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화 〉@13. 판타지의 꽃은 오크?
그런데 그녀가 목에 걸고 있는 판자에 적혀있는 가격은 겨우 999츄르?
어째서일까?
얼굴의 한쪽에 길게 나있는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몸의 여기저기 드러난 부상의 자국들 때문?
그것도 아니라면 아랫배에 큼직하게 세겨진 문신 때문일까?
하지만 오크들은 여자 몸의 상처나 문신 따위 좆도 신경 안 쓴다.
건강한 게 최고. 그리고 이쁜 건 덤.
모든게 단순한 놈들이라, 여자를 보는 눈도 천편일률적이다.
그러니 이 아름다운 다크 엘프의 몸에 가득한 흉과 상처의 흔적 따위 가격에 하등의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
"이 암컷은 왜 이렇게 싼 거지?"
궁금증을 풀려면 파는 놈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난 그녀 곁에서 빈둥거리고 있는 점원에게 물었다.
"저거 보이슈? 배에 그려진 문신."
키가 내 허리에도 채 미치지 못하는 녹색 피부의 이종족 사내가 심드렁히 대답했다. 마치 팔 생각조차 없다는 태도였다.
"근데?"
"그거 금제가 걸렸다는 증거요."
"무슨 금제?"
"불임."
아! 그 한 마디로 명백해졌다. 저 엘프 여인은 아무리 대단한 미모를 갖고 있다해도, 오크들에게는 쓰레기나 다름없다.
공짜로 한두 번 한다면 몰라도, 돈을 지불하면서까지 데려다가 부양할 육노예로 삼는 것은 말도 안 된다.
그리고 점원은 벌써 내게 신경을 꺼버렸다.
오크라면 그런 하자품을 살 리 없다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면 더 비싸게 팔 수 있지 않나?"
궁금한 건 못참는다.
"우리 상단은 우르크마니스탄에서만 영업을 하죠. 더군다나 저거 지금까지 문제를 꽤나 일으켜서 사실 팔기도 그래요."
"문제?"
"사간 주인을 패서 반쯤 죽여놓는다거나, 자지를 이빨로 물어뜯어버린다거나. 저 몸에 난 상처들 태반이 그때문이라오."
하자품도 보통 하자가 아니다.
어쩐지 다른 여자 노예들과 달리 손과 발이 굵은 쇠사슬로 묶여있고, 입에 재갈까지 물려놨다 싶더니, 흉폭한 여자였던 모양이다.
"폐기 처분이라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더 데리고 다니면서 밥만 축내는 꼴을 더 봐야할지 고민이라우."
아무래도 그 다크 엘프 여자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그럼 나한테 넘겨."
"응?"
고블린 사내는 별꼴을 다본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미쳤수?"
고블린 상인이 그렇게 말 할 정도면, 오크가 저 여자에 관심을 갖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인지 알 수 있었다.
놈들의 머릿속엔 온통 사냥, 싸움, 번식 뿐이다.
"팔리지도 않을 걸 뭐하러 계속 가지고 다녔던 건가?"
"가끔은 다른 종족도 노예를 구입하곤 하길래 그런 거죠. 근데 정말로 사갈거요?"
"그래. 하지만 돈이 이거 뿐이다."
난 주머니에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을 꺼내놓았다.
"어디보자... 하나.. 둘.. 623츄르... 하아... 이거 그 가격에 넘기면 내가 욕먹는데... 우리 주인님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
"내 알바 아니지. 어차피 니 말로도 밥만 축낸다고 하지 않았더냐?"
"알겠수. 어차피 안 팔고 둬봤자, 얼마 못가 폐기 처분이나 당하겠지."
의외로 그 고블린은 다크 엘프에게 측은한 심정을 지니고 있었던 모양이다.
별다른 실랑이 없이 내가 건내준 돈을 받고, 다크 엘프 미녀의 소유권을 내게 넘겼다.
"근데 조심하우. 보통 거센 게 아니니까."
"그래. 조심하지."
난 상처 투성이 미녀 다크 엘프를 어깨에 들쳐매었다.
여자는 마음에 안드는지 마구 몸을 흔들며 분노를 표시했다.
그나마 손을 뒤로 묶어놓았고, 입에는 재갈을 물려 놓아 깨물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다.
꽤 키가 큰 여자인데 그리 무게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오크의 몸이란 것이 피지컬은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성큼성큼 기쁜 마음을 금치 못하고 가뿐하게 발을 내딛었다.
정말 얼마만에 여자를 안을 수 있는 거야?
그런데 스쳐지나가는 오크들이 웃으며 날 보고 한 마디씩 한다.
대충 저녀석 또 미친 짓을 하네.
덜 떨어진 놈이 쓰레기를 샀어.
뭐 그럼 말들이다.
