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19.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너무 의심스럽다.
"언니 내일 밤에 할 일 있어?"
지아가 은희에게 전화를 걸어 물었다.
"아니. 수업 끝나면 그 때부턴 딱히 없어."
"그럼 우리 낼 볼까?"
"응. 그래... 아니. 잠깐 너 혹시 무슨 나쁜 짓 꾸미고 있는 거지?"
은희는 얼마전 지아의 꾀임에 넘어가 벌어졌던 사건들을 떠올렸다.
"내가 무슨 나쁜 짓? 그런 거 없어."
지아는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뭔가 있어. 이 기집해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
은희는 이번엔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냐.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 너 낼 나하고만 만나자는 거야? 아니면 영웅이도 부를 생각이야."
"우리 둘만 만나면 무슨 재미 있어."
"기집애! 싫어. 그러면."
"히잉! 언니야! 같이 놀자!"
"너 그때처럼 하려고 그러지?"
"아냐. 절대로 아무짓도 안해. 그냥 언니네 집에서 같이 놀자고."
"우리집? 왜?"
"사실은 그날 언니가 해준 이야기 때문에..."
지아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의심하는 거 같으니까 날 방패로 쓰겠다고?"
"헤헤... 의리! 의리 알지 의리?"
"의리는 너나 지켜 이년아!"
은희는 결국 지아의 애처로운 도움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원하는 것을 얻어낸 지아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오빠 내일 시간 있어?"
지아가 전화로 다음 날의 만남을 요구해 왔다.
그녀가 결혼할 때까지 언제라도 만나주기로 했으니, 약속을 지켜야지.
그런데 약속 장소로 잡은 곳이 은희의 집이라 살짝 놀랐다.
이 여자들은 이번엔 또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걸까?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걸려온 은희와의 통화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너도 알아두는 것이 나을 거 같아서."
은희는 꽤 망설였던 듯 하다.
지아가 말하지 않는 것을 내게 말해주기 껄끄러웠던 듯 하다.
"그날 우리 아침에 모텔에서 나오면서 봤던 남자 혹시 기억해?"
"응? 선글라스 끼고 있던 남자? 네가 아는 사람 같다고 했었지?"
"응. 그 남자 아무래도 지아랑 결혼할 그사람인 거 같아."
"와! 그거 대단한 우연이네."
내가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은 절대 밝힐 수 없다.
"우연이겠냐?"
은희가 혀를 찼다.
"그럼?"
시치미를 뚝 떼고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 되물었다.
"만약 맞으면 아마 지아를 뒤쫓아 온 거 같아. 그게 아니고서야 하필 우리 옆방에서 나왔을 이유가 없잖아."
"아항!"
"아항은 뭐가 아항이야!"
"어? 그러면 지아 걱정이 크겠네?"
"다행이랄까? 마침 지아가 자기 차를 나한테 빌려줬다고 했었거든. 그러니까 그 사람은 지아가 아니라 나를 쫓아왔던 거지."
"역시 지아는 머리가 좋구나. 그런 계획도 꾸며놓고."
"계획은 아니었을 거야. 내가 말해주고서야 그 사람 거기 있던 걸 알았거든."
"그래? 여하튼 그럼 혐의는 풀렸겠네?"
"그런건지 뭔지... 지아 말로는 그 사람 전보다 더 다정하다네. 굉장히 큰 선물도 해주기로 했데."
"선물?"
"응. 신혼집 그거 지아한테 증여해준다고 했데. 강남에서 굉장히 좋은 아파트 팬트 하우스인데. 적어도 50억은 넘을 거야. 근데 그 기집애는 거절했다더라."
선물은 가치가 적절할 때에나 단순하게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다.
50억 짜리라면 선물이라기 보다는 의도라고 봐야 한다.
두 사람 모두 각자 계산이 있을 것이다.
남자는 강남의 아파트를 주는 대신 상대가 자신에게 충실하기를 원하는 것일 수도 있다.
혹은 후일 자신의 애정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지아는 독이 든 선물 따위 원치 않는 것이고.
증여라고 해도, 결혼 자체가 사기라면 소송전으로 들어가면 도로 뱉어내야 할 수도 있다.
결국은 판사가 판단을 내릴 것이고, 판사는 더 비싼 변호사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각자 나름의 판단을 했고, 그런 선물의 제안과 거절은 또 제법 그럴듯한 미담으로 남을 것이다.
"참. 애도. 지도 미안했던 걸까?"
은희는 선물에 대해서는 그렇게 가볍게만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음모 따위 어디에도 없고, 순수한 선의의 선물과 미안함의 결과일 수도 있다.
