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7화 〉@16. 복수에 몸을 맡긴 여자.
"그런데 미남이 좋아하던 지연은 날 선택했어요."
난 가까스로 자괴감을 물리치고 다시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수빈은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미남이 그런 감정에 눈을 뜬 것은 지연이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하고 있는 광경 때문이 아니었던 거죠.
그게 아니라 내가 지연이를 쾌락의 한가운데 몰아넣는 모습에 감동했던 것 때문이었어요."
"허!"
그녀는 날 무슨 짐승, 아니 괴물을 보고 있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우리의 섹스는 조금 남달랐죠. 지연인 미남이 그때까지 한 번도 상상도 하지 못한 그런 쾌락을 느끼고 있었어요."
난 이 말이 얼마나 말도 안되게 들릴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적지 않은 여자들이 그런 쾌락을 찾아 헤메이기도 한다.
그걸 저 여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그리고 상관도 없다. 어차피 난 내 말을 증명할 수단이 있다.
"당신이... 여자랑 그 짓을 너무 잘한 나머지... 미남은 그 모습에 감탄했고... 자신은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 생각했고... 그 일을 해낸 당신에게 존경을 느꼈고..."
어이없다는 표정...
"그런 어처구니 없는 소리 난생 처음 들어봐요."
아니... 성인물에서는 흔한 전개인데...
물론 모범생은 모르겠지만...
참. 나. 내가 성인물을 현실화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 할 수도 없고...
"하아... 바보 같아. 정말 뭐야. 쓸데 없이..."
역시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솔직히 그런 말 믿는 게 바보이지.
특히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면.
"결국 뭐야. 자기가 엄청 잘한다는 소리가 하고 싶었던 것 뿐이잖아?"
수빈은 대놓고 날 비웃었다.
"확인시켜줄까요?"
난 전화기를 꺼내 번호 하나를 찾았다.
"어떻게요? 지연이란 여자 불러서 내 앞에서 섹스 쇼라도 하겠단 말인가요?
미남이 앞에서 그랬듯이?
그러면 나도 미남이처럼 감동을 받으면 되나요?"
그녀는 내 전화의 상대를 잘못 짚었다.
난 전화를 걸고, 스피커 폰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곤 신호가 가는 소리가 그녀에게 들리도록 적당히 성량을 조절했다.
몇 번 신호가 가고 상대가 받았다.
"여보세요."
"미남아. 나다. 벌써 들어갔니?"
"예. 들어왔어요. 형도 들어가셨죠?"
"아. 난 아직 밖이야. 좀 할 일이 있어서."
"바쁘신데 불러내고, 시간 빼앗어 죄송해요."
"괜찮아. 그런데 내가 생각해봤는데. 아까 그 여자분."
"네. 혹시 지금이라도 관심이 있으시면 제가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미남의 대답에 수빈의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버렸다.
아마 오늘 그녀가 들었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커다란 충격이었을 것이다.
미남은 내가 원한다면 언제라도 그녀를 내게 바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 순간 수빈은 한 인간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불과했다.
그것도 결코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남자에게.
명백하게 이 순간 그녀가 가장 미워할 대상이 정해졌다.
세상 어떤 여자가 그런 꼴을 당하고 참을 수 있을까?
수빈은 멍한 눈으로 수화기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네가 그 분에게 사과를 해야할 거 같아서.
예의가 아니었던 거 같아. 만약 니가 한 행동을 알면 얼마나 상처받겠니."
난 착한 사람.
얘가 나쁜 놈이야.
"죄송해요..."
미남이 정말로 미안해 하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이 미안해 하는 대상은 명확하게 수빈이 아니라 나였다.
이 착한 소년은 내게 미움을 받고 싶어하지 않았다.
수빈의 얼굴을 보니 그녀도 그걸 알아차린 모양이다.
그녀가 너무 이를 세게 물어 이빨이 부러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 지경이다.
"전... 수빈이도 형이랑 그렇게 자게 되면 틀림없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엔 몰라도... 어쩌면 좀 기분이 나쁠 수는 있지만요.하지만 걔도 형이랑 하면 얼마나 좋은지 금세 알 거 아녜요?
수빈이도 지연이처럼 기뻐할 거예요."
생각보다 내가 원한 단어들이 빨리 나왔다.
미남이가 적당한 말을 해줄 때까지 계속 그를 몰아붙일 생각이었는데, 다행이다.
