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19.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너무 의심스럽다.
"응? 언니 어딜 간건가?"
욕실에서 나와보니 은희가 보이지 않는다. 방 하나에 욕실 뿐인 원룸이라 숨을 곳도 없으니 밖으로 나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뭐 사러 간 거 아닐까?"
"글쎄? 그랬으면 말이라도 하고 갔을 텐데..."
"그렇기는 한데..."
"아무래도 도망간 거 같아. 이 여자가 정말?"
지아는 금세 은희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내가 오늘은 안 건드린다고 그렇게 약속을 했는데... 그걸 못 믿었단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있는 지아의 얼굴에는 무언가 장난기가 그득했다.
"네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 알아차린 모양이지."
"거짓말 아니거든요. 이 아저씨야!"
지아가 삐죽거렸다.
"정말?"
"몰라. 뭐. 언제고 들어오겠지. 자기 집인데."
지아는 내 몸을 잡고 침대로 갔다.
"우린 우리 할 일이나 하자."
그녀는 야한 웃음을 지으며 날 침대에 눕히고 내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우리는 할 일을 했다.
언제나처럼 지아는 충분한 만족을 표시하며 내 위에서 첫 번째 전투를 마쳤다.
"하아... 하아... 오빠. 뭐 마실래? 맥주? 콜라?"
"난 맥주로 줘."
"그럼 에어컨 좀 켜줘. 좀 덥다. 아! 창문은 닫고."
어느새 6월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격렬한 운동을 하고난 직후라 나도 덥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지아가 방 한쪽의 주방으로 가서 콜라를 꺼내는 동안 창문을 닫으러 창가로 갔다.
그런데 저쪽에 보이는 승용차 한 대가 낯이 익다.
이런...
설마?
난 바로 캐스팅 카드 < 여배우 >를 지아에게 사용하고, 다시 캐스팅 카드 < 빼앗기는 남자 >를 그 남자에게 사용했다.
그리고 액티브 카드 < 모니터 >로 그 남자를 확인해본다.
내 생각과는 달리 남자는 그 승용차에 앉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훨씬 더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은희 집 현관문 바로 앞에 서있다.
이런...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살짝 당황한 나는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키고, 소파에 앉아 지아가 가져다준 맥주를 마시며 잠시 그 남자를 지켜보았다.
은희가 집을 나서고, 그 남자가 올라온 모양이다.
그리고 아마도 방금전 우리가 나눈 격렬한 행위를 엿들은 모양이다.
남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흉측했다.
그런데 뭔가 좀 더 불편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현관문에서 떨어져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았다. 그리고 스마트 폰을 꺼내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응? 그런데 어째서 그런 걸 검색하고 있는 걸까?
'완전 범죄'
'알리바이'
'미필적고의'
'심신미약'
이거...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한 것 같다.
당장 해결해야 할 것 같다.
내 문제가 아니다.
당장 위험해 질 사람은 바로 지아였다.
"잠깐만 조용히 해 줘."
그때 지아가 내게 입단속을 시키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예. 저에요."
지아가 통화를 하는 동안 난 그녀의 요청대로 묵묵히 곁에 앉아있었다.
"예. 둘이 있어요. 그럼요. 올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녀가 그런 말을 한 순간이다.
남자의 얼굴이 눈에 띄게 변했다.
무척이나 흉측한 얼굴이다.
난 당장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요. 재미있어요."
지아가 말을 하다 말고 날 노려본다.
말을 하지 말라고 했지, 손도 가만히 있으라 하지는 않았잖아?
지아가 통화를 하는 동안 난 그녀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가 무척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내 손이 그곳에 닿았다.
"아!"
지아는 입술을 벌렸다.
밤금전 뜨거운 시간을 보낸 탓에 그녀의 몸은 아직도 무척이나 민감한 상태였다.
지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요. 그럼 바쁘신데 이만 끊을게요."
지아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묵묵히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와 은희의 집 현관에 귀를 댄다.
"왜 그래? 진짜. 나 당황하게 만들려 그런 거야?"