이새끼들은 뒷다마 같은 거 없다.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으면 당사자가 바로 앞에 있어도 우선 내뱉고 본다.
내가 여기서 바보 취급을 당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누구한테건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마을 족장의 큰아들인 망고드 앞에서도 말을 가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기 욕하는 소리를 듣고 웃어넘길만큼 대인배도 아니다.
말 몇 마디가 오가기 전에 주먹이 날라간다.
그러다보니 하루 종일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그나마 어지간해서는 도끼까지는 사용하지 않는게 다행이랄까?
그래도 지네들끼리의 싸움으로 많이들 다치더라.
사망 사고도 종종 난다는 것 같다.
그런 일이 생겨도 재판 같은 거 없다.
죽은 놈이 병신이다.
그러니까 확실히 말해 이놈들은 그냥 짐승들이다.
"어이. 테미르 바스."
그때 날 발견하고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남자가 있었다.
"아아. 망고드."
족장의 아들이자, 실제적으로 지금 종족을 이끄는 남자 망고드였다.
오크들은 인간 남성에 비해 월등하게 키가 컸다.
대략 2m정도가 평균 신장일 듯 하다.
그리고 망고드는 그런 오크들 가운데서도 발군으로 키가 컸다.
아마 이 마을에서 두 번째로 키가 큰 오크일 것이다.
물론 키와 덩치가 가장 좋은 오크는 바로 나다.
내 코스튬인 오크 테미르 바스는 망고드에 비해서도 주먹 하나 정도 더 키가 컸다.
덕분에 난 이 오크 마을의 모든 주민들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생긴 것 만으로는 내가 돌격 대장 쯤 해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아마도 시네마틱 카드의 세계에서 내가 주인공 역할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니까 남들보다도 더 영웅적인 외모의 오크가 되어 한바탕 활극을 펼치고 사냥감을 팔아 이종족 암컷을 취하는 것이 시나리오의 목적이 아닐까 싶다.
그랬다면 꽤 그림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난 그런 모험에는 관심이 없다.
처음에 너무나 생생한 감각에 놀라 시험삼아 내 몸을 꼬집어봤다.
아팠다. 눈물이 나도록 아팠다.
이 거대한 오크의 몸은 힘도 장사였다.
그러니까 사냥을 하다가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큰 고통을 느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모험은 포기하고 그냥 방관자 모드로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다가 언제나 이 낯선 세상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 걱정은 됐지만, 그래도 아픈 것 보다는 낫다.
뭐. 어쩔 수 없다. 겁이 많은 거야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형제여. 어째서 그런 쓰레기를 산 거지?"
내 곁으로 다가온 망고드가 얼굴을 찌푸리며 물었다.
응? 왜 내게 관심을 보이는 걸까?
오크 종족이 서로 틈만 보이면 욕설을 해대고, 툭하면 주먹질을 하곤 했지만, 그렇다고 신분 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주 명백한 신분제도가 존재한다.
뭐 복잡하지는 않다.
이 마을에는 딱 두 가지 신분이 있다.
족장의 직계 혈족과 그외의 부족민들.
망고드는 직계 혈족에서도 가장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내이다.
그러니까 그는 이 종족의 정점에 서있는 남자, 그리고 난 오크족 카스트의 밑바닥.
오죽하면 그 많은 오크들의 비웃음에도 화 한 번 안내고 조용히 내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을까?
그러니 망고드가 보이는 관심이 의아스럽고, 부담스러웠다.
"뭐. 나도 암컷 한 번 사고 싶어서 말이지."
"그렇다고 그런 쓰레기를? 어째서지?"
망고드는 쉽게 날 보내주려하지 않았다.
왜 그래? 이젠 부담을 넘어 살짝 두려운 마음도 생긴다.
"뭐. 돈이 없으니까?"
조금 비굴하게 목소리를 낮추며 대답했다.
"오! 형제여! 오! 형제여! 돈이 필요했다면 어째서 형제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이 형의 소유는 막내인 테미르 바스 그대의 것이 아니던가?"
망고드의 말에선 진심이 느껴졌다. 하긴 오크들은 거짓말이나 음모 같은 거 못하더라.
응? 근데 그게 무슨 말이야?
망고드가 말하는 형제는 어쩐지 일반적으로 오크들이 서로에게 부르는 칭호가 아닌 것 같았다.
"형제가 그런 쓰레기를 사서 욕망을 푼다면, 아버님께서 도대체 얼마나 가슴 아파 하시겠는가?"
망고드가 다시 한 번 나를 형제라 부르고, 그것도 모자라 이번엔 족장까지 거론했다.
설마 나 족장의 아들이야?
그런데 어째서 지금까지는 내게 한 번도 말을 건낸 적 없는 걸까?
음...