난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있던 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전화기를 끔찍한 표정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분노?
아니. 그런 말로는 부족하다.
증오?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단어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미남의 말 어디에도 그녀에 대한 배려 따위 찾아볼 수 없었다.
섹스 한 번에 감격할 암캐.
미남의 말하고 있는 의미는 그랬다.
자신이 오랫동안 사랑하던 그 남자는 자신을 물건이나 발정난 암캐 취급하고 있었다.
이 아름다운 미녀가 분노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근데 일이 이렇게 되어서... 맞아요. 형.
내가 잘못한 거예요. 지금이라도 전화해서 사과할게요."
"그래. 내가 너무 간섭한 거 같아 미안하다."
"아뇨. 형 아니었으면 생각도 못했을 거예요. 고맙습니다. 형."
전화가 끊겼다.
난 테이블 위에 놓인 수빈의 사과폰을 켰다.
전화기에 전원이 들어오고 얼마 지니지 않아 벨이 울렸다.
화면에는 '그사람'이라는 이름이 떴다.
잠시 동안 수빈은 자신의 전화기를 노려보고 있었다.
벨이 계속 울렸다.
다음 순간 그녀는 자신의 전화기를 손에 쥐고 힘차게 벽에 던져버렸다.
콱!
그다지 크지 않은 소리와 함께 최신형 사과폰이 장엄하게 박살이 났다.
난 그녀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당신! 당신이 그렇게 잘해?
미남이가 나랑 당신이랑 섹스를 하는게 나도 좋아할 거라 생각할만큼?"
여자가 악에 바쳐 내게 물었다.
난 그저 어깨를 으쓱거려 대답을 대신했다.
"도대체 뭔데? 왜 미남이 저렇게 된 거야?"
그야 내가 캐스팅 카드 < 빼앗기는 남자 >를 썼으니까 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상식과 적절한 거짓을 마구 버무려서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아직도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면 직접 확인을 해보던가."
난 그녀에게 도전적인 말을 던졌다.
"확인? 무슨 확인...
설마? 설마 나한테 당신과 섹스를 해 보라는 거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
미남이처럼 멍청하게 사탕발림에 넘어갈 거 같아?"
그녀는 날 마구 몰아붙였다.
드디어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분노를 퍼부울 핑계가 생겼다.
"만일 그렇게 시도를 해보겠다면 당신이 원하는 걸 주지."
난 준비해 두었던 미끼를 던졌다.
"내가 원하는 게 뭔데?"
그녀가 도전적으로 물었다.
"미남이."
"뭐? 그게 무슨 병신 같은..."
수빈은 이제 그딴 거 나도 필요없어 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다.
"진술서를 써줄게.
내가 미남이랑 함께 당신을 강간할 음모를 꾸몄다는.
그리고 난 당신을 강간한 거지.
그런 경우라면 적지 않은 형을 살겠네."
여자의 얼굴이 바뀌었다.
차갑다.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차갑다.
"내용은 원하는 대로 불러도 돼.
난 그대로 써서 당신한테 줄게.
그래.
원한다면 거기에 지연을 포함시켜도 돼.
셋이 함께 공모해서 당신을 강간하려 한 거야."
달콤한 복수의 유혹!
자신을 농락하려던 미남과 눈앞의 남자, 그리고 그 여자까지 세 사람을 마음대로 옭아맬 함정.
"그걸 어떻게 사용하든 당신 마음이고."
"그런 일을 해서 당신이 얻는 건 뭐야?
내가 고발하면, 그냥 감옥에 갈텐데?"
역시 납득할 수 없겠지. 어째서 그런 걸 준다는 거야?
"뭐. 편한대로.
하지만 난 당신이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데 걸지."
난 이 미녀를 놀리듯 말했다.
"그러니까 당신말은 내가 당신과 한 번 자고나면 절대 당신을 고발하지 않을 거란 말이야?
그렇게 자신있어?
자기가 그렇게 섹스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마 평상시라면 결코 이런 도발에 넘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그녀는 오랜동안 사랑하던 남자에게 배신을 당했다.
그것도 아주 치욕스러운 방법으로.
차라리 돈이나 명예 따위의 다른 이유라면 납득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난 다시 어깨를 살짝 으쓱거렸다.
수빈이 날 노려본다. 고민한다.
진술서.
고소.
