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15. 약혼녀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물어보지 말까?"
"하아... 진짜로. 여튼 대답은 하는데. 학!"
지아는 보라와는 전혀 다른 여자이다.
보라는 다른 사람에게는 냉정하고 싸가지 없어보였지만, 자신의 남편에게는 충실하려 노력하는 여자였다.
하지만 지아는 오히려 반대 쪽에 서있다.
주변 많은 사람들에게 친절하지만, 막상 자신의 결혼 상대가 될 남자에게는 부도덕하다.
"요즘 이상하게 전보다 잘 해주는 거 같아. 그사람.
결혼식이 다가와서 그러는 걸까? 으윽!"
재미있는 일이다. 자신과 결혼할 여자를 의심하고 있으면서 전보다 잘해주고 있다라...
문득 미남이의 경우가 머리에 떠올랐다.
녀석은 지연과 내가 관계를 갖는 장면을 지켜보며 이상한 성욕에 눈을 떴었다.
이 남자도 그런 걸까?
그렇게 생각하기는 어렵다.
비록 내가 캐스팅 카드 < 빼앗기는 남자 >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아직 그 남자에게 대단한 굴욕을 주지는 않은 것이 아니지 않나?
아니다.
생각해보면 지난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남자는 지아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 남자에게 충분히 굴욕적인 상황이 맞을 것이다.
아직 그 남자에 대해 아무런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야. 그만큼 성과를 내는 사람이기도 하고. 그런데 밑에 사람들은 꽤 고달프지. 처음엔 나도 굉장히 힘들었어."
지아에게 들은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들을 머리에 떠올려보았다.
머리 좋고, 일에 철저하고, 아랫 사람들에게 그다지 관용을 배풀줄 모르는 사람이다.
유일하게 지아에게만은 너그럽다고 했다.
물론 그랬으니 결혼을 생각했겠지.
취미는 레코드 판을 모으는 것. 오늘도 귀한 레코드를 사러 간다고 지방엘 내려갔다고 한다.
"이제 그만. 재미 없게."
지아는 섹스를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에 조금은 죄책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하아! 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죄책감 때문에 더욱 커다란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지아의 휴대폰이다.
"그사람이야."
스마트 폰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을 보고 그녀가 굳어진 얼굴로 말했다.
잠시 고민하던 지아는 곧 휴대폰에서 고개를 돌렸다.
지금 그 남자와 통화를 하기에는 몸의 상태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받아봐."
"왜?"
"너 이러고 있을 때 전화하는 거 보기 좋아."
내 말에 지아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못됐어."
"응. 알아."
"여보세요. 예."
지아는 평소의 모습이 되어 전화를 받았다.
"가셨던 일은 잘 되셨어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하면서 지아는 엉덩이를 움직였다.
역시 그녀도 이 스릴을 즐기고 있었다.
"맞아요. 예. 지금 친구랑 함께 있어요."
지아는 친구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날 보고 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 다음엔 당신 말대로 그 사람 한 번 만날까 봐요. 호호."
그녀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이 나를 지칭하는 단어라는 것을 난 알고 있다.
그녀와 섹스를 하며 동시에 액티브 카드 < 모니터 >로 계속해서 남자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게요. 당신이 그렇게 너그러운 사람이란 거 왜 아직까지 몰랐을까요?"
그 남자는 평범한 대화 속에 거듭해서 함정을 깔아두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그래서 오늘 산 레코드는 찾으시던 거였어요?"
지아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살짝 톤이 높아져있었다.
그녀의 얼굴도 꽤 상기되어 있었다.
느끼고 있었다.
다른 남자의 자지를 안에 넣고 약혼자와 전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꽤 자극적인 모양이다.
"하아!"
지아는 전화기의 마이크를 손으로 막고 한숨을 내뱉었다.
점차 고조되어가는 기분을 참기 어려운 모양이다.
난 그녀의 허리를 잡고, 살짝 들어올려 지아의 몸을 거칠게 찔렀다.
"아!"
지아는 살짝 눈가를 찌푸리며 소리가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리곤 입을 살짝 벌리고 쾌감을 표시했다.
즐거워하고 있었다.
내가 다시 몸을 움직이려하자, 그녀는 얼굴을 무섭게 하고, 손으로 내 몸을 눌렀다. 좀 더 거칠게 하면 견디기 어렵다는 신호였다.
