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18. 고압적인 여상사가 내 아래에 깔려 울부짖던 야근하던 날.
"너 앞으로 우리 학원에 오지 마."
며칠 뒤 은희가 내게 출입금지를 선언했다.
"응? 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거야?"
"하아... 너 그날 세사람이랑 했지?"
"응."
"셋 다 지금 너 엄청 두려워하고 있어."
"별로 안 좋았나?"
"그게 아니고 반대야! 바보야."
"좋았는데 출입금지야?"
"어. 무섭대 다들. 너랑 한 번만 더 그런 경험 겪으면 도저히 헤어나지 못할 거 같대."
"그래..."
"그리고 얼굴 보기도 무섭대."
"내가? 나 그렇게 질척거리는 사람 아닌데..."
조금 억울한데...
"그게 아니고 널 보면 먼저 달려들 거 같대. 풋!"
진아가 말을 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맘 나도 알지... 나도 니 얼굴 볼 때마다 막 달려들고 싶거든. 너도 알지?"
"그랬어?"
"그래. 바보야! 진짜로 친구만 아니면 너랑 인연 끊고 싶어. 나 사실 얼마나 힘든지 알아? 맨날 너한테 박히는 생각만 하고..."
"언제든지 말만 해."
"그래도 안 해. 선생님들 반응을 보니까 더 확실히 깨달았어."
"확실히 그때 너도 있었어야 하는데."
"미쳤어? 다른 선생님들이랑 같이? 죽어도 싫어."
"지아랑 같이 있던 날은 즐거웠잖아?"
"그것도 다신 안 해. 여튼 너희랑 더는 얽히기 싫어. 이제 끊자. 나 바빠."
목소리가 조금 묘해지는 것 같더니 그녀는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어쩐지 난 그녀가 지금 무얼하고 있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송아와 은지, 그리고 진아들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날 너희들 굉장했더라."
은희도 그녀들에게 그날 있었던 일에 거의 들은 듯 하다.
송아와 은지는 대충 이야기 하고 말았는데, 진아가 쫑알 쫑알 다 이야기 한 모양이다.
"참. 진아. 걔도 대단해. 난 걔까지 너랑 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남자 친구랑 사이가 엄청 좋았거든. 근데 그 깜찍한 것이. 풉!"
"남자 친구와는 어떻게 지내고 있어?"
그날 세 사람의 사기가 제대로 먹힌 건지 궁금했다.
"남자 친구랑은 전보다 사이가 좋아진 모양이야."
역시 들키지는 않은 모양이다.
하긴 진아의 연기는 꽤 대단했었다.
나라도 속을 것 같았다.
"그래도 잘 됐네. 사이가 벌어지지 않아서."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은희는 내게 떠보듯 물었다.
"응? 내가 왜?"
"진짜 나쁜 자식이다. 너."
또 나만 욕먹었다.
아무래도 은희가 하지 않은 말이 있는 기분이 든다.
"근데 어땠어? 진아랑 하니까?"
은희는 그걸 제일 궁금해했다.
"역시 어리니까 좋지?"
"다들 좋았어."
"나쁜놈."
"왜 나만..."
하지만 생각해보면 욕을 먹어도 싸다. 그래서 더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참 송아 쌤도 무섭다. 어떻게 그런 걸 시켰나 몰라. 근데 더 무서운 건 진아라니까. 그걸 어떻게 했지?"
역시 돈에 대한 것은 이야기 하지 않은 모양이다.
"송아 샘. 예전부터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굉장히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거든. "
"응. 그날 들었어."
"여튼 그 사람이랑 사귀기로 했대. 잘 됐지?"
"그러네."
그건 좀 의외였다.
상대에게 그런 것까지 보여주며 정을 뗀다 하더니.
"성호씨가 계속 애원한 모양이야. 송아 쌤도 뭐 그렇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고."
어쩌면 미안한 마음에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너무 못되게 굴었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런 꼴을 보고도 사귀자는 말을 들어 기뻤던 걸까?
언제나 그렇듯 남녀 사이의 일은 외부인으로서는 도통 짐작하기 어려운 법이다.
"은지 선생님은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이 있었는데 이젠 놓아주기로 했대."
그건 나름 대로
그날의 난장판이 그렇게 각자에게 꼭 나쁜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닌 듯 하다.
그리고 다시 한 달 쯤 지나 그녀들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진아 남자 친구랑 헤어졌다."
"왜?"
"풉! 있잖아. 그 날 이후부터 그 녀석 우리 학원에 뻔질나게 찾아왔거든. 근데 이상한 눈으로 우릴 보더라고."
아하!
그는 진아와의 통화에서 잘못된 신호를 읽은 모양이다.
"진아가 말하기를 요즘 엉뚱한 욕망이 생긴 것 같다더라. 뭔지 알겠지?"