대가는 섹스.
나도 그녀를 바라보며 두근 두근 하고 있었다.
물론 두려워서가 아니라 재미있어서.
이 여자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 너무 궁금했다.
내가 내건 조건이 반드시 먹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분노의 크기를 보면 먹히지 않을 것도 없다.
당장 눈앞에 미남이 있다면 씹어먹을 것 같은 표정이다.
아니.
그건 아니다.
막상 당사자가 앞에 있다면 또 달라질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거니까.
정말이다.
만약 미남이 옆에 있으면서 나와의 동침을 권유했다면 어찌 되었을 지도 모른디.
어쩌면 자포자기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도 있다.
사람의 감정은 섯불린 판단을 내릴 수 없다.
항상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다.
이 여자가 어떤 판단을 내릴지 난 조금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저 적당한 미끼를 건내고 반응을 살핀다.
내가 이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히 내게 캐스팅 카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내 앞에 나타난 순간부터 결론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난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 생각이다.
이 여자는 골치덩어리다.
그냥 보내면 문제가 될 소지가 아주 다분한 여자이다.
수빈은 내게 원한을 가지고 있다.
그건 지난 번 아직 캐스팅 카드 < 빼앗기는 남자 >를 사용하기 전 미남이 내게 가지고 있던 적대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미남처럼 순진한 아이도 아니다.
원한을 갚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손을 더럽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반드시 내게 무슨 짓을 저지를 것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가능성은 아주 농후했다.
그러니까 처분해야만 했다.
사실 미남이 앞에서 그녀를 돌려보낸 것을 조금은 후회도 했었고.
물론 캐스팅 카드 < 수동적 주인공 >을 당장 사용하면 이런 음모를 꾸밀 필요도 없다.
그냥 끌고 어딘가 적당한 곳으로 가면 그만이다.
하지만 난 이 장난이 재미있었다.
그녀가 분노하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 좋았다.
판이 깨지면 그때가서 캐스팅 카드를 사용하면 그만이다.
시간이 흘러갔다.
수빈은 묵묵히 날 노려보고 있었다.
이성과 감정의 싸움일까?
아니면 다음 수를 계산하고 있는 걸까?
난 그녀를 잘 모르고, 그녀의 생각을 하나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즐겁다.
이 아름다운 여인이 어떤 선택을 할지 전혀 알지 못하니까 긴장이 되고 재미있는 것이다.
"받아써."
한참만에 그녀가 말했다.
협상이 타결되었다.
수빈은 무척 꼼꼼한 여자였다.
그녀는 내게 무려 네 장의 자술서를 쓰게 했다.
한 장은 나 혼자서 범죄를 저질렀다는 내용.
한 장은 나와 미남이 공모해서.
단 주범은 나였고, 미남은 종범이다.
한 장은 지연이 주범이고 나와 미남이 종범이다.
마지막 한 장은 지연과 내가 공모하고, 미남을 속여 일을 저질렀다.
그러니까 그녀는 우리 세 사람 중 원하는 사람을 자신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무기를 손에 넣었다.
자술서를 쓰고, 사인을 하고, 펜의 잉크를 묻혀 지문을 찍었다.
법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
무슨 과라고 했지?
경제학과?
그런것치고 자술서 따위 어떻게 쓰면 좋을지 금세 생각해낸다.
뭐. 머리가 좋으면 그런 걸까?
딱 한가지 자술서에 나온 범행 날자와 범행 장소, 그리고 작성일자는 내 주장을 따랐다.
범행이 이루어진 것은 앞으로 두 시간 뒤, 장소는 내가 지정한 모텔.
그리고 자술서를 작성한 날자는 내일이다.
자술서는 그녀가 챙겼다.
이제 그녀의 복수를 위해 필요한 것은 거의 갖춰졌다.
딱 한 가지만 남았다.
바로 강간의 증거.
우리는 함께 지하철역으로 가서, 보관함에 그 자술서를 넣어두었다.
다시 꺼내기 위한 비밀 번호는 그녀 혼자만이 알고 있다.
뭐 아무려면 어떠랴. 난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는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기 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자술서에 적힌 모텔로 들어갔다.
적어도 그녀가 그곳에 들어간 사실은 증명해야 강간 사건이 확정된다.
이제 드디어 두 사람만 있게 되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약속을 취소하고 진술서를 지니고 나가버린다면?
물론 그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