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20. 미소녀와 미소녀가 나를 차지하기 위해 엉망진창이 되던 밤
다음날 난 지아에게서 일이 잘 풀렸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 사람이랑은 잘 이야기가 되었어. 그런데 앞으로 잘 지내보자더라. 괜히 자기 때문에 회사 그만두거나 하지 말래."
"다행이네."
"그런데. 조금 이상했어."
"뭐가?"
"지금까지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닌 거 같았어. 뭐랄까? 독기가 빠진 느낌? 아무래도 나 때문이겠지?
내가 굉장히 잘못한 거 맞지? 처음부터 시작을 말았어야 했나봐."
물론 지아 때문은 맞다.
하지만 그녀가 생각한 그런 원인과는 조금 다르다.
그 남자는 밤새 은희의 집 앞에 서성였고,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거의 들었다.
물론 대화 소리까지 전부 들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두 여인이 내는 신음 소리는 아주 충분히 들었다.
결정적인 것은 은희였다.
지아와 내가 섹스를 할 동안은 거의 분노를 참지 못하던 그 남자였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분노는 다른 감정으로 치환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은희가 돌아와 두 여자가 함께 소리를 내면서부터, 남자의 얼굴에 분노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느 순간부터 사내의 얼굴엔 전엔 보기 힘들던 묘한 표정만이 남아있었다.
납득을 한 것이리라.
자신이 결코 줄 수 없는 무언가를 한꺼번에 두 여자에게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을.
뭐. 어찌되었건 내겐 상관 없는 일이다.
그 남자의 일은 이제 더이상 내가 신경쓸 것은 없었다.
그 사람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든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지아도 딱히 결혼을 파기하는 것으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니 다행이다.
"그런데 괜찮겠어? 방송국에 계속 있어도?"
"어쩐지 믿을 수 있을 거 같아. 근데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 계속 다녀도 될까?"
아무래도 스스로 저지른 행위가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계속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 일 자기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잖아?"
"그러긴 하지..."
"우선은 버텨봐."
그렇게 말은 했지만, 상대가 어떤 해를 끼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야 할까봐. 자긴 괜찮아? 나 계속 여기 다니면 그 사람이랑 계속 마주칠텐데."
"내가 괜찮지 않을 게 어디있어?"
"뭐야? 그 자신감은?"
지아가 삐죽거렸다.
"아니. 난 지아를 믿는다는 말이지."
"됐어! 진짜. 내가 무슨 생각인 건지. 흥."
결국 그녀는 삐죽거리며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지아의 문제는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남자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생각을 넘어서는 다른 국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로 지아는 별일 없이 방송국에 출근한다 했다.
남자도 직장에서는 평상시와 다를 것 없이 대해주었다고 한다.
사적인 만남은 이젠 없을 것이고, 단지 결혼 취소는 잠시 미루기로 했단다.
주변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서 적절한 시점을 찾기로 한 모양이다.
그리고 난 정말로 그 남자에 대해서는 머릿속 저편으로 밀어놓았다.
딱히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남자에 신경을 쓰기에는 내게 일어나는 일들을 수습하기에만도 바빴다.
지연의 전화를 받을 때까지는 별다를 것도 없는 아주 평범한 하루였다.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니 하루가 다 가고 있었다.
"아저씨. 수빈 언니라고 알지요?"
전화를 받자 지연이 대뜸 어떤 이름을 꺼집어 낸다.
"응? 어? 아니..."
그녀에게서 그 이름이 나올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꽤 당황했다.
"응. 알고 있기는 한데. 갑자기 왜?"
어떻게 반응을 해야할지 몰라 우선 물어보았다.
"지금 만나고 있어요."
그리고 지연의 대답은 내 예상을 훨씬 더 뛰어넘었다.
왜? 왜~에?
어째서?
"어쩌다가?"
"그 언니한테 전화가 왔어요. 만나자구요. 아저씨 문제라 그래서 만났어요."
지연의 목소리로는 아직 그녀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조금은 냉랭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어딘지 애절함이 섞여있다.
그러니까 그녀가 굉장히 복잡한 마음 상태인 것은 틀림없다.
만났다고?
이거 난처하네...
그녀가 어째서 그런 행동을 한 걸까?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담판?
둘이 싸워서 이긴 사람이 남는 것?
