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10. 매리지 블루 - 결혼전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진 그녀는 옛남친에게 전화를 하고
아마 그녀들이 남자에 비하면 육체적으로는 좀 더 연약하고, 싸우는 것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보라도 아파트에 이사와 날 보던 순간부터 내가 위험하다 생각한 모양이었다.
내게 경각심이 없던 것은 지연이 정도일것이다.
그 아이야 아직 사회 경험이 너무 없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이해해 줄거지? 우리의 추억은 여기까지만 하자."
지아는 자신이 날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가 알고 있는 나는 그랬다.
그녀에게 있어서만큼은 난 크게 고집을 부린 적 없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는 아무리 오랜 공백기가 있어도, 기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당신한테는 많이 미안해. 괜히 불러내서, 내 하고 싶은 것만 채우고 떠나는 거 같아."
지아는 정말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그녀의 진심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당신도 내 행복 빌어줄 거지? 부탁해."
"응. 나 정말로 네가 행복하길 바래."
그리고 난 캐스팅 카드 < 수동적 주인공 >를 꺼내 손에 들고 있었다.
사태가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설마 벌써 함께 잠자리를 한 지아에게 이걸 쓰게 될 줄이야.
반짝! 캐스팅 카드가 사라졌다.
"너도 알고 있지? 내가 지아 너의 행복을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 거야."
지아는 내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내가 그녀를 잡아끌고, 다시 벌거벗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입술을 포갤때 벌써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는 키스를 했다.
지금까지의 키스와는 조금 달랐다. 그녀의 주저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난 잘 알고 있다. 지아가 결코 날 거부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날 다시 만난 거 사실은 욕구를 충분히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지?"
자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넌 그 사람이 정말로 널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날 찾아온 거지."
"뭐야. 자기 정말로 너무 자만하고 있는 거 아냐?"
지아가 입술을 내밀고 삐죽거렸다.
잘 아는 표정이다.
그건 그녀가 정곡을 찔렸을 때 하던 모습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하필 결혼을 앞두고 내게 전화를 할 이유는 없잖아?"
"뭐야... 정말 못되게. 그냥 결혼을 앞두고 옛사랑이 머리에 떠올라서 추억에 잠길 수도 있잖아. 여자들은 그런다고. 결혼식을 앞두고 괜히 불안해지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지아가 이렇게 투덜거릴 때가 제일 이뻤다.
그녀의 가면이 벗겨지고, 본색이 드러나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모습을 난 결코 잊을 수 없다.
"여자는 그렇다고? 그러면 결혼을 앞둔 남자들은 전부 조심해야겠네?"
"나빠!"
지아가 내 어깨를 깨물었다.
따끔! 살짝 아팠다. 그녀가 정말로 삐진 모양이다.
"여자는 꼭 성생활이 만족스럽지 못해도 살아갈 수 있어. 무슨 남자들처럼 맨날 발정나는 것도 아니란 말야."
난 지아를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두 팔을 한 손으로 잡고, 위로 들어올렸다.
그렇게 팔을 위로 쭉 뻗어올린 채, 지아는 삐진 얼굴로 계속 항변했다.
"그러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네?"
"흥!"
지아는 입술을 꼭 다물었다.
"난 내가 항상 행복했으면 해. 그러니까 지금부터 즐겁게 해줄게."
"정말! 자기가 무슨 여자를 정신도 못차리게 만드는 사람인줄 알아. 뭐 좋아도 그정도는 아니다."
지아가 날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러니까 두고보자고."
난 지아에게 키스를 했다. 뾰루퉁하던 지아는 입술을 내밀어 날 받아주었다.
"알았어. 한 번만 더 해. 오빠한테 미안해서 그냥은 못 가겠어서 그러는 거야. 하지만 진짜 이걸로 끝이야."
지아가 입술을 떼고 내게 못을 박았다.
"그래. 한 번만 더 해. 그다음엔 안 잡을게."
"진짜! 왜 그렇게 자신만만한데?"
그거야 두고 보면 알지.
지금까지야 그냥 섹스였지만, 지금부터는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될 거야.
그래.
어울리지 않게 무슨 추억에 남을 아름다운 관계인가?
난 그런 놈 아니었다.
지아에 대해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에게 좋은 남자로 기억되고 싶었다고?
그렇다면 오늘 밤으로 지아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말인데...
그럴리 없잖아?
난 그럴만한 그릇이 못된다.
그냥 하고 싶은 거 해버려야지.
난 지아의 몸을 더듬었다.
"응?"
지아의 눈이 커졌다. 바로 반응이 오는 모양이다.
