 더 무서워졌다.
주은은 회사에서 지하철로 한 정거장 떨어진 곳까지 걸어갔다.
그녀의 평소 씀씀이를 생각해보면 1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난 그녀가 생각보다 돈을 그리 허술하게 쓰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여기가 맞아?"
번화가의 한 스테이크 하우스 앞에서, 그녀는 내가 주은이 이곳에 있을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었다.
"아까 전화하는 거 들었거든요."
"그랬구나."
그녀가 어떻게 납득을 하건 아무런 상관 없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저쪽 창가에 앉아있는 주은을 발견했다.
그녀는 꽤 잘생긴 사내와 함께였다.
나와 정 팀장은 두 사람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갔다.
"어머나! 우연이네?"
정 팀장이 호들갑스럽게 주은에게 인사를 했다.
"어? 정 팀장님! 어쩐 일이세요?"
순간 주은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거의 눈치 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사라지고, 그녀는 활짝 웃는 얼굴로 정 팀장을 반겼다.
"우리 일 이야기를 하러 왔다가, 여기 주은씨 있는 거 보고 인사라도 할까하고."
"정말요. 잘 됐네요. 우리는 그냥 데이트 하러 왔어요."
"그래? 그럼 우리 합석해도 될까? 식사는 내가 살게. 이것도 인연인데 괜히 따로 앉지 말고 함께 식사해요."
"그. 그럴까요?"
주은은 아주 명백하게 반기지 않았다.
잠시 그녀의 얼굴에는 어떻게 쫓아낼까 하는 고민이 떠올르고 있었다.
"이쪽은 남자 친구?"
그러기나 말기나 정 팀장은 벌써 자리에 앉으며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최창욱입니다."
남자는 주은의 속도 모르고 기분 좋게 인사를 했다.
"반가워요. 난 주은씨랑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정지혜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주은씨 동료인 영웅입니다."
나도 기분 좋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아버렸다.
그렇게까지 나왔는데, 이제와서 쫓아내기 어렵게 되어버린 주은은 눈에 띄게 불편한 얼굴을 한다.
그녀의 두 눈에는 도대체 무슨 짓이냐는 항의의 감정이 실려있었다.
"그런데 식사는 시켰어요?"
정 팀장이 남자에게 물었다.
"아뇨. 이제 막 고르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우리 같이 골라봐요."
연륜이 있어서인지, 아니면 내 말을 믿어서인지, 정 팀장은 꽤 호기있게 자리를 이끌어갔다.
"그런데 두 분 회사에선 비밀 아니었어요?"
불편한 심사를 이기지 못하고 주은이 한 마디 던지고야 만다.
"우리가 무슨 사이가 된다고. 그냥 일 이야기를 하다가 배가 고파 나온 것 뿐이야."
정 팀장이 능글맞게 넘겼다.
그리고 건너편의 남자와 편하게 대화를 하며 메뉴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래요? 오늘 한 턱 내신다면 좀 맛있는 걸로 먹어도 돼죠?"
주은이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다시 그 발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내가 산다고 할 때, 마음껏 시켜봐요."
정 팀장이 호탕하게 보고 있던 메뉴를 넘겼다.
"그럼 사양은 않겠습니다."
주은의 얼굴에 아주 굳은 결심이 떠올랐다.
"그럼 이거하고... 이거하고... 자기야? 이건 어때?"
주은은 메뉴판에서 제일 비싸 보이는 것을 잔뜩 시키기 시작했다.
데이트 자리를 망쳤으니 정말로 실컷 울궈먹기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은 모양이다.
"그거 너무 비싸지 않아?"
남자는 그래도 상식이 있는 모양이다. 주은이 가리킬 때마다 미안한 표정으로 한 마디씩 한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고 골라요."
정 팀장이 부드러운 얼굴로 남자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그래도 죄송해서..."
"저기요!"
여전히 남자는 석연치 않았지만, 주은은 벌써 서버를 부르고 마음대로 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술은 이걸로... 괜찮죠? 정 팀장님."
심지어 식사 대금에 버금가는 21년산 양주까지 시켰다.
만약 이 식당에 더 비싼 술이 있었다면 서슴지 않았을 모양이다.
"주은아..."
남자가 부담스러워했다.
"그래요. 그렇게 해요. 나도 오랜만에 비싼 술 한번 마셔봐요."
하지만 정 팀장은 여전히 부드러운 얼굴로 흔쾌히 주은의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럼 사양않고 잘 먹겠습니다."
주은은 정 팀장을 향해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 번 골탕 좀 먹어봐라 하고 쓰여있다.
식사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평범한 대화를 나누었다.
주은의 회사 생활 이야기나 그녀가 얼마나 솜씨 있는 디자이너인지 같은 칭찬이 주를 이루었다.
물론 주은은 그런 칭찬에 그리 기뻐하지 않는다.
정 팀장과 내가 여기 앉아있는 목적을 아직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웅씨는 오늘 왠일로 그렇게 잘 차려입고 나온 거예요?"
문득 주은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그녀가 내게 말을 건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오늘 좋은 일이 있어서 한 번 입어봤어요. "
그러면서 난 정 팀장을 한 번 바라보았다.
아주 애정을 잔뜩 담아서.
"그래요? 그런데 그거 평범한 옷이 아닌 거 같네요? 무슨 브랜드에요?"