난 지연에게 이미 내게 그녀가 하나뿐인 여자가 될 수는 없다 말을 해 놓았었다.
그러니 어쩌면 지연에게는 언젠가 닥칠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아마도 한 남자를 사이에 둔 두 여자가 만나는 최악의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아니... 생각해보니 다른 여자와 섹스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것 보다는 낫겠다.
"지금 옆에 있어?"
"옆은 아니고 앞에 있어요."
"그럼 수빈이 좀 바꿔줄 수 있어?"
"받아 봐."
"전화 받았어요."
"저... 무슨 일로 지연이랑 만나고 있는지 물어봐도 돼?"
"네. 그냥 여자끼리 친목을 다지기 위한 만남이죠. 다른 말로 하면 수다떨기?"
"하하... 하필이면 수빈이 너랑... 지연이랑..."
"아저씨가 신경 쓰실 거 없어요. 뭐 꼭 아셔야 할 게 있으면 알려드릴게요."
뚝! 전화가 끊겼다. 그리고 그날 남은 업무 시간 난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아저씨 일은 다 끝나셨어요?"
다시 한 시간 정도 지나 지연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 시간을 살짝 지나있었다.
아마 지금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한 것이리라.
그런데 사태가 어떻게 된 걸까?
어쩐지 결과를 알기 두려웠다.
"어. 그래. 여자들의 친목은 재미있었어?"
"딱히 재미 같은 게 있을 리 있어요? 라이벌끼리."
아... 위험! 위험... 더 이상 대화를 진행시키기 싫다.
"그래... 아쉽구나."
"아쉬우시겠죠. 자기 여자들끼리 화목해야 아저씨가 편하니까."
"아니. 그런 거 아니구."
"여튼 끝나셨으면 잠깐 들르세요.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에요."
그녀가 위치를 알려주었다. 회사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서울숲 안이라고 한다.
난 회사를 나가 따릉이 자전거를 타고 부지런히 패달을 밟았다. 택시를 타도 서울숲 안까지 들어갈 수는 없으니, 자전거가 제일 편한 이동수단이었다.
수빈이 알려준 장소는 서울숲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사슴 우리 앞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도착해보니, 두 여자가 꽤 멀리 떨어져서 멀뚱 멀뚱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뭣들 해?"
난 억지로 어색한 웃음을 띄우며 그녀들에게 인사를 했다.
"응? 그 자전거는 뭐예요? 맞다! 나도 자전거 탈래."
지연이 나보다 자전거를 더 반겼다.
아니. 그럴 리 없지. 그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시늉을 했다.
지연은 내게서 자전거를 뺐어 올라타고는 주변을 신이나서 돌았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이번엔 수빈에게 인사를 했다.
그래도 이 여자는 지연보다는 대화할 상태인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먼저 대화를 요구한 것이지...
어쩐지 대화를 시작하기도 전에, 난 그녀에게 말려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다지 오랜만 아니에요. 아직 열흘도 안 지났어요."
수빈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여하튼 잘 지내지도 못했구요."
역시 편한 상대는 아니다.
"알고 있을 지 모르지만 나 매일 당신 생각 했어요.
물론 당신이 좋아졌다거나, 무슨 애정 따위가 갑자기 생겨서 그런 건 아니에요."
지난번에도 느낀 거지만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랬구나."
달리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처음 며칠 동안은 이겨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생각했죠. 근데 안 되더라구요."
그런데 수빈은 패배한 사람 치고는 너무나 홀가분해 보였다.
"난 원래 쉽게 포기 안 하는 편이에요.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죠."
수빈은 담담하게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나니까 알겠더군요. 당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당신으로부터 얻는 쾌감이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니까 명쾌해지더라구요. 이건 내가 벗어날 수 있는 종류의 유혹이 아니야. 오히려 반대였던 거죠. 나 욕심이 나는 것은 꼭 차지해야 하는 사람이거든요."
그런 말을 들으니 덜컥 두려움이 밀려온다.
이 여자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여자와도 다르다.
욕망도 크고, 또 그걸 위해 어떤 것도 감내할 수 있다는 의지도 있는 여자였다.
"계속 둘이 그렇게 어색하게 있었어?"
난 잠깐 말을 돌려보았다.
