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16. 복수에 몸을 맡긴 여자.
솔직히 상상도 가지 않는다. 저런 여자는 남자들이 쫓아야지, 남자를 쫓아다니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근데 얼마 전에 미남이가 받아주더라구요. 정말 살면서 제일 기뻤어요."
수빈이란 여자는 그러고도 미남이의 칭찬을 한참 했다.
학교에서도 여자들이 미남한테 반한 애들이 한둘이 아니란다.
하기는 그런 명문대학교에서 미남 같은 얼굴 보기 쉽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집안도 상류층이고...
녀석을 좋아하는 여자가 한트럭이 넘는다고 해도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참... 너 가서 커피 우유 좀 사와."
문득 미남이 여자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이런 자리에서 딱히 필요할 것 같지도 않은 커피 우유를 왜?
하지만 여자는 아무런 거부감 없이 미남이의 심부름을 한다고 나가버렸다.
"그래. 잘 됐네. 잘 어울린다."
난 미남에게 덕담을 해 주었다.
뭐. 미남이가 지연에게 받은 상처로 힘들어하지 않는다니, 마음이 조금 놓였다.
"수빈이 이쁘죠?"
미남이 웃으며 말했다.
"응. 굉장한 미인이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형은?"
갑자기 미남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응? 뭘 어떻게 생각해."
"수빈이 말이에요."
그런데 이녀석 왜 이렇게 무서운 눈빛을 하고 있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니?"
"저 사실은요... 그날 이후에 말이에요."
"응."
난 그 녀석이 지연과의 일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중에 곰곰히 생각을 해 봤거든요."
"그래."
스스로가 생각해도 좀 이상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갖는 모습을 보며 흥분하고 좋아할 수는 없다.
더군다나 이놈은 수재라고 불릴만큼 대단한 학교를 다니고 있는 놈이다.
"제가 그런 성향이 있었나 봐요."
그걸 알아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겠지.
"네토... 인 거 같아요. 참! 형도 아시죠?"
그 말을 꺼낼 때 녀석의 눈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알 것 같다. 녀석의 지금 감정을. 욕망, 갈망...
무언가를 깊숙하게 원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종류인 것 같네."
"맞아요. 솔직히 나 살면서 그렇게 흥분해보기는 처음이었어요. 그러니까... 지연이를 그동안 좋아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경험이에요.
그런데 있잖아요. 생각해보면 지연이한테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 걔가 날 사랑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을 때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날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생각을 해보고 깨달았죠.
그러니까 난 내가 가진 애정을 충족하지 못해야 하는 것 같아요. 원래부터 난 그런 사람이었던 거죠."
아냐... 너 원래 그런 사람 아냐.
미남의 말은 일견 논리적인 것 같으면서도 허술했다.
하지만 그가 지금 말한 것 말고는 달리 이해가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다.
"넌... 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빼앗기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고 생각하는 거지?"
"맞아요. 역시 형은 금세 알아주시는 군요."
"그럼 설마... 오늘 네 여자 친구랑 나온 것도 그런 거야?"
"형한테 미리 상의를 드렸어야 하는 건 아는데..."
미남은 정말로 미안한 듯 고개를 숙였다.
"사실은 형을 조금 놀라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이녀석... 문제가 있다.
원래가 이런 녀석은 아니었을 텐데.
캐스팅 카드 < 빼앗기는 남자 >의 부작용인가?
굴종이란 이런 거였나?
단순히 날 좋게 생각하고, 내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좋아한다는 여자를 내게 바치고 싶을 만큼.
당황했다.
이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사태이다.
"그래도 꽤 이쁘죠? 생긴 건 지연이 보다 더 이쁜 건 사실이잖아요?"
미남은 내게 선물이라고 자신이 사냥한 것을 들고와 이뻐해달라고 꼬리치는 고양이 같았다.
그러니까 이 녀석은 진심으로 자신의 행동에 자신이 있었다.
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까?
이 미친 놈을...
"수빈이라고 했지?"
"예! 마음에 드세요?"
"응... 그게 아니고... 원래 널 따라다녔다고?"
"예. 좀 됐어요. 근데 저 원래 지연이만 좋아했었... 아! 지금은 아녜요. 지연인 형 거구요. 절대 그런 생각은 안 해요."
"그건 아무 상관 없어.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는 각자의 감정이잖아? 내가 그것까지 막을 수는 없는 거지."