설정 카드 < 민감 >
- AV 마스터에 의해 캐스팅된 배우는 사소한 자극에도 성적으로 흥분합니다.
- 배우의 육체는 모든 상황에 그 어떤 성적 자극에도 반응합니다.
지금까지는 그냥 남자와 여자였지만, 지금부터는 AV 마스터와 캐스팅된 여배우의 관계이다.
난 내 추억속의 그녀에게 다시는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할 생각이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는 내게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뭐. 그런 놈이지. 뭘 바래?
"왜 그렇게 응큼한 눈으로 날 보는 거야? 오빠. 무서워."
지아가 내 마음을 눈치챈 모양이다.
"내 눈이 그래?"
"그래! 막 잡아먹을 거 같은 눈이야. 진짜. 징그러워."
"잡아먹을 생각이니까."
난 그녀의 몸에 다시 한 번 내 우람한 물건을 집어넣었다.
"아!"
내게 눈을 흘기던 지아의 표정이 바로 바뀌었다.
충만? 배려? 추억?
전부 개에게나 주어버리라고 해라.
그녀는 자신의 성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옛 남자의 자지를 잊지 못해, 결혼을 바로 앞두고 불륜을 저지른 여자이다.
도대체 거기 어떤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이야?
난 그녀가 곧 결혼할 거란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녀의 몸을 탐한 상간남이다.
풋!
내가 어리석었지.
우리가 다시 만난 순간부터, 우리는 비도덕적일 수밖에 없었다.
"학!"
그녀가 입을 벌리고 신음을 내뱉었다.
겨우 한 마디의 신음이었지만 아까와는 다른 육감적인 소리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 넌 육욕에 눈이 먼 짐승이야.
아무리 그걸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치장해봤자 절대 변하지 않아.
어떤 면에서는 그녀는 내가 매일 욕보이고 있는 보라보다도 더 나쁜 여자이다.
그녀는 최소한 자의는 아니었다.
"아! 너무 좋아! 학! 어? 어떻게?"
지아의 눈이 크게 떠졌다.
내가 지닌 또 하나의 설정 < 중첩 >이 열심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보다는 두 번째가, 그리고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훨씬 더 강한 쾌락을 선사해 줄 것이다.
"으윽! 안돼! 이러면! 나...."
지아가 마지막 반항을 해본다.
그녀가 깨달았다. 자신이 어떤 끔찍한 지옥에 빠져들었는지.
"안돼! 아! 흑! 이러면... 다시는..."
지아는 눈물을 흘렸다.
알고 있다.
그녀는 아주 커다란 쾌감을 느끼면 울음을 터트려버린다.
관계할 때마다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종종 쾌감이 견딜 수 있는 한계를 넘어가면 그렇게 울음을 터트렸다.
"아직 멀었어."
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안돼! 흑! 그만! 나... 더는 못 버텨! 흑!"
그녀가 알고 있던 나였다면, 여기서 그녀가 감정을 추스릴 수 있게 후퇴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녀가 알고있던 그 자상한 남자가 아니다.
난 사소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단란한 가정을 파괴하고, 처음 본 순수한 어린 소녀의 몸을 사기에 가까운 방법으로 차지했다.
그것도 조금의 죄책감도 가지지 않고.
나를 신뢰하던 친구도, 단지 위험이 적다는 이유로, 내 능력의 시험 대상으로 삼은 놈이다.
그러니 이 옛 사랑이라고 다를 것이 무엇인가?
난 그녀를 더 몰아붙였다.
"흑! 흑! 학!"
그녀의 입에선 울음과 신음이 마구 뒤섞여 튀어나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는 더이상 안된다는 말은 내뱉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깨달았다.
자신이 더는 헤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흑! 아! 더! 더! 더 깊숙히! 학!"
난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드디어 우리의 격렬한 관계가 끝났다.
"흑! 흑! 이 나쁜자식!"
지아는 내 품에 안겨 마구 흐느꼈다.
물론 나는 그 울음이 슬픔이나 분노에 기인한 것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명백하게 감당하기 어려운 쾌락에서 시작된 울음이었다.
"어땠어? 장담할만 해?"
한참만에 울음을 멈춘 그녀에게 물었다.
"몰라! 진짜! 어떻게 하란 말이야?"
"응? 뭘?"
"정말로. 이제 당신을 어떻게 잊어?"
"잊고 싶어?"
"몰라!"
지아는 뾰족하게 한 마디 내뱉았다. 그리곤 내 몸을 끌어안았다.
