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10. 매리지 블루 - 결혼전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진 그녀는 옛남친에게 전화를 하고
"여보세요."
지아가 전화를 받았다.
어째서일까?
난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은 떨리고 있는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응. 네. 알아요."
그녀는 전화기를 들고 침대에 앉았다. 상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날 바라보고는 손짓을 했다.
난 그녀의 곁으로 가 침대의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았고,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나요? 지금 백화점 들렀다가 다리가 조금 아파서, 휴계실에서 잠시 쉬고 있어요.
그럼요.
아뇨. 살 거 그렇게 많지 않아요. 그냥 심심해서요.
풋! 그러게요. 얼마 안 남아서 그런가봐요. 이렇게 혼자서 천천히 고르고 싶었어요.
괜찮아요. 바쁜 거 알아요.
그럼요.
알았어요. 이따 집에 가면 다시 연락해요."
목소리가 떨린다고 느낀 것은 처음 한 마디 뿐이다.
지아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나조차 그녀가 백화점의 조용한 휴계실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녀가 통화를 하는 동안 내가 그녀의 목덜미를 입을 맞추고, 그 탐스러운 가슴을 만져도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지아는 전화를 끊고, 고개를 돌려 내게 키스를 해주었다.
굉장히 감미로운 입맞춤이었다.
생각이 났다.
그 시절 우리의 키스는 항상 이랬다.
달콤했다. 너무 달콤해서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왜 안 물어봐?"
그녀가 물었다.
"뭘?"
"당신이랑 사귀는 동안에는 내가 이런 적 없는지."
"그럴 리 없으니까."
난 아주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런 걸 왜 의심해?
"굉장히 자신 있어 하네? "
그녀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자길 두고 바람피울 이유가 없었다고 생각한 거야?"
"그게 아니라 나한테 속일 이유가 없었으니까. 라고 생각한 거야.
사실 그때의 나 그리 대단치 않았으니까.
뭐. 지금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지만 말야.
그러니까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대인 거지.
솔직히 그때의 나는 네가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하고 있었으니, 만일 지아가 다른 남자랑 자고 있다고 해도 뭐라 못했을걸?
그리고 너도 그걸 알고 있었고.
그니까 네가 그랬을 리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거지."
난 아주 길게 말했다. 그녀가 날 두고 바람을 피웠을 리 없다고...
"참. 궤변론자. 역시 변함없네."
그녀가 웃었다.
요즘 여러 여자들에게 이런저런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아왔지만, 궤변이라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 없다.
그녀와 사귀던 시절에도 그랬다.
어쩐지 신선했다.
"진짜로. 어쩜 그렇게 하나도 안 변했어. 그거 알아? 당신 굉장한 거짓말쟁이인 거?"
"그랬나? 음. 나 한 번도 지아한테 거짓말해 본 적 기억에 없는데?"
정말이다. 단 한 번도.
"그렇지. 당신은 절대 거짓말 안 해. 그냥 해야 할 말을 생략하거나,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 같은 이야기를 끼워 넣어서 상대가 스스로 착각하게 만들 뿐이지.
그니까 더 교활해."
"음... 나 그런 사람이었어?"
"응. 그땐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알 거 같아."
아! 좀 서글펐다. 지아는 날 교활하다 비난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을 반박할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나와 떨어져서 나의 본질을 뚫어볼 수 있었고, 난 그녀보다 더 늦게 나에 대해 깨달은 것은 아닌가 싶다.
"지금도 그래. 왜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 널 믿을 수 없다고?"
"난 언제나 지아를 믿었고, 지금도 그래."
난 가련하게 항변을 해본다.
"날 믿었는데, 날 떠난 거였어?"
지아는 우울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내가?"
난 그녀에게 반문했다.
잠시 그녀는 어쩐지 서글픈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당신한테 떠넘기려고 말을 아무렇게나 했어."
갑자기 그녀가 사과를 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몰라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사실은 지금 굉장히 당황스럽고, 창피해.
당신한테 절대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아니어서 그런가봐."
남편이 될 사람을 속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보다 더 부끄럽다는 말인가보다.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종류의 감정이었다.
하지만 대개 여자의 섬세한 감정을 내가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건 그렇고, 지아가 저렇게 이성을 놓으면서까지 내게 부끄러워한다는 것이 내겐 더 놀라웠다.