난 그녀의 손길을 무시하고 내멋대로 행동했다.
지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요. 괜찮아요. 지금 재미있게 놀고 있어요."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튀어나오게 하기에는 모자란 모양이다.
그래서 좀 더 열심히 움직였다.
퍽! 퍽!
이런... 살과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자 그녀가 내 위에서 몸을 빼버렸다.
내게 주먹을 들어보이며 두고보자는 표정을 했다.
지아는 침대에서 내려가 거실 한쪽으로 물러섰다. 내 장난에 더이상 놀아나지 않겠다는 생각인 거지.
남자는 통화를 하는 동안 한시도 모텔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이 모텔로 들어온 것은 알았지만, 어느 호실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모텔의 창문이 열리는 일은 거의 없는데 헛된 노력이다.
굳이 이쪽에서 열어주지 않는 이상 말이다.
문득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뒤에는 바로 창문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의 팔을 잡고 창가로 갔다.
지아가 다시 화난 표정을 했다.
그녀의 귀여운 협박을 무시하고, 창문을 열었다.
드르륵! 드르륵!
지아의 몸을 창가에 몰아넣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되어 창밖을 내다보며 뒤로 돌았다.
난 그녀의 뒤로 가서 삽입을 했다.
여전히 그녀의 몸은 뜨거웠다.
"하아..."
지아는 두 손으로 휴대폰의 마이크를 막고 나즈막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이런 체위를 좋아했었다.
"나빠!"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며 화난 표정을 지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열락의 표정이 훨씬 더 역력했다.
"알았어요. 그러면 들어가셔서 전화 주세요."
마침내 전화가 끝났다.
"정말 무슨 생각... 학!"
지아는 내게 항의를 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쾌락을 원하고 있었다.
"나빠... 흐읍!"
난 그녀의 뒤에서, 그녀가 좋아하는 곳을 공략했다.
"학! 하악! 아아..."
지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쾌락에 휩싸여 있었다.
남자는 통화의 도중 3층의 한 방에서 창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마침 전화기의 저편에서도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한 여자의 얼굴이 그곳에 나온 것도 보았다.
그녀일까?
그가 차를 세워놓은 곳은 조금 떨어져 있어서, 얼굴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모텔 밖은 이미 어두워진 뒤라, 그림자 때문에 더더욱 구별이 어렵다.
그러니까 확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하필이면 다른 방의 창문이 열리고 동시에 전화기에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올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러니까... 적어도 90%의 확률로 그녀가 맞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일까?
남자는 의문을 갖는다. 내가 따라온 것을 알고 있는 걸까?
확인을 하려고?
하지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그냥 재미를 보려는 것 같다. 여자의 뒤편으로 언뜻 남자의 그림자가 보였다.
여자의 머리가 리드미컬하게 흔들린다.
의심의 여지도 없이 그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이상 전화를 계속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하아... 하아... 진짜 뭐야! 정말로 나빠. 일부러 그런 거지?"
격렬한 섹스가 끝나고 지아가 뾰루퉁해서 내게 물었다.
"응."
"그러면 재미있어?"
"네가 좋아하니까."
"뭐라고?"
"내가 모를 줄 알고? 너 즐기고 있었잖아. 사실은."
"진짜! 어쩜 그렇게 못됐어?"
지아는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너 원래 스릴을 좋아했었잖아."
지아는 나보다 훨씬 더 모험심이 있고, 활동적인 사람이었다.
우리 두 사람이 함께였던 시절, 때때로 그녀가 더 남자답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놀이 동산엘 가도 그녀는 제일 위험해보이는 기구를 탔다.
집라인, 번지점프, 패러글라이드... 모두 그녀 때문에 해봤다.
우리가 강릉으로 가는 심야 고속 버스 제일 뒷자리에서 섹스를 한 것도 그녀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맞아. 나 그런 여자야. 흥!"
지아가 마침내 자신을 인정했다.
"근데 정말로 죄책감이 든단 말이야. 다음엔 그러지 말아."
지아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정말로 그런 감정이 맞는 것 같다.
욕망에 몸을 실고 질주를 하는 여자이지만, 한편으로 상식마저 버리지는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나와의 관계에 가책을 받고 있었고, 한편으로 그 위험한 쾌락을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는 지아가 난 너무 마음에 든다.