"싫어?"
"아니... 으음..."
지아가 살짝 몸을 흔들었다.
"아니. 좋아. 뭐. 당신 편한대로 해. 어차피 내가 말린다고 들을 사람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녀의 눈빛은 무척이나 촉촉했다.
음욕인가?
아니. 그것과는 달랐다.
아직 우리가 사귀던 시절, 난 종종 그런 눈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눈을 할 때면 난 무척이나 마음이 포근해졌었다.
"그럼 계속한다."
"으응..."
지아의 몸이 뒤로 넘어가고 있었다.
난 그녀의 몸을 눕히고 계속해서 애무를 이어갔다.
"아..."
남자는 분노한 얼굴로 현관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명백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의 목소리이다.
그리고 그녀의 친한 언니가 빌라를 빠져나가는 모습도 이미 확인했다.
그 집에는 그녀와 어떤 남자 두 사람 뿐일 터이다.
"흑! 하윽!"
여자의 목소리는 무척 낯익었지만, 또한 너무나 낯설었다.
그녀가 그런 소리를 내는 것을 남자는 들어본 기억이 없다.
어째서?
물론 그도 바보는 아닌 이상 바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정말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으드득!
남자는 이빨을 깨물었다.
어째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그 여자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똑똑하고 현숙한 여자.
어떤 자리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멋진 여자였다.
그러기에 결혼을 결심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 여자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 있었다.
참을 수 없었다.
무언가 결단을 내려야 했다.
나는 일부러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였다.
지아를 안전하게 만들려면 그 방법 뿐이다.
그리고 지아는 충실하게 내가 이끄는대로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하아! 하아! 이러면 안 되는데..."
지아는 절정의 순간을 충분히 누리고 나서 말했다.
"뭐가?"
설마 이제와서 후회를 하는 걸까?
"여기 지은지 오래되서 방음이 잘 안 된데."
지아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옆집이나 윗집에서 들으면 은희 언니가 이러는 거라고 생각할 거 아냐?"
안 되는데는 말 뿐이고 고소하다는 얼굴이다.
"근데. 이 여자 정말로 어딜 간 걸까?"
"뭐 데이트라도 간 모양이지."
"그럴까? 흐음..."
지아는 그다지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뭐 언제고 들어오겠지."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방해꾼이 없어 마음이 편하다는 얼굴이다.
다른 여자가 있어서 색다른 재미를 느낀 것도 사실이지만, 그걸 마냥 좋다 느끼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근데... 자기야. 나 할 말 있어."
지아는 몸을 일으키고 날 바라보며 어째서인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뭔데?"
어쩐지 정말 대단한 말이 나올 거 같았다.
"나... 그만 둘까봐."
무얼 그만둔다는 말일까?
이런 경우라면 물론 둘 중 하나이겠지.
나 혹은 결혼할 상대.
그리고 난 오늘 그녀의 눈에서 지난 시절에 보았던 종류의 감정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나와 그만 만나겠다는 소리는 아닐 것 같았다.
"결혼?"
"응."
그녀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결심했다면, 난 고맙지."
그녀가 포기하겠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결혼만이 아니다.
지아는 지금 자신이 꿈꾸어왔던 모든 것을 손에서 놓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괜찮겠어?"
"아무래도 더는 못 하겠어. 사람 속이고 그러는 거..."
"감당할 수 있겠어?"
"음... 글쎄? 아무래도 방송국은 그만 둬야겠지?"
그건 당연하다.
난 지아한테 그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송국을 그만둔다는 것은 단순히 직장을 옮기는 수준이 아니라, 지금까지 쌓아온 커리어 전부를 포함한다는 말이다.
난 지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진심인 듯 하다.
"그렇다고 오빠한테 내 평생을 책임지라는 건 아니야."
지아가 말을 이어갔다.
"오빠 이젠 나 한 사람만 보고 살 사람이 아닌 것도 잘 알고."
그걸 알면서도 날 선택하겠다니 미안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난 너만을 사랑해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그녀가 말했듯이 난 너무 변해버렸다.