명품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그녀가 관심을 보인 것은 내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키톤이라는 브랜드인데..."
"진짜 키톤이에요?"
주은은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내 옷을 바라본다.
"그거 영웅씨 월급으로 절대 못 살 텐데?"
"하하. 그렇죠. 월급가지고 어떻게 되겠어요. 따로 수입이 있어요. 나도. 주은씨도 월급으로 그런 가방들 못 사잖아요?"
"흐응..."
"저게 그렇게 비싼 브랜드야?"
남자가 궁금하다는 듯 주은에게 물었다.
"응. 제일 저렴한 것도 내 가방보다 비쌀거야. 근데 저건 재질을 보면 그런 종류가 아냐. 아마 저 사람 연봉보다 비쌀걸?"
주은의 말에 남자가 깜짝 놀란다.
"진짜?"
그리고 내 옆에 앉아있던 정 팀장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몸에 핏이 잘 된 걸 보면 다른 사람 옷을 입은 거 같지는 않네요."
"예. 맞아요."
"도대체 돈이 어디서 나서 그런 걸 입고 다녀요?"
주은은 돈에 민감했다.
"사실은 몇 년 전에 친구 한 녀석이 무슨 코인에 자꾸 투자를 하라고 귀찮게 해서, 그냥 모르겠다 하고 넣어둔 게 있었거든요."
그 말을 듣고 주은과 남자 모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뭐. 생각해보면 요즘 코인에 대한 관심사야 다들 적지 않으니, 이보다 좋은 핑계도 없다.
"도대체 얼마나 넣어두었던 거예요?"
주은이 금세 미끼를 물었다.
"좀 되요. 사실 회사에 나오지 않아도 평생 먹고 살 돈은 있어요."
"휘유! 코인으로 돈을 번 사람이 있다더니, 정말이었네. 나 진짜로 코인으로 돈 번 사람은 처음 봐요."
남자는 호기심 반 질투 반 섞인 눈으로 날 바라본다.
주은도 내게 계속 눈길을 보낸다.
물론 어떤 호의가 담긴 눈길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탐욕으로 가득한 눈빛이다.
아무래도 정 팀장을 통해 내게도 뜯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양이다.
그때 쯤 식사가 나왔다.
우리는 잠깐 대화를 멈추고 아주 푸짐하게 나온 식사를 즐겼다.
그리고 다시 약간 배가 채워지면서 다시 질문이 오갔다.
"근데 어떤 코인이었어요?"
남자는 내 투자의 경험담을 듣고싶어했다.
"알트 코인인데, 난 처음 들어봤거든요."
미리 준비해 놓은 대답을 늘어 놓았다.
"그럼 얼마나 집어넣은 거예요?"
주은은 무심하게 물어보는 척 하며, 내 자산 규모를 파악하려 했다.
"그땐 그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그게 그렇게 오를 줄은 몰랐죠. 처음에 그걸 기억하고 찾아보니 벌써 100배가 되어있더라구요."
"휘유!"
남자는 여전히 부러워했다.
"그럼 영웅씨한테 그 투자를 권했던 친구분은 굉장히 벌었겠네요?"
주은은 더 큰 돈을 벌었을 가상의 친구에게 호기심을 가진 모양이다.
"그게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녀석 그냥 나처럼 두면 되는데, 그걸 가지고 여기저기 넣더니 오르락 내리락 하는 통에..."
"그럼 다 날려버렸어요?"
살짝 실망한 말투.
"그건 아니었죠. 하지만 그냥 두었다면 진짜 한 재산 만들었을 텐데 말이에요. 지금도 날 만날 때마다 그 소리를 한다니까요. 아직도 거기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뭐 수익이 날 때도 있는 거 같은데, 그 바닥이 어지간히 복마전이라 말이지요."
"아하..."
이제 그 가상의 친구에 대해서는 관심을 버리려는 모양이다.
그렇게 한동안 코인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고, 어느덧 식사도 끝이 났다.
"잘 먹었어요. 팀장님."
주은은 아까와는 달리 쾌활하게 인사를 했다.
"나도 즐거웠어요."
정 팀장은 주은의 남자 친구에게 눈 웃음을 치며 인사를 했다.
"참. 오늘 이렇게 재미있는데, 여기서 그냥 헤어지지 말고, 우리 2차나 갈까요? 그것도 내가 쏠게요."
그리고 정 팀장은 내가 시킨 대로 한 마디 했다.
"이렇게 잘 얻어먹었는데, 2차까지는..."
남자가 너털 웃음을 터트리며 사양의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그 남자 아까부터 계속 정 팀장의 가슴에 눈이 가고 있다.
"아니. 2차를 쏘면 돈 많은 분이 쏘셔야죠."
주은이 말했다.
오늘 아예 신이 나게 벗겨먹을 생각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하죠. 그렇지 않아도 사실 여기도 내가 낼 생각이었어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주은도 남자도 날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공돈이 생긴 사람이 쏘겠다니 부담이 줄어든다는 표정이었고, 주은은 그래 얼마나 쓰는지 보자라는 도발적인 눈빛이다.
스테이크 하우스를 나와 우리는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집이 이 동네에선 제일 괜찮아요."
주은은 이 구역의 유흥가에 대해서는 꿰뚫고 있는 모양이다.
그녀는 자신에게 파멸을 불러올 장소로 우릴 안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