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16. 복수에 몸을 맡긴 여자.
그럴만도 했다. 그녀의 가방은 아마 내가 준 돈으로 반도 사지 못할 것이다.
수빈이 걸친 옷, 가방, 시계 어느 하나 명품이 아닌 것이 없다.
그쪽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사하는 업무 덕에 나름 명품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미남이 꽤 잘 사는 집 아이라고 했는데, 이 여자는 그보다 못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나처럼 서민 가정 출신인 지연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른 태도가 이해가 갔다.
"아침 식사나 하러 갈까?"
모텔을 나와 그녀에게 물었다. 아직 출근까지는 시간이 있다.
"어제 거기부터 들러요."
수빈이 날 데려간 곳은 전날 내가 쓴 자술서를 넣어둔 코인 로커가 있는 곳이다.
"비밀번호는 43232예요."
수빈이 알려줘서 그 자술서를 회수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내게 어떤 해를 끼칠 생각은 없다해도, 찾기는 찾아야 했다.
이런 흉측한 물건 빨리 없애버리자.
그 종이 쪽지를 주머니에 넣고 나자 그녀가 말했다.
"전화 번호 알려주세요."
"어디 적어줄까?"
그녀는 어제 자신의 전화기를 부숴버렸다. 그러니까 메모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전화 번호 정도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지 않아요."
수빈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맞다. 그랬지...
얘네들은 우리랑은 조금 다른 종류의 인간들이었지...
난 전화번호를 한 번 불러주었고,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외운 모양이다.
"부탁이 있어요."
수빈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래. 말해봐."
솔직히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부탁이란 단어를 쓰면 들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 당분간 저항해 볼 생각이에요."
아까도 참아본다고 하더니, 이번엔 저항해본다 한다.
"당신이랑 계속 관계를 이어가면 아마 내 삶의 궤도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라질 거 같아요.
솔직히 그건 너무 무서워요.
그러니까 난 지금 두 가지 욕망의 한 가운데 있어요.
당신이 주는 쾌락, 그리고 내가 그려 놓은 인생을 이뤄가는 것.
둘 중 어떤 게 더 클지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정말로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쳐보고 싶어요"
"그렇다면 나도 응원해줄게."
진심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연락을 할 때까지, 날 찾지 말아줘요."
"그러지."
"될 수 있으면 연락 안 할 거예요."
수빈은 안타까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말했다.
"자신은 없지만..."
그리고 잠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마치 스스로에게 용기를 주려는 것 같았다.
"그래도 노력해 볼 거예요. 당신을 계속 만나서 그걸 또 하게 된다면... 아마도 더 이상 내가 아니게 될 거 같아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수빈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었다.
"쉽지 않을 거 같네요. 지금도 당신을 보고 있으니까 아래가 막 이상해져와요. 참. 지독하네요. 있죠. 만약에 지금 당신이 나한테 발가벗고 여기서 하자 그러면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수빈은 자신이 뱉어놓은 말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처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걸 내가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벌써부터 자신이 없어요."
수빈은 내 아래를 내려보았다.
"그러니까... 아마 다시 연락할 거 같아요. 하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만약 성공한다면 축하해 주지."
난 그녀가 느꼈던 그 쾌감이 어떤 정도인지 짐작할 수 없다.
하지만 설명으로 도박이나 마약 따위로 얻을 수 있는 쾌감을 훨씬 상회한다고 했으니, 그걸 끊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서운하네요... 벌써... 내가 그다지 필요한 건 아닌 모양이에요."
음... 그렇게 들렸나?
난 대답이 궁색해졌다.
"농담 아녜요. 조금은 말려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지독해..."
"네가 다시 연락한다면 언제라도 환영할게."
"잠깐만요."
수빈은 내 손을 이끌었다. 우리는 지하철을 나서 조금 걸어가다가 문이 열려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흑!"
수빈은 손을 스커트 안으로 집어 넣고, 다리를 들어 팬티를 벗어버렸다.
"하아..."
그녀의 팬티는 왠지 젖어있었다.
"농담이 아니구... 거기서 해달라고 할 뻔 했단 말이에요."
"정말 참을 수 있겠어?"
수빈의 욕망은 너무 컸다.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몰라요... 우선 나 좀 어떻게 해 줘요."
수빈은 스커트를 들고 엉덩이를 내게 들이밀었다.
"여기 사람이라도 올라오면 어쩌려고? 다시 모텔로 갈까?"