우선 어째서 이 아름다운 여자가 지연과 만나고 있는지부터 알아야 했다.
"쟤가 계속 삐질거려서 대화 따위 할 상황이 못 됐어요."
"그렇구나... 근데 꼭 지연이랑 대화를 해야 했어?"
"대충 상황을 보니까 쟤가 퍼스트고 내가 세컨드 쯤 되는 거 같던데. 아무래도 내가 다가가서 이야기를 시작해 볼 필요는 있겠더라구요."
수빈은 어떤 의미에선 지연보다 더한 강적이었다.
두 사람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 내뱉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것도 노골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저기... 그런 단어는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되겠니?"
누가 들을까 무서웠다. 이제 겨우 스물, 스물 한 살의 여자 둘이 퍼스트니 세컨드니 하고 있는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어! 선배! 여기서 뭐하세요?"
친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렸더니, 제일 만나고 싶지 않았던 상대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문희씨... 거기서 뭐해?"
나처럼 따릉이를 타고 나타난 그녀는 날보고 생글 생글 웃고 있었다.
"데이트요."
문희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응? 애인은?"
"저 앞에 가고 있어요."
그녀가 손을 뻗어 가리키는 곳에는 따릉이를 타고 천천히 멀어지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있었다.
"선배도 데이트 하나 봐요! 방해하지 말아야지. 그럼 낼 봐요!"
문희 양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발랄하게 웃으며 사라졌다.
하아... 하필이면...
생각해보면 여기 회사에서 가까워서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서 산책이나 데이트하기 위해 자주 들르는 곳이다.
내 잘못이다.
여기서 이런 대화를 하면 안 됐다.
"저기... 수빈 아. 혹시 방금 그 여자분 니가 말 하는 거 들었니?"
"퍼스트와 세컨드요? 음... 거리상으로 들렸을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애매한데요? 회사 동료분인가봐요?"
"응."
"흠... 잠재적인 경쟁자인가? 마음에 안 드는 얼굴인데..."
"그런 거 아니거든. 남자 친구도 있어. 너도 봤을 거 아냐?"
"아저씨는 절대 믿을 수 없으니까요. 주변 여자는 전부 잠재적인 경쟁자라고 생각해야 해요."
"잠재적인 경쟁자? 그게 뭐야?"
어느새 나타난 지연이 대화에 합류했다.
"그러니까 너하고 나 말고 아저씨의 여자 리스트에 추가될 가능성이 있는 여자."
"근데 언니는 왜 이 아저씨 여자친구 할려 그래요? 미남이 좋아서 따라다녔다며?"
둘 사이에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얼추 짐작이 갔다.
"미남이는 이제 아무런 의미도 없어. "
수빈의 얼굴에는 아주 조그마한 주저함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마음속에서 미남을 밀어낸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뭐. 그 꼴을 보고도 미련이 남아있으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쳇. 바보 같은 자식. 여자 하나 간수도 못하고."
지연이 혀를 차며 그 착한 소꿉 친구를 비난했다.
수빈이 어지간히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아니. 마음에 들면 그게 더 이상하지.
"그래서 언니가 꼭 아저씨 육변기 2호 하겠단 말이죠?"
난 맹렬하게 고개를 좌우로 돌렸다.
문희 양은?
혹시라도 또?
다행히 우리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대화를 하는 동안 사람이 접근하지 못할 곳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육변기? 그게 뭐야?"
내가 자리를 옮기자는 말을 꺼내기 전에 벌써 수빈이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대화를 이어갔다.
"저기... 지연아. 우리 그런 말 안 쓰기로 했잖아."
난 필사적으로 지연의 입을 막아보려했다.
"그러니까 고기로 만든 변기라는 말이야. 아저씨의 정액을 받는 변기."
지연은 내 제지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설명을 마쳤고, 그걸 들은 수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그거 아니잖아. 여자 친구. 그냥 난 여자 친구가 한 명 이상일 뿐이야."
"여자 친구 아니에요. 육변기에요. 그냥 아저씨의 정욕을 풀어주고, 정액을 받아주는 육변기."
지연은 고집스러웠다.
화가 났다.
틀림없다.
말을 끝내고 꼭 다물고 있는 그녀의 입술이 지연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
그거 아니라도 당연히 화가 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