"역시 형은 큰 사람이에요."
"아니... 그게 아니고. 여하튼 너 그럼 수빈이 좋아서 사귄 것은 아니란 말이네."
"좋은 아이에요. 성격도 좋고, 미인이고, 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어요. 집안도 훌륭하고요."
미남은 자신을 사랑한다는 여자를 마치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품평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너 저 여자 사랑하는 거 아니지?"
"네. 뭐 나쁘지는 않은데, 아직 사랑까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면 그 여자랑 나랑 무슨 관계가 생겨도, 그건 제대로 된 네토가 아니지."
"어... 음... 그런가?"
미남이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봐. 너 그때 지연이 무척 사랑했지?"
"네. 제 목숨보다 더요."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를 나같은 놈한테 빼앗길 때, 기분이 어땠어?"
"죽고 싶었어요."
미남의 눈이 희번뜩였다. 어마! 무서워라. 눈빛 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겠다.
"그런데 지연이가 내 밑에서 울부짖을 때는?"
"미칠 것 같았어요. 세상이 끝난 거 같구요. 그러다가... 아! 맞아요. 형 말이 맞아요. 사랑이 먼저였어요."
"그래. 다행이다. 네가 깨달을 줄 알았다."
"그러니까 제가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와 형님이 어떤 관계가 되는 아무 의미도 없는 거였어요."
"그래. 그런 관계라면 그저 훔쳐보기 정도의 느낌이겠지."
"맞아요. 형님이 아니었으면 전..."
솔직하게 말해 수빈이라는 여자는 내게 스트라이크 존의 한가운데였다.
세상 어느 남자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무척이나 아름답고, 발랄한 여자이다.
만일 지금 이런 상황이 아니라면 오히려 내가 원했을 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녀를 손에 넣으려 했겠지.
하지만 지금 난 살짝 불편했다.
미남은 마치 채홍사처럼 여자를 꼬셔와서 떠넘기고 있다.
이건 내 미학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난 내가 원하는 여자를 내가 선택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는 쪽이 훨씬 좋다.
물론 이 순간이 지나면 후회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그때 가서 방법을 간구하면 된다.
무엇보다 지금 이 녀석에게 이걸 받으면 뒷일이 골치아프다.
이녀석 아무 생각 없는 고양이처럼 여기저기서 여자를 물어와 내게 바칠 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름의 재미는 있을 지 모른다.
하지만 난 내 컨트롤을 벗어난 상황이 우려되었다.
아무래도 미남과는 좀 더 진지한 대화가 필요할 거 같았다.
"더군다나 그건 너 혼자만의 생각이지. 수빈이 네 생각처럼 나와 하려고 할 거 같아?"
"그래도 형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미남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뭐냐? 그 말도 안 되는 신뢰는?
이 녀석은 정말로 내가 손만 뻗으면 어느 여자라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자기가 쉽다고 남도 쉽다 생각하는 거야?
하여튼 가진 놈들은 서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니까...
"진짜 네토가 아니야... 맞아. 내가 진짜로 멍청했어"
"무슨 얘기 하고들 계셨어요?"
그때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수빈이 커피 우유를 들고 웃으며 서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웃음이 살짝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착각일까?
"수빈아. 우리 잠깐 얘기 좀 하자."
갑자기 미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황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얼마 뒤에 돌아온 미남은 혼자였다.
그리고 어쩐 일인지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수빈이는?"
"보냈어요. 제가 잘못 생각한 거 같아요. 형 덕분이에요"
"그래? 그냥 보내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네?"
"네. 우리 사이의 관계는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걜 정말로 사랑할 자신은 없어서요."
뭐. 정확히 내가 원한 결말은 아니지만, 우선은 이정도에서 수습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뭐. 또 그렇게 가버리니 아쉽네.
내 평생 직접 만나본 여자 중에서는 제일 이뻤는데...
우리는 얼마 동안 앉아 술을 마셨다. 대충 미남의 새로운 성향에 대해서이다.
난 녀석이 성급하게 일을 저지르지 않는 것을 원했고, 미남도 스스로에 대해 다시 고찰을 해보기로 했다.
여하튼 이 녀석이 내 손에 들어온 것은 맞는 듯 하다.
수빈이란 미녀를 놓친 것은 아쉽지만, 그렇다고 이녀석 생각대로 그녀가 미남이 시킨다고 나와 잠을 잘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늘도 형한테 배운 게 많았습니다."