사실 세상엔 음모 보다 그냥 겉으로 보이는 대로의 일들이 훨씬 더 많은 법이다.
"그래서 너희 집에서 만나기로 한 거야?"
"어. 그니까 너도 명심해."
"응? 뭘 조심하면 되는데?"
"내가 너희를 위해 호의를 배푼 거야. 배은망덕하게 그날처럼 날 가지고 놀려고 하면 나 정말 화낸다."
은희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말로 싫은 거야?"
난 그녀가 날 얼마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너 정말 나빠! 흥!"
은희는 삐진 티를 잔뜩 내며 전화를 끊었다.
다음날 퇴근하고 바로 은희의 집으로 향했다.
"먼저 들어가 있어."
집 앞에서 전화를 하니 그녀가 도어록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이사하고는 처음 들어와 본 은희의 집이다.
예전에는 때때로 그녀의 집이나 우리 집에서 술을 마시곤 했었는데, 그녀가 지금의 남자를 사귀고, 이사를 한 뒤로는 거의 만난 적이 없었다.
혼자서 여자 집에 들어와 있으니 어쩐지 싱숭생숭하다.
여기 저기 은희의 냄새가 나고 있는 것 같았다.
딱히 할 일이 없어 잠시 집안을 둘러본다.
은희가 사는 곳은 전형적인 원룸이었다.
제법 넓은 공간에 침대를 놓고 한쪽에 소파와 테이블을 놓았고, 현관 옆으로는 주방까지 있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성격 답게, 장식이나 인형 같은 것은 없다. 그런 면에서 여성스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대신 운동 기구 같은게 보인다. 역시 그녀는 몸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리 크지도 않은 집이라 고개를 한 번 돌려보니 집 구경이 끝났다.
결국 할 일이 없어, 소파에 앉아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은희와 지아가 함께 들어왔다.
"뭐하고 있었어? 혹시 은희 언니 속옷이라도 뒤져본 건 아니지?"
지아가 놀리듯 물었다.
"너 혹시 내 팬티 꺼내서 딸친 거 아니지?"
은희도 합세했다.
"맞다. 정말로 그런 거 아냐? 자기 좀 변태 같아졌으니까 그럴지도 몰라."
이여자들은 둘만 모이면 합세를 해서 날 괴롭힐 생각만 하는 모양이다.
"정말. 내가 무슨 변태 짓을 했다고. 진짜 변태는 너희들이잖아?"
내 말에 지아와 은희는 각자 얼굴이 빨개졌다.
둘 모두 각자 저지른 행동이 머리에 떠오른 모양이다.
"시끄러!"
"남자가 여자한테 변태라고 하는 게 어딨어?"
그리고 둘이 다시 힘을 합쳐 날 공격했다.
아무래도 벌집을 건드린 모양이다.
이거... 좀 잘못한 거 같지?
그렇게 떠들석한 순간이 지나고, 둘은 사들고 온 맥주를 꺼내어 내 양쪽으로 하나씩 앉았다.
잠깐 동안 우리는 맥주를 홀짝이며 잡담을 나누었다.
"참. 자기 얼마전에 언니 학원 사람들하고 함께 술마시고 놀았다며?"
갑자기 지아가 엉뚱한 것을 물어왔다.
"응? 어..."
은희가 말한 모양이다.
"재미있었어?"
"하하..."
"거기 누구 누구 있었어? 다 있던 거야? 은지씨, 송아씨, 진아씨?"
은희가 다 얘기 한 것은 아닌가?
은희를 바라보니 싱글싱글 웃고만 있다.
"언니는 술자리 중간에 빠져나와 잘 모른다고 자기한테 물어보라고 했어."
지아가 내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아무래도 지아에게 슬쩍 운만 띄우고 나와 싸움을 붙이려 한 모양이다.
"으응... 근데 궁금해?"
"당연하지. 예전에 내가 알던 오빠였으면 신경 안 썼을 텐데, 지금은 믿을 수 없으니까. 자기가 언니랑 한 거 알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하하..."
"진짜로 그 때의 오빠였으면 두 사람이 밤새 같이 있었다고 해도 그런가보다 했을 거야."
"맞아. 그땐 그랬어. 나도 영웅이랑 밤새 같이 있어도 하나도 신경 안 썼는데."
"그건 그리 칭찬 같이 들리지 않는데?"
"칭찬 맞거든."
지아가 말했다.
"남자로서 매력이 별로 없다는 말이잖아?"