"네 평생은 책임질 수 있어."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그녀가 원하던 성공을 보장해 줄 수는 없지만, 적어도 살아가면서 불편하지 않게는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음... 그건 나중에 말해."
지아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난 그녀의 마음을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라도 그녀만을 바라보겠다는 말 한 마디 쯤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난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줄 수 없었다.
"대신 한 가지 말할 게 있어."
"응. 뭐든지."
"오빠. 지금 다른 여자들이랑 그러고 다니는 거 알고 있는데, 난 굳이 알고 싶지 않아."
무척이나 많은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될 수 있으면 너 힘들게 하지는 않을게."
그게 아마도 내가 해줄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지아가 그런 결심을 한 것은 결코 나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내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다른 여자들과 관계를 맺고 다니는 것도 막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아마도 설정 카드 < 참사랑 >의 영향이리라.
하지만 내가 이여자 저여자와 사귀는 것을 보고 있는 것도 마음이 편치는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그녀가 나름 결론을 내린 것이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또 있어. 그때 나 준 1억 원... 그거 안 돌려줄거야. 그걸로 먹고 살 방법이라도 마련해야지. 그니까 내 인생 망친 위자료라고 생각해."
지아는 정말로 자신의 미래를 전부 바꿀 결심까지 하고 있었다.
꽤 많이 미안해졌다.
"돈은 얼마든지... 아니. 네가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만큼 줄 수 있어. 뭐. 그 남자처럼 강남의 아파트를 사줄 정도는 아니지만."
"바보야. 그런 거 필요없어."
지아는 내게 안겨왔다.
"이정도면 충분해..."
어쩐지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그런데... 어쩐다.
이럴줄 알았으면 방금전에 그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그 남자에게 무척이나 미안해졌다.
남자의 얼굴은 무척이나 묘했다.
여전히 분노의 표정은 남아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또 다른 어떤 종류의 감정이 엿보인다.
"우리 씻으러 가자."
물론 지아는 지금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지아와 함께 다시 욕실에서 나와 이제는 편안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우리는 TV를 틀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보냈다.
때때로 지아는 내게 안겨왔고, 우리는 애정으로 가득한 키스를 나누었다.
은희가 돌아온 것은 한 시간 쯤 지난 뒤였다.
"어디 갔다와?"
지아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너희들 오붓하게 즐기라고 일부러 피해준거다."
"근데 왜 도로 왔어?"
"갈데가 없어서 그랬다. 이년아."
은희가 삐죽거렸다.
"그냥 있지."
지아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하자, 은희가 손가락으로 커다란 엿을 날리고 욕실로 들어갔다.
곧 물소리가 나고 씻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에 은희는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왔다.
"앉아. 언니."
지아는 마치 자기집처럼 편하게, 은희에게 소파를 가리켰다.
"여기는 내 자리니까 여긴 넘어오지 마."
은희는 소파 구석을 차지하고 손으로 금을 그으며 말했다.
"진짜 안 괴롭힌다고."
"그말을 어떻게 믿냐?"
하지만 그녀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어보였다.
"어디 갔었어? 정말?"
이번엔 내가 물어보았다.
"마지막 수업 하나 있었어."
"그럼 미리 말을 하지. 미안하게."
지아가 슬쩍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렇게 몸 좀 움직이고 나니까 훨씬 낫다. 뭐."
하지만 은희의 눈은 지아가 잡고 있는 내 물건에 가 있었다.
"하고 싶어?"
지아도 그녀의 눈을 놓치지 않았다.
"안 해."
은희는 슬쩍 눈을 피했다.
"참. 너.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은희가 살짝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응. 말해."
"너 그 사람... 정말 좋아하는 거 맞아?"
은희도 무언가 눈치를 챈 걸까?
여자들은 남자와는 무척 다른 동물이다.
남자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거나, 상대에게 듣지 않으면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다.
비록 서로 감정을 나누는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여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사람들은 언어가 아닌 다양한 형태로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표현하고, 여자들은 그런 신호로부터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 남자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