"우리 씻고 뭐 좀 먹자."
우리는 적당한 음식을 주문하고, 샤워를 했다.
한참 동안 욕실에서 장난을 치고 나오자, 음식이 도착했다.
"나... 진짜로..."
밥을 먹으며 그녀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무언가 고민이 되는 모양이다.
"말해. 괜찮아."
"자기랑 요즘 만나면서 굉장히 행복해."
지아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계속은 못할 거 같아."
"응."
난 그녀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와의 놀이가 무척이나 즐거웠지만, 싫다는 것을 억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로 늪 같아... 당신."
"그거 굉장히 좋은 표현이지?"
"못됐어. 능글맞고. 위험해."
그런 것 같다.
"진짜로 내가 알던 그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어."
"그래?"
"응. 절대로 같은 사람은 아냐. 예전에 그 사람은 굉장히 착하고 따뜻했는데..."
그랬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랑한 사람은 2년 전의 오빠야. 지금의 당신이 아니고."
난 묵묵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었다.
"당신이 예전의 그사람이었다면... 아마 나 굉장히 흔들렸을 거야. 그사람한테 다시 돌아가고 싶어졌겠지.
근데 지금은 아냐. 같이 평생을 함께 하고싶은 사람은 절대 아냐."
나에 대한 그녀의 판단은 무척이나 냉정했다.
하지만 나도 그녀의 말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을 평생의 반려자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니까... 나 놓아줘."
힘겹게 지아가 자신의 요구를 꺼냈다.
"원한다면."
진심이었다. 그녀가 원한다면.
"안 잡아?"
"말했잖아. 네가 원한다면이라고."
"뭐야? 내가 자기랑 헤어질 용기가 없을 거라 생각하나 보네?"
지아가 다시 뾰루퉁하게 말했다.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았어.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해줄 생각이니까."
"풋!"
그녀는 한참을 웃었다.
"나. 얼마전에 은희 언니 만났다."
응? 그건 조금 놀라웠다.
둘이서 왜?
나와 잠자리를 함께 한 여자 둘이 만나 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을 걸 생각하니 조금 등이 간지러워졌다.
"은희 언니한테 물어봤어. 너랑 잤냐고. 그랬더니 얼굴이 빨게지면서 나한테 사과하더라."
사과할 일일까?
잘 모르겠다. 뭐... 나름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니까.
"그래서 나도 얘기했어. 자기랑 다시 만났다고. 그랬더니 은희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라. 어쩐지 그럴 거 같더라고.
나한테 그러더라. 결혼식이 다가오니까 그 섹스가 머리에 떠올라서 그랬지? 하고 말이야."
조금은 씁쓸했다.
내게 연락을 한 이유가 나에 대한 추억보다 나와의 섹스였다니...
한편으로는 뿌듯하기도 한데...
"그래서 둘이 오빠랑 있었던 일들을 한참 했거든. 근데 은희 언니가 그러더라고. 자긴 절대 오빠랑 다신 안 할 거라고. 늪이래."
이런...
영악한 여자들 둘이서 비슷한 생각들을 했구나.
"그래서 결정한 거야?"
"아니... 사실은 지난번에 거기 갔을 때 생각했어. 정말... 끝내주게 좋았거든."
"그래?"
"응. 무슨 약이라도 한 거 같았어. 그래서 깨달았지. 당신이랑 함께하다가는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겠구나..."
"그럼 오늘이 마지막?"
"아니. 결혼하기 전까지만..."
지아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니까 오늘은 즐겁게 보내. 맞다. 조금 있다 선물도 하나 준비했어."
지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흠... 무슨 선물일까? 무척 궁금한데?
그런데...
저 남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남자는 지금 차에 창문을 올려보고 있지는 않다.
얼마전에 차에서 내려, 모텔 카운터로 가서 방을 하나 요구했다.
남자는 카운터의 직원에게 5만 원 짜리를 더 찔러주며 303호를 요구했다.
물론 303호는 우리가 놀고 있는 302호의 바로 옆방이다.
"그런데 결혼할 사람 말야. 혹시 성격이 난폭하거나 하지는 않아?"
난 문득 한 가지가 생각나 지아에게 물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