남자로 받아들인다면 밤에 둘만이 있는 자리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소리를 하지는 못할 것이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은희가 말을 흐렸다.
"남들한테 매력 없어도, 나한테만 이쁜 사람이 좋은 거야."
지아는 단호했다.
"..."
거짓말이다. 그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지금은 밤에 가만히 있다가 이 남자 오늘은 어디서 누구랑 무얼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니까."
"맞아."
은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넌 왜?"
"내 맘이야."
"그래서 그날 누구랑 했어?"
지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본다.
"송아씨? 그 언니가 제일 호색하더라. 그 언니랑 했어?"
잠시 난 무슨 대답을 할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귀찮아 질 것 같다.
"으응..."
"응? 뭔가 이상해. 자기 뭔가 더 숨기는 거 있지? 혹시 은지씨랑도 한 거야?"
지아는 촉이 좋았다.
"설마 처음부터 두 여자랑 한꺼번에?"
내가 대답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그녀는 확신을 가진 모양이다.
"하하..."
내가 요즘 들어 뻔뻔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지아에게 맘 편히 이런 저런 여자들을 만나고 있다는 소리는 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우리가 쌓아왔던 기억들이 남아있어서이겠지.
"진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처음부터 둘이랑 할 수 있어?"
"어쩌다 보니까..."
"너 정말로 그 둘이 전부라고 생각하니?"
그때까지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은희가 끼어들었다.
"뭐어? 설마?"
지아가 날 빤히 바라본다.
"진아씨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으음..."
"뭐야? 걔 남자 친구도 있잖아?"
"어어..."
"너 요즘엔 그렇게 만나는 여자마다 전부 하고 다니는 거야?"
"전부는 아냐..."
"그럼 좀 이쁘면 다 하고 다니는 거야?"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이젠 진짜 자기를 하나도 모르겠어."
"니가 자꾸 예전의 영웅이를 떠올리니까 그래. 얘. 진짜로 니가 알던 그 남자 아니야. 지금 완전히 새로운 남자랑 사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해."
"그래야 할까보다..."
어쩐지 학원 이야기가 나오면서 분위기가 어두워졌다.
"나 씻을래."
지아가 벌떡 일어났다.
"자긴 오지마. 나 기분 상했어."
나도 따라 욕실로 가려 자리에서 일어나자 지아가 삐죽거렸다.
"어쩌니. 정말로 많이 화난 모양인데."
은희가 난 놀렸다.
"재밌냐?"
"응. 나 너희가 다정한 모습 보는 것도 좋아하는데, 이렇게 싸우는 걸 보고 있으니까, 이것도 나쁘지 않네."
"니가 꾸민 짓이잖아?"
"어? 내가 뭘? 내가 너한테 그 세 사람이랑 떡치라고 등이라도 떠밀었어?"
음. 맞는 말이다.
그녀는 그저 자리를 마련했을 뿐이고, 그 날 벌어진 일들은 전부 내 책임이 맞다.
하지만 은희가 그 일을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잠시 티격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눈이 맞았다.
난 나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당겼고, 은희는 내 품에 안겨왔다.
우리는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언제인가 은희의 손이 내 바지 않으로 들어와 있었다.
점점 더 그녀는 내게 대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들어가 봐. 지아 기다리겠다."
그녀가 입을 떼고 내게 말했다.
어쩐지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띄고 있었다.
"그럴까?"
잠시 그녀와 이대로 일을 치룰까 고민을 해보고,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녀가 선택을 할 때까지, 먼저 다가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 했다.
"너. 언니랑 뭐 했어?"
샤워를 하던 지아가 바로 내게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혹시 본 걸까?
얼굴 표정을 보니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그렇다면 참 대단한 여자이다.
"하아... 아니다. 말 하지마. 내가 오빠한테 그럴 무슨 자격이 있다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왠지 지금은 정말로 미안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좀 더 좋은 경험을 만들어 주었을 수도 있었는데...
난 그저 내 욕망을 따르고만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지아야. 전화 왔어. 바꿔줄까?"
은희였다.
전화를 건 사람은 물론 그 남자였다.
그리고 은희는 지아의 알리바이를 만들어주기 위해 일부러 욕실 문을 두들기며 지아의 목소리를 들려주려 했다.
"응? 잠깐만. 금세 나가."
지아는 그리고 내 몸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아주 정성껏.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비누칠을 하고 깨끗하게 씻겨주었다.
어쩐지 내게 묻어있는 다른 여자들의 흔적을 지우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이제 깨끗해졌다. 우리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