형제간의 의가 도독하기 보다는 내가 쓰레기 다크 엘프를 산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가?
"그 쓰레기는 도로 버리도록 하게. 대신 내가 더 쓸만한 암컷을 사서 형제에게 주도록 하지."
와! 농담 아닌데?
"이리로 오지. 내가 봐둔 암컷이 있어. 형제도 마음에 들어할 거야."
망고드가 성큼 발을 옮겼다. 난 잠시 그를 따라야하는지 주저했다.
하지만 뭐 선물을 주겠다는데, 굳이 거절할 거 까지야...
망고드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오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있었다. 모두들 한 여자를 둘러싸고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9십만 츄르?"
츄르를 구십만 개나 살 수 있다고?
화제의 중심이 된 여자보다 여자의 목에 걸린 판자에 쓰여진 그 천문학적인 가격에 먼저 놀라고 말았다.
아직 내 어깨위에 얹힌 다크 엘프의 천 배라는 무지막지한 가격이다.
"어떤가? 아주 훌륭한 암컷이지?"
망고드가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보기 드문 백호족(白虎族) 수인 암컷이지. 혈통이 좋으니 아주 좋은 후대를 남길 수 있을 거야."
그렇다. 오크들이 암컷을 고르는 기준에는 건강 보다 더 중요한 요소가 하나 있다.
바로 혈통.
그러니까 왕이니 귀족이니 하는 혈통이 아니라, 호랑이 수인이나 드래곤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드래코니안 처럼 난폭하고 특별한 힘을 지닌 종족을 의미한다.
그런 특별한 종족의 암컷에게 씨를 뿌리면 좋은 후대를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고 한다.
물론 그 경우라도 태어나는 것은 오크의 수컷 뿐이다.
그건 이 세계에서는 절대적인 법칙 같은 것이다.
오크가 뿌린 씨는 반드시 오크로 돌아온다.
하프 따위는 없다.
하하... 무슨 오크의 씨가 드래곤의 피보다 우선인 걸까?
백호족 수인 족 암컷은 과연 외모부터 대단했다.
다른 수인 암컷들이 귀여운 귀와 꼬리를 제외하면 인간 여자와 크게 다를 바 없는데, 저 타이거 수인은 얼굴이 희고 검은 털로 뒤덮여있다.
털까지는 억지로 납득을 한다. 하지만 저 거대하고 둥근 머리와 소 한마리도 우숩게 물어죽일 것 같은 송곳니가 드러나고 있는 툭 튀어나온 주둥이는 어쩌란 말이냐?
덩치도 오크에 못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를 둘러싼 오크들을 보고 입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게 화를 내는 것인지, 아니면 웃고 있는 건지 구별도 가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아주 훌륭해. 저런 암컷은 십 년에 한 번도 보기 힘들 거야. 본시 내가 취하려 했으나, 형제에게라면 양보할 생각이네."
망고드는 형제에게는 무척 관대한 사내였다.
평범한 여자 백 명을 사고도 남을 만큼 비싼 여자를 내게 준다고?
미쳤냐?
꿈에 볼까 무섭다.
저런 여자... 아니. 저런 짐승과 몸을 섞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
정말이다.
머리 아래로는 사람처럼 직립보행을 하고 있지만, 저건 그냥 짐승이다.
뭐지? 그래 그 옛날 유명했던 타이거 마스크!
그거야! 그거라고.
그것도 가면이 아니라 진짜 호랑이의 대가리가 붙어있어!
난 짐승 애호가 따위가 절대 아니야!
저런 거랑 하느니, 차라리 평생 독수공방 할래요.
"마음은 고맙지만, 형제는 그냥 마음만 받도록 하지."
난 혹시라도 억지로 떠맡길까 두려워하며 점잖게 거절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저 멋진 암컷은 내가 아니라 형제 같은 영웅에게 어울려. 솔직히 말해 나라면 저 여자에게 잡아먹히고 말걸."
내 말에 오크들이 와하하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정말로 그렇다고 믿는 모양이다.
"오! 형제여! 형제여! 그대의 "
하지마! 하지만! 제발!
나 죽어도 싫어!
"난 내 위대한 형 망고드가 저 멋진 암컷에게서 훌륭한 자손을 보기를 기원하네.
그리고 그 혈통이 망고드의 뒤를 이어 콕뵈르를 이끌게 될 것을 확신한다네."
"오! 형제여!"
망고드가 내게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목소리는 왜 떨리고 있는 거니?
"그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당연하지. 진심이라네."
그때였다. 갑자기 주변의 모든 오크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우와아! 망고드!"
"망고드!"
어째서인지 모두들 망고드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간혹 내 이름을 부르는 오크도 몇몇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내가 뭔가 잘못한 걸까?
난 이 사태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