"하아...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나... 사람이 너무 쾌감이 커서 죽을 수도 있다는 거 처음 알았어."
그녀는 내가 들을 수 있는 최대의 찬사를 주었다.
"진짜 그동안 뭘 하고 산 거야? 정말로 밥먹고 그것만 한 거야?"
"하하... 그거 칭찬이지?"
"거기다가 느글거리는 건 또 어디서 배웠어?"
지아가 내 허리를 꼬집었다.
그러고는 내 목을 끌어당겨 다시 키스를 해주었다.
"좋았어. 정말. 그냥 하다가 이대로 죽겠다 싶은데, 죽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만큼."
"벌써 그러면 안 되는데?"
"뭐야? 그렇게 하고 또 한다고?"
지아가 기겁을 했다.
"또 하면 나 진짜 죽어!"
"싫어?"
"싫다는 건 아닌데... 몰라!"
난 지아가 이렇게나 당황한 모습은 처음본다.
물론 우리가 사귀던 당시에도 그녀와의 관계는 늘 만족스러웠고, 때때로 그녀는 내게 자신이 얼마나 큰 쾌감을 느꼈는지 상세하게 설명을 해 주었었다.
그녀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욕망에도, 자신의 몸에도.
하지만 그 당시의 그 많았던 관계에서 이렇게까지 격렬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었다.
"목마르지 않아?"
"그런 거 같네."
"그럼 내가 마실 것 좀 가져올게."
난 그녀가 일어날 수 있도록 몸을 치워주었다.
지아가 일어나, 냉장고로 걸어간 사이 난 콘돔을 처리했다.
사실 난 콘돔을 사용할 이유는 없지만, 지아에게 그걸 설명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고 나 수술해서 임신은 안 하니 걱정말라고 한다면, 보통은 자기를 임신시키려고 하는 거짓말은 아닐까하는 걱정을 하게 될 것이다.
섹스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그렇게 신경쓰게 하는 사소한 것들이다.
그러니 차라리 콘돔을 사용해주는 편이 낫다.
"콜라?"
"물이면 돼."
"응. 여기."
지아는 내게 생수 병을 가져다 주고, 자신은 콜라 캔의 뚜껑을 땄다.
"하아... 시원하다. 살 거 같아."
콜라 한 캔을 한 번에 마셔버릴 만큼 갈증이 났었나보다.
"하아..."
지아가 다시 날 바라보고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좋아?"
"뭘?"
"진짜로! 알면서 물어. 나 이제 어쩌면 좋냐고!"
지아가 투정을 부렸다.
"이리로 와. 그런 걱정은 나중에 하자."
지아는 날 찌릿하게 노려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살짝 젓고는 내 옆으로 와 다시 내게 안겼다.
"모르겠다. 나도..."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지아는 무척이나 당황하고 있었다.
전화기를 가져와 손에 들고도 바로 받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
"여보세요."
마침내 지아가 결심을 했다.
"네. 그래요. 음... 백화점에 들렀다가, 그냥 바람이 조금 쐬고 싶어서 한강까지 왔어요. 그럼요. 아뇨. 걸어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방금전 나와 섹스를 하고, 내게 앙탈을 부릴 때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길 없었다.
역시... 내가 알던 지아가 맞다.
온화하고 침착한 여자였다.
"그냥 오늘 조금 그랬던 거 같아요. 네. 식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런가봐요. 맞아요. 킥! 그죠. 매리지 블루. 몰랐는데, 나도 조금은 왔나 봐요. 아무렇지 않은 거 같아도 두려웠던 거 같아요. 아뇨. 그렇게까지 심한 건 아니에요. 잠깐만 바람이라도 쐬면 나아질 거 같아요. 마음 불편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럼요. 나도요."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이 결혼을 앞두고 살짝 우울한 것 같다고 밝혔다.
똑똑한 여자였다.
다른 여자라면 감출 것을 밝혀서 더 큰 거짓말을 숨긴다.
"옛 친구요? 아뇨. 그럴 생각은 없어요. 당신이나 그렇게 해봐요. 하하. 그래요. 너무 신경쓰지 말아요. 그럼 바람 쐬고 들어갈게요. 어쩌면 오늘은 더 연락 못할 수도 있어요. 그냥 이 여자 좀 심란한가보다 하고 귀엽게 봐주세요."
그녀는 전화를 끊고, 날 바라본다.
"그사람이 모라고 했는지 알아? 우울한게 너무 심하면 옛날 남자친구라도 한 번 만나보래."
"무서운걸..."
알고 한 말일까? 아니면 너무나 대인배라서 그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