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21. 풍전등화의 회사 생활
정 팀장은 조금전과 달리 다급한 모습으로 사무실을 나갔고 다시 나 홀로 남았다.
음... 그런데 난 어떻게 해야 할까?
정 팀장만큼 다급할 것은 없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소문이 나길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관련이 되지 않더라도 정 팀장이 안 좋은 소문에 휩싸여 입지가 불편해지면, 나로서도 좋을 것은 하나도 없다
주은이라...
그날 저녁 정 팀장에게 연락이 왔다.
"잘 해결되었어. 소문은 나지 않을 거야."
"그래요? 다행이네요."
아무래도 직접 그녀를 만난 모양이다.
그런데 그녀의 목소리가 그리 편해보이지는 않았다.
해결이 된 것 치고는 좀 목소리가 갈라져있다.
"내일 만나면 이야기 해 줄게."
"그래요. 그럼."
나로서야 당장 급하게 다그칠 필요는 없었다.
"주은씨요? 알죠. 웹 디자인 팀에 있어요."
다음날 오전 출근해서 문희양에게 그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래?"
"선배는 주은씨 몰라요?"
문희가 오히려 날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난 우리 팀 사람들 말고는 그리 친한 사람이 없잖아."
"하아... 진짜. 머리가 이정도 오고, 굉장히 세련되게 차려입고 다니는데... 눈에 안 띌 리가 없어요."
"그래?"
"우리 회사에서도 굉장히 이쁜 편이고요."
문희양은 내게 주은이라는 여자의 외모를 설명해주었다.
그러고보니 가끔 보이던 사람이다.
문희의 말처럼 세련되게 차려입은 여자는 회사에 꽤 여렇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을 명품으로 차려입은 여자는 그녀 뿐이다.
"어떤 사람이야?"
항상 그렇게 명품으로 치장하고 다니려면 평범한 여자는 아닐 것이다.
부잣집 딸래미일까?
"음. 강남에 살고요. 집안이 굉장하다 그랬어요. 회사에 다니는 것도 사실 그냥 취미 생활 같은 거라나?"
그런 부잣집 딸래미가 어째서 이런 중소기업에 웹 디자이너 따위를 하고 있는 걸까?
"착한 사람이에요.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아주 많고요."
문희로부터 그녀에 대해서는 꽤 이것저것 들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나왔고, 대학은 미국에서도 명문 예술학교를 나왔단다.
그렇게 대단한 커리어를 지닌 사람이 있었나? 하는 감탄이 나올 지경이다.
씀씀이도 커서 동료들에게 때때로 크게 한 턱을 내기도 하고, 외모도 괜찮은 편이라 인기가 꽤 있다고 했다.
여자들의 사회에서는 그렇게 이쁜 여자가 인기가 높은 모양이다.
"뭐. 싫어하는 사람도 좀 있어요. 어쩐지 너무 티를 내고 다닌다며."
문희양은 어느쪽도 아닌 모양이다.
그녀도 이런저런 사람들과 잘 지내기는 하지만, 모임을 이끌거나, 말을 퍼트리는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히 들어주는 타입이다. 언제인지 모르게 옆에 있고, 뭔가 믿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근데 주은씨는 왜요?"
"그냥. 어쩌다가 그 이름을 들었는데, 혹시나하고. 회사에 그런 사람이 있는 것도 몰랐으니까."
"그래요? 선배가 관심있는 건 아니고요?"
문희가 씩 웃으며 물었다.
"관심은. 나도 내 주제를 알아요."
"선배가 어때서요? 선배처럼 착실하고, 믿음직한 남자도 드물다고요."
역시 이 여자도 남자를 보는 눈은 없구나.
내 실체를 알게 되면 무척이나 실망하겠지?
정 팀장과는 점심시간에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것도 굳이 회사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만나서 대화를 해야 했다.
정 팀장이 그래주길 원했기 때문이다.
"당분간은 사무실에서 위험한 짓은 삼가야 할 거 같아."
"주은양이 팀장님 상대가 나란 것은 몰랐던 모양이네요."
"응."
"팀장님이 사무실에서 음탕한 행위를 했던 것은 눈치챘고요?"
"으응... 아마도."