"아니. 뭐... 그래 오늘 즐거웠다. 들어가 봐라."
조금은 어이없어 하면서 난 미남을 보내고 돌아섰다.
그때 누군가가 날 불렀다.
"저기요."
"넹?"
내게 말을 걸어온 사람은 여자였다. 그 여자. 미남이 데려왔던 그 미녀.
"잠깐만 저랑 얘기 좀 하실 수 있어요?"
"제가요? 왜요?"
왠지 무서웠다. 그녀의 눈빛이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연이를 빼앗긴 미남이의 눈빛과 비슷했다.
설마 미남이가 차버린 걸 나 때문이라 생각한 거야?
그래서 나한테 해꼬지를?
무서웠다.
남자가 여자를 무서워할게 뭐가 있냐고?
있다.
있지 왜 없냐?
여자라도 칼을 들면 남자가 당해낼 수 없고, 요즘이라면 잠깐 자리를 같이하고 경찰서에 전화 한 번 하는 것 만으로 인생을 날려버릴 수 있다.
그녀가 나한테 엉덩이라도 만져졌다고 주장한다면?
아니. 좀 더 디테일하게 꾸며서.
남자 친구랑 헤어졌는데, 저 남자가 위로해준다고, 이야기나 하자고 꼬셔서 어쩌구...
경찰이든 검찰이든 좋은 대학을 다니는 착실한 여자의 말을 믿을까?
험상궂게 생긴 남자의 말을 믿을까?
이미 신뢰도의 면에서 시작도 하기 전에 게임이 끝이 나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적색 경고! 적색 경고!
지금 저 여자와 가까이 하는 것은 위험하다.
아니! 지금 난 벌써 위험에 빠져있다.
그녀가 내게 원한을 품었다면, 난 이미 죽은 목숨이다.
어쩌지?
캐스팅 카드라도 써야 하나?
그때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까 미남이가 하던 말 들었어요. 네토? 그거 네토라레 맞죠?"
"허걱!"
아니. 그걸 어쩌다가?
"미남이가 나랑 헤어지겠다고 한 뒤에 밖에 나와서 무슨 말인지 찾아봤어요. 허!"
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 여자 친구를 남에게 빼앗기고 좋아하는 변태적 취향이더군요. 맞나요?"
"넹?"
난 무슨 말인지 모르는 척해야 했다. 너무 당황해서 머리가 굳어졌다. 어쩌다가 그런걸 들켰을까?
"대충 이해하기로는 미남이 당신한테 날 빼앗기고 싶어한 거죠? 그래서 날 데리고 나온 거고. 나한테 당신 자랑을 잔뜩하고? 당신이 나랑... 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여자는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 그녀의 분노가 순수하게 이해가 되었다.
"도대체 미남이 나한테 왜 그러는 건가요?"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하지만 그녀의 면전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납득을 시켜주세요.
그렇지 않으면... 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르겠어요."
여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그녀는 지금 비극의 주인공이다.
명백하게 사랑하던 사람에게 완전히 배신 당했다.
그것도 차라리 돈 따위라면 몰라도, 한갓 변태적인 욕망 때문에...
"그럼 어디 가서 설명... 아니. 그냥 내가 아는 이야기를 말해드리죠."
난 차분하게 그녀에게 말했다.
"좋아요. 아무데라도 가요."
바로 앞에 보이는 카페로 들어갔다. 제일 조용한 자리를 찾았다.
커피를 시키고 잠시 우리는 대화를 시작하지 못하고, 잠시 앉아만 있었다. 그녀는 내 설명을 기다렸고, 난 어떻게 설명해줘야 할지 생각을 가다듬어야 했다.
"수빈 씨라고 했죠?"
"네."
그녀가 건조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나 같은 사람에게 이름 따위 불려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표정이었다.
"미남이한테 좋아하던 여자친구가 있던 거 알고 있나요?"
"네. 지연이요. 한 번 본 적 있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여자가 지연이를 본 적 있다고? 미남이란 녀석 어지간하구나.
"미남이는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남자에요. 지금까지 여러 남자들이 나 좋다고 했는데, 한 번도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런데 미남이는 달랐어요.
나 처음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저 남자랑 사귀고 싶다고.
근데 걔는 아니더라구요.
내가 나이가 더 많아서 그러냐 그랬더니 그건 상관 없대요."
수빈은 미남과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그녀가 더 연상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