"거기까지 가면서 참을 자신 없어요. 어쩌면 정말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아래가... 윽!"
정말로 수빈의 음부는 완전하게 젖어 있었다.
이건 정말로 그녀 자신의 몸이 원하는 것이다.
이미 새벽 그녀가 잠든 사이 메이킹을 끝냈고, 그녀는 지금 내게 캐스팅된 여배우가 아니다.
"잠깐이라도 좋아요. 빨리..."
그래서 빨리 했다.
혹시라도 누가 이 건물로 들어오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니 스릴이 있어 더욱 좋았다.
다행히 이 건물은 지하에서 위에까지 전부 유흥업소라 이런 이른 시간에 드나드는 사람은 없어서 우리는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끝까지 갈 수 있었다.
"하아... 어제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당연하지. 설정이 적용되지 않으니까.
"그런데 욕구는 가라앉지 않네요..."
수빈이 처량하게 웃었다.
"내게 일생 일대의 도전이 될 거 같아요."
화이팅! 잘 해봐라!
하지만 이 순간 우리는 벌써 결과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스커트를 내리고 내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당신 같은 사람... 너무 싫어요."
그녀는 아직까지 손에 들고 있던 팬티를 허겁지겁 입고는 날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고 계단을 내려갔다.
난 그녀가 다시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도와주기 위해 일부러 따라가지 않았다.
천천히 바지를 올리고, 계단을 내려왔다.
낯선 건물을 나서자 아침 해가 기분 좋게 얼굴을 내려쬐고 있었다.
수빈이라는 미녀와 의도치 않은 관계를 맺은 날,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카드팩을 깠다.
이제 캐스팅 카드에 여유도 없고, 다른 특별한 카드를 손에 넣을 수 있을 지도 궁금했다.
"카드 팩 열 개."
이번에는 호기있게 일억 원을 질렀다.
무엇보다 가능하면 캐스팅 카드 < 능동적 주인공 > 이나 < 능욕형 주인공 >을 손에 넣고 싶었다.
하다 못해 <수동적 주인공 >이라도 한 장 더 있었으면 했다.
그러니까 비상시를 위한 것이다.
이번 처럼 살다 보면 어떤 상황을 마주할 수 없는 것이고, 비장의 무기는 많을 수록 좋다.
- 미정산 금액 576,593,600원이 있습니다.
안내와 함께 열 개의 카드 팩이 내 앞에 나타났다.
그걸 보고 있으니 왠지 부자가 된 기분이다.
행복한 마음으로 카드 팩을 하나씩 들어 확인해보았다.
주로 캐스팅 카드가 많이 나온다.
캐스팅 카드 < 여배우 > x 15
캐스팅 카드 < 빼앗기는 남자 > x 5
더럽게 많이 나왔다.
전에는 카드 팩 하나에서 한 장 정도 나오더니, 이젠 무조건 두 장이 기본이다.
거기에는 불만은 없다.
하지만 1억 원으로도 내가 원하는 주인공 카드가 하나도 나오지 않으면 어쩌란 말이냐?
이젠 하나 뿐인 < 수동적 주인공 >을 더욱 신중하게 쓸 수밖에 없다.
카드 팩을 확인 하는 도중 나온 마스터 카드는 언제나 그랬듯이 내가 읽고 나자 바로 사라져버렸다.
마스터 카드 < 쾌감 >
- AV마스터가 성관계 시 느끼는 쾌감을 향상시킵니다.
이거 좀 위험한데?
설명은 겨우 한 줄에 불과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쾌감의 향상이라니...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난 바로 어떤 것인지 알아차렸다.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시네마 카드를 사용해 오크로 변신해 섹스를 했을 때였다.
그때 느낀 감각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이다.
아직도 때때로 다음 번에 오크로 변신을 해서 섹스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당장 그 괴물같은 물건을 받아줄 여자를 구하는 것도 문제이고, 그렇다해도 그 강렬한 쾌감에 익숙해지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나와 섹스를 하고 난 여자들이 어째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지 엿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내게 선택의 여지라도 있지, 이건...
마스터 카드는 이게 문제이다.
내게 사용할 것인지 묻지도 않고 바로 사라져버린다.
지금까지야 딱히 불편함은 없지만, 만약 < 자존심 >이 한 번 더 나와 여기서 더 커져버린다거나, < 정액양 >이 나와 정액 양이 요구르트 병이 아니라 우유잔 수준이 되어버리면 곤란하다.