"그래서 만나서 무슨 얘기를 나눴어요?"
"아까 거기서 뭘 하고 있던 거냐고 물었지. 왜 마주치자마자 도망간 거냐고. 그랬더니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 사무실에서 사람이 튀어나와서 깜짝 놀라 그냥 가버린거라더군."
정 팀장이 말을 시작했다.
"그래서 그렇게 다른 사무실들을 염탐하고 다니면 안 된다고 해주었지. 그랬더니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더라고."
어쩐지 수월하게 풀린 모양이다.
"근데 그렇게 사무실에서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오면 누구라도 관심이 가거든요. 라는 거야. 당돌한 계집애."
정 팀장의 얼굴에는 분노가 서렸다.
"네가 무슨 소리를 듣고 오해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괜히 그렇게 엉뚱한 소리 흘리고 다니면 큰코 다칠거라고 경고해주었어."
흠...
정 팀장의 방법은 나름 정공법이다.
만일 소문이 퍼진다면 범인은 너 밖에 없으니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경고를 한 셈이다.
"그게 뭐라고 하는 지 알아? 자긴 절대 남의 비밀을 폭로하고 다니는 사람은 아니라더라. 그런데 그런 말을 하면서 날 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어.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라 이거지."
정 팀장의 분노는 어디에서 기인한 걸까?
그녀의 당돌함?
자신의 비밀을 들킨 것에 대한 부끄러움?
"여하튼 난 경고했어. 괜히 회사에 이상한 소리가 떠돌면 정말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이제 조금 정 팀장 답다.
그녀는 투사였지, 결코 위험을 회피하는 겁장이가 아니다.
"어쨌든 그렇게 알아. 자기한텐 피해 안 가게 할게."
뭐. 나한테 무슨 피해가 있겠냐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말해주면 나름 고마움을 느껴야 할거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우리 밖에서 만나. 응?"
그러니까 당분간은 하지 말자가 아니었다.
"하고 싶어요? 또?"
"응? 으응... 우리 괜찮으면 잠깐 어디 들렀다가 갈까? 같이 외근한 걸로 하고"
그녀의 목소리는 바로 전날보다 더 은근했다.
어쩐지 우리가 같은 비밀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나와 더 친밀해졌다 생각하는 걸까?
"오늘은 됐어요. 난 들어가 볼게요."
그리고 난 정 팀장의 욕구를 풀어줄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정 팀장을 내 욕구 해소를 위해 사용해야지, 그녀의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부탁을 들어주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 팀장과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와 그녀들에 대한 이야기는 잊고 내 할일을 했다.
뭐. 정 팀장은 그녀에게 짜증이 난 것 같지만, 막상 그녀가 잘못한 것은 없지 않은가?
그러니 내가 화 낼 일 따위는 없었다.
"선배..."
그런데 몇 시간 쯤 뒤에 다시 문희양에게 전혀 엉뚱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선배 어제 늦게 퇴근했죠?"
문희의 얼굴이 평소와 꽤 달랐다.
"응. 한 7시 쯤? 무슨 일 있어요?"
"사실은..."
난 그녀가 그렇게 난처해 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이상한 표정이 되는 걸까?
"지금 회사에 좀 안 좋은 소문이 떠돌고 있어서요."
마침내 문희가 입을 열었다.
"뭔데? 내 문제지? 걱정하지 말고 말해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나와 관련된 일이다.
"사실은 어제 밤에 누가 우리 사무실 앞을 지나가다 이상한 소리를 들었대요."
"응?"
바로 이해가 갔다.
정 팀장이 말했던 그 여자의 짓이다.
정 팀장에겐 비밀을 지키겠다 말하고는 벌써 소문을 퍼트린 모양이다.
어째서?
부잣집 자제라더니, 자기랑은 부서도 다른 정 팀장 쯤 전혀 두렵지 않다는 말인가?
한 번 해 보자고?
"이상한 소리?"
난 시치미를 뚝 떼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사무실에서 누가 야한 짓을 하고 있었나보다라고 소문이 돌고 있어요."
"하하... 내가?"
"딱 선배를 지정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사무실을 지정했어요."
정 팀장의 이름도 거론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건 다행인가?
하지만 어째서?