"너희들이랑 함께 하고 싶다는 거지?"
"그니까. 혹시나 여자 친구랑 여친 동료들이랑 무슨 일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고 그렇게 얼쩡거리는 거야. 그리고 툭하면 술먹자 그러고. 근데 속셈이 너무 뻔히 들여다 보이잖아. 괜히 느끼하게 굴고, 자기 몸 자랑하고. 우리는 웃겨서 죽을 거 같은데, 진아는 한숨만 쉬고."
"하하. 남자들이란 다 그렇지 뭐."
"그래서 진아랑 몇 번 다투다가 진아가 손을 들어버린 모양이야. 걔도 지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처음엔 잘 해보려고 한 거 같은데, 남자 친구가 무슨 의자왕 노릇을 하려고 한다고. 풉!"
"왜? 잘생기고 몸도 좋다며."
"여튼 그래서 그 남자 올 때마다 은지 쌤이랑 송아 쌤이 은근 잘해주고 꼭 줄 것처럼 굴었단 말야. 참 못 됐어. 그러다가 장난이 좀 지나쳐서 그 남자 자기가 카사노바 라도 되는 줄 알고..."
"아! 송아씨하고 은지씨 좀 짓궂기는 하더라."
"그래도 진아가 너무 미안해서 어지간하면 참으려고 했는데. 결정적인 건 사실 너 때문이야. 웬지 재미가 없대. 같이 자는 게."
이건 좀 미안한 일이다.
아니. 사실 그 남자에게 벌어진 모든 비극이 나 때문인 듯 하다.
그런 엉뚱한 환상을 갖게 된 것까지도...
"여튼 그렇게 헤어지고 진아 이번에 뚱딴지 같이 송아씨 아파트로 들어갔다. 월세 일부를 자기가 부담하기로 하고. 간도 크지."
"자기도 SNS 열심히 할 생각이래. 뭐. 사실 송아씨 한테도 나쁠 거야 없지. 그렇지 않아도 부담이 많이 되었던 거 같으니까."
그날 받은 상금을 그렇게 쓰기로 한 모양이다.
나름 투자인 셈이다.
한 달에 백만 원 씩 내기로 했다니, 대략 서른 달은 그 멋진 풍경을 마음껏 쓸수 있게 된 모양이다.
"은지씨는 남자 친구랑 헤어졌어."
겨우 한 달을 채우고 결국 그리된 모양이다.
"남자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모양이야. 은지씨는 잘 됐다고 하더라.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대. 그동안 미안해서 원하는 대로 해주었던 모양이야."
결국 그날의 일은 이리저리 많은 여파를 남긴 모양이다.
그쯤 되면 내가 그녀들의 인생에 과연 얼마나 영향을 미친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삶은 언제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
그녀들은 여전히 젊고, 앞으로도 각기 많은 인연을 만들어 갈 것이다.
그러니 딱히 나 때문에 그녀들의 삶에 굴곡이 생겼다고 자책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넌 아직 우리 학원 출입 금지야. 다들 너 보고 싶어하니까."
은희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날 그녀들을 조련할 수 있는 미끼나 츄르 정도로 쓰려는 모양이다.
이 자식이 제일 무섭다니까...
그날은 업무가 꽤 많았다. 이날따라 정 팀장이 자꾸 시키는게 많아 정작 내가 해야할 일들에서 손을 놓는 일이 생겼다.
"일이 많은가 봐요? 끝나려면 멀었어요?"
퇴근하려던 문희씨가 내게 물어왔다.
"아무래도 난 오늘 잔업 확정인가봐."
"도와줘요?"
착한 문희 씨는 그냥 인사만 하고 가도 될 걸 그냥 넘기지 않는다.
"아뇨? 먼저 들어가세요. 아까 듣기로 오늘 데이트라며?"
"헤헤... 미안해서 그렇죠."
"요즘 바빠서 자주 못 본다며? 가서 재미있는 시간 보내세요. 난 오늘 여기서 혼자 죽어갈게요."
"흐엉! 우리 착한 선배 불쌍해서 어쩌나?"
"어차피 속 다보이니까 빨리 가세요."
"근데. 나 선배한테 해줄 이야기가 있는데."
문희가 얼굴을 살짝 굳히며 말했다.
"뭔데요?"
"이야기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러지 말고 속시원히 말해봐요."
"이거 절대 나한테 들었다고 어디서 말씀하시면 안 돼요."
문희는 내게 다짐을 받고서야 입을 열었다.
"사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네."
"우리 팀장님이 윤 팀장님한테 선배에 대해 좀 불만을 이야기 하더래요."
윤 팀장은 딱히 우리 팀과는 관련 없는 부서를 맡은 사람이다.
굳이 그런 사람한테까지 내 험담을 늘어놓을 이유가 있을까?