사실은 지금도 섹스를 끝내면 침대보를 갈아야 할 수준이다.
매번 모텔이든 호텔이든 나올 때마다 세탁비라고 얼마라도 한켠에 놓고 나오곤 하지만, 더 이상은 곤란하다.
그래서 마스터 카드가 나타날 때마다 두근두근 하는 심정을 어쩔 수 없다.
설정 카드는 한 장 나왔다.
설정 카드 < 게임의 규칙 >
- AV 마스터에 의해 캐스팅된 배우는 게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합니다.
- 상금의 크기에 따라 승부욕이 더욱 강해질 수 있습니다.
- 게임의 참여자들은 게임이 끝난 후 결과에 승복합니다.
이건 뭐 지금까지 나왔던 설정 카드 중에서 가장 정상적인 설명 같았다.
상금이 높아지면 누구나 승부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어떤 게임이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닐 터이고, 또 게임 결과에 승복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은가?
그러니까 이건 게임의 참여자들에게 아주 일반적인 상식을 강제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액티브 카드도 한 장.
액티브 카드 < 탐정 사무소 K >
- 현역시절 다양한 범죄를 해결해온 유능한 수사관이 운영하는 탐정 사무소입니다.
- 뒷세계에 해박하고, 기업의 어두운 면을 꿰뚫는 혜안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 당신이 당면한 문제에 적절한 솔루션을 제시할 것입니다.
- 고객님의 비밀 보장이 탐정 사무소 K의 가장 중요한 신조입니다.
- 본 서비스 이용시 합당한 비용이 청구될 수 있습니다.
- 서비스를 이용하시려면 단축 번호 112번을 선택하세요.
지난 번 < 죄수 호송인 연결 >과 비슷한 종류인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합법적으로 보인다.
합법적일까?
모르겠다.
뭐 당분간은 쓸 일이 없을 것 같으니 패스
사이트 카드도 하나 나왔다.
사이트 카드 < 블루 라군 >
- 대양 한가운데의 고립된 섬에서 특별한 시간을 보내고 싶으시다면 추천합니다.
- 문명의 이기는 찾아보기 어렵지만 자급자족에 필요한 모든 것을 손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 스릴있는 휴가를 즐기기 위한 이벤트가 준비되어있습니다.
- 섬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위험은 배우에게 실질적인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 자세한 사항은 섬 입구에 비치된 메뉴얼을 확인하세요.
- 위치 : 강남구 논현동 112-23 한울 빌딩 지하 9층
- 한올 빌딩 엘레베이터에 탑승하시고 이 카드를 사용하세요.
또 한올 빌딩이다. 수영장과 감옥, 그리고 스파 클럽이 있는 건물이다.
이번에는 지하다.
그런데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고층 빌딩 지하 9층에 섬이라니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카드로 얻은 것에서 설명과 조금이라도 다른 것은 없었으니, 글자 그대로 일 것이다?
응?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조만간 찾아가서 확인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그리고 Special!! 카드도 한 장.
Special!! 카드 < 투명인간 >
- 세상 누구도 당신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정말로 보지 못합니다. 그동안 꿈꿔왔던 모든 욕망을 마음껏 실현하세요.
- 사람들은 당신의 행동을 보지 못하고, 당신이 하는 행동에 별로 이상함을 느끼지도 않습니다.
- 감시 카메라도 당신을 피할 것입니다.
- 당신이 그들과 접촉해도 그저 조금 불편하게 느낄 뿐입니다. 어떠한 행동이라도 허용된다고 생각하세요.
지난 번 시간정지에 이은 두 번째 Special!! 카드이다.
시간정지도 무척 재미있었다.
이번에도 그럴 것 같다.
마땅한 사용처를 생각해봐야겠다.
음... 목욕탕?
바로 머리에 떠오른 것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요즘 젊은 여자들 대중 목욕탕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못볼 꼴을 볼 확률이 더 높겠지?
급할 것 없으니, 천천히 고민해보자.
그리고 나머지 다섯 장은 전부 기프트 카드이다.
아무래도 앞으로 카드팩의 대부분은 캐스팅 카드, 그리고 나머지의 상당 부분은 키프트 카드가 될 것 같다.
기프트 카드 < 즐거워지는 사탕 >
- 입에 넣으면 왠지 기분이 좋아집니다.
심플한 설명이다.
우선 보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