주은이라는 여자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하... 어쩌지? 난처해야 하나? 어제 사무실에 있던 사람은 나뿐인데..."
"근데 나도 좀 휘말려서 말이죠."
문희의 말이 너무 엉뚱했다.
"문희씨는 왜?"
"어제 다른 사람들 다 퇴근하고 우리가 제일 늦게까지 남았잖아요? 하필이면 늦은 시간에 남아있던 사람이 선배랑 나라는 거 사람들이 알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거야 문희씨는 먼저 퇴근했다고 말하면 되잖아?"
"그러면 선배가 난처해질까봐 내가 나도 늦게까지 있었는데, 엉뚱한 소리들 하지 말라고 했어요."
세상 착한 문희양이다.
자기까지 소문에 휩쓸릴 것을 알면서도 날 위해 그렇게까지 해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안 해도 되는데..."
"여튼 소문은 그렇게 덮었어요. 아무도 선배랑 나랑 무슨 이상한 일을 했다고는 생각 안 해요."
문희양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근데 그거 좋은 거 맞아?
다들 난 문희양의 상대가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여하튼 이번에도 문희양한텐 빚을 졌네? 그지 않아도 지금 내 평판이 바닥인데 말야."
"그러니까 언제 제대로 한 번 크게 내요."
그녀는 밝게 웃으며 내가 뽑아준 커피 캔을 들고 돌아갔다.
"주은 이라는 여자랑은 잘 해결 되었다면서요?"
"하아... 이 깜찍한 것이 그런 짓을 할 줄은 몰랐지."
정 팀장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어떻게 소문이 내 선에서 끝나서 다행이네요."
"영웅씨한텐 미안해."
하지만 정 팀장은 다른 사람의 눈길에서 자신이 벗어난 것을 다행이라 여기는 것 같았다.
"그 기집애는 정말 가만 두면 안 되겠어."
"그렇다고 그 여자가 퍼트렸다는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문이리라.
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어째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원하는 게 뭘까요?"
"몰라. 그냥 날 망신주고 싶었던 건 아닌 거 같고..."
만일 그랬다면 무엇보다 정 팀장의 이름이 떠돌고 있을 것이다.
내 이름이 떠도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다시 한 번 만나봐야겠어."
정 팀장이 의지를 다졌다.
"당분간은 그냥 두죠. 어차피 소문이야 가라앉을 테니."
"음... 그래."
정 팀장은 찜찜한 표정으로 내 말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여자의 악의를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 오늘 그 애 만나고 왔어."
그날 저녁 정 팀장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그녀가 직접 보고 말하고 싶다고 해서, 정 팀장을 만나보았다.
"그 깜찍한 기집애..."
목소리만 들어도 그 여자에게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는 그 소문과 아무 관계도 없데."
뭐. 그런 변명은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럼 별 소득은 없었겠네요."
"하아... 이걸 좀 봐."
정 팀장은 자기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진을 한 장 내게 보여주었다.
"하하... 이건 정말 빼도박도 못하겠네요. 이걸 그 여자가 보여주며 협박했어요?"
정 팀장이 보내준 사진엔 나와 정 팀장이 모텔 입구에서 나서는 모습이 나와있다.
이거...
완전히 함정에 걸린 꼴이네...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정 팀장과 함께 갔던 모텔은 주차장을 통해 들어갔었다.
그러니까 이 사진은 우연히 찍은 사진이 아니라,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다가 찍은 사진이다.
만일 그녀라면, 그녀는 어째서 우릴 쫓아온 걸까?
"보낸 사람은 처음 보는 번호였어. 하지만 그거 받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집애가 전화를 하더라고."
너무나 명백한 협박이다.
도대체 무얼 위해 이 여자는 우릴 쫓아다녔고, 정 팀장을 협박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만나자고 하니, 기다리겠다고 하더라고. 약속 장소에 나갔더니, 너무 뻔뻔하게 반가워하는 거야.
정말로 속이 터져서..."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게 뭔가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짓을 할 리 없다.
"요구따위 말 안 하더라. 그냥 앞으로 나랑 친하게 잘 지내고 싶데. 앞으로 정 팀장님 라인에 들어가고 싶어요. 이러면서..."
정 팀장은 그녀에게 다시 분노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