"근데 윤 팀장님 좀 말이 많잖아요?"
아! 문희의 말로는 지금 회사에 나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말인가보다.
이 여자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그리고 얼마 전에는 선배가 아주 어린 여자랑 다정하게 걷고 있다든지, 굉장히 이쁜 여자랑 술을 마시고 있다든지, 그런 이야기도 돌았고요. 이건... 좀 말하기 그런데..."
문희가 말을 흐렸다.
아무래도 내가 여자와 만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나보다.
바로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지연이나 수빈, 아니면 지아...
"괜찮아요. 말씀해주세요. 모르고 있는 거 보다는 낫잖아요."
"뭐라더라... 선배가 그렇게 어린 여자랑 같이 있는게... 꼭..."
다시 말을 줄인다.
"여튼 선배 무슨 원조 교재라거니, 누굴 협박하느니 하는 이야기도 돌고 있고..."
아니. 이 사람들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것도 팀장님이 퍼트리는 건가요?"
"아뇨. 그건 타른 팀 여직원이 목격했다고 하더라고요."
끄응... 좀 피곤하게 생겼다.
"그래서 선배 좀 조심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문희가 내게 경고를 해주었다.
그녀도 은근 마당발이라, 회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전부 꿰어차고 있다.
그렇게 말하면 아마 대부분은 사실일 테지.
"얼마전엔 정 팀장님이 누구랑 슬쩍 경력 사원 채용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들었다는 사람도 있어요."
나... 참.
대충 날 쫓아내고 새로 경력 사원을 뽑겠다는 말인가보다.
내가 모르는 곳에선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음모가 횡행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문희씨."
"고맙긴요. 난 선배가 그렇게 허튼 사람도 아니고, 이일 좋아하는 것도 아니까, 안타까워서 그래요."
"다음에 내가 꼭 보답 한 번 할게요."
"일이 잘 풀리면 기대할게요."
"참. 데이트 늦겠다. 이제 들어가야죠."
"맞다. 그럼 저 진짜 먼저 가요!"
문희 씨가 가버렸다.
휑한 사무실에 홀로 남아 아직도 한참 남은 일을 정리하며 문희가 알려준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정 팀장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으니, 그걸 그대로 둔다면, 난 꽤 불명예를 않고 쫓겨나게 생겼다.
진짜...
무슨 생각인 거야?
그때 퇴근한 줄 알았던 정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사당동 매장 인테리어 업체 발주서는 다 했어?"
그녀는 다짜고짜 험악하게 한 마디 던졌다.
"시키신 거부터 하느라 아직 못했습니다. "
"아니. 영웅씨는 일의 선후도 몰라? 일한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그따위야?"
어이 없는 일이다.
점심 시간에는 그거 급하지 않으니 다른 것부터 하라 말하더니 이제와선 타박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는 몰랐는데, 이렇게 나오는 게 전부 날 무능력한 인간으로 몰아세우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라는 거지?
그런데 도통 알 수 없는 일이다.
난 정 팀장과 딱히 척을 진 적 없는데...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꽤 잘 지내왔다.
솔직히 그녀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이는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정신을 어디 두고 사는거야? 그래서 무슨 일을 한다그래?"
정 팀장은 다시 나를 핍박한다.
꼭 무슨 끝이라도 봐야겠다는 것처럼 난리를 친다.
하. 아쉽다. 이럴 때 < 능욕형 주인공 >이 필요한데...
자꾸만 찡얼거리는 여자를 벽에 밀어 붙이고...
"그럼 그건 관 둬요. 사당동 매장 일은 내가 처리할테니. 도대체 나이는 어디로 먹고 일머리가 그렇게 없어?"
어쩐지 평소보다 짜증이 나서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팀장 살짝 움찔한다.
아. 모르겠다. 능욕형 주인공 없이 그냥 덮쳐?
그래도 뭐 후일이 크게 두렵지는 않다만...
난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설마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녀가 날 노려본다.
난 한 발자국 더 다가갔다. 이제 그녀와의 거리는 겨우 일 미터 남짓.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간다.
덮칠까? 말까?
아니. 덮치는 것은 이미 결정된 사태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시간의 문제이다.
지금 덮칠까?
아니면 < 능욕형 주인공 >이 손에 들어오고 덮칠까?
마음속에서는 귀찮은데 당장 끝내버려라고 외치고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래도 좀 더 사태 파악을 하고 나서 하자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하기는 할 거다.
"여기. 사당동 매장 발주서 작업하던 거 있습니다."
난 웃으며 서류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뭐. 뭐야! 그냥 주면 되지 왜 다가와서 그러는 건데?"
아무래도 여자다보니 내가 일어서자 조금 겁을 먹은 거 같다.
사실 내가 조용히 있어서 그렇지 인상이라도 쓰면 대개는 무서워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