전에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모습이다.
지아는 다른 사람 앞에서 자주 부끄러운 표정을 짓고는 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그녀는 능숙한 거짓말쟁이에 뛰어난 연기자였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난 그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모습에선 정말로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못보는 사이 그녀의 연기가 진일보한 걸까?
글쎄?
"희한하지? 당신한테 그렇게 못보일 거 다 보여주고, 이제와서?"
그녀는 내게 안겨왔다.
여전히 그녀는 예뻤다.
어떻게 이 아름다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우린 더 이상 대화를 하지 않았다. 지금은 서로를 사랑하기에도 시간이 모자랐다.
난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지아가 미소를 짓는다.
드디어 난 그녀를 다시 안을 수 있었다.
서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몸에 익숙했다.
어디를 만지면 상대가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그녀의 성감대를 자극했고, 그녀가 날 자극했다.
익숙하면서도 충분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관계였다.
요사이 다른 여자들과 섹스할 때와는 많이 달랐다.
어쩐지 육욕보다는 애정으로 가득한 섹스를 함께 나누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관계도 좋았다.
무엇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가득했다.
그리고 섹스를 하는 동안 다음번 관계에 대한 미련도 없었다.
지아와 또다시 이런 시간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난 그녀의 앞날을 축복해주고 싶었지, 그녀와 불륜 관계를 지속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녀를 그 남자에게서 빼앗아올 생각도 없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지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일 터이지.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줄 수 있는 사람.
하지만 나와 함께한다고, 지아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다른 여자들을 포기할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런 일탈은 오늘 한 번이면 족했다.
그래서 난 그녀에게 마지막 추억이 되고 싶었다.
나도 그녀를 좋은 추억으로 기억하고 싶었고.
최선을 다했다.
지금 이순간만큼은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사랑받기를 원했다.
그래서일까?
관계가 끝났을 때 난 어쩐지 마음이 충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와우!"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정말 좋았어. 내가 기억하고 있던 그 섹스가 맞아.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더 좋은 거 같아."
아직 그녀의 안에 내 물건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지아가 내게 키스를 해주었다.
정말로 충만한 키스였다.
"나도 많이 좋았어."
지아에게서 떨어져나와 그녀 옆에 누으며 말했다.
그녀는 내 팔을 베고 내 가슴을 안았다.
정말로 우리 두 사람 모두 만족한 것이 틀림없었다.
"오빠."
지아가 날 불렀다.
그녀가 유일하게 날 오빠라고 부를 때가 있다. 바로 섹스를 할 때였다.
언젠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 있었다.
"왜 할때만 오빠라고 하는 거야?"
"섹스를 하고 있을 땐, 자기가 정말 어른 같아서?"
"그러면 평소에는 어떻다는 거야?"
"음. 덩치만 큰 어린아이?"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 지도 모른다.
그녀에 비해 연상이었지만, 그녀보다 철이 덜 들었던 것은 틀림없다.
"응?"
오랜만에 지아에게서 오빠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떨려왔다.
"어쩜... 전에도 이랬었나?"
"뭐가?"
"알면서 그래."
"모르겠는데? 정말로."
"진짜. 그동안 능청만 늘었나봐."
"진짜로 모른다고..."
"이거 말야. 이거"
지아가 내 물건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까먹었다. 지아와 사귈때와 좀 다르지...
"이거 왜 전보다 커진거야?"
난 잠시 무슨 대답을 해야할지 고민에 빠졌다.
"설마 오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봐바. 천연 그대로야. 조금 열심히 쓰다보니까 커진 모양이지 뭐."
생각한다고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결국 그렇게 우길 수밖에 없다.
"흐음... 커질만큼 많이 썼단 말이지?"
"음... 뭐 그런 셈이지."
"믿어줄게."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우고 있었다.
"고맙다."
"옛사랑이 다른 여자들한테 인기가 있는 게 좋지, 외롭게 살고 있었다면 슬펐을 거야."
상당히 중의적인 의미의 말이다.
내가 혼자인 것이 슬프다는 말일 수도 있고, 또 자기 말고는 여자를 사귈 수 없는 무능한 남자를 사귀었다는 사실이 슬프다는 말일 수도 있다.
둘 다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뒷쪽에 좀 더 강하게 의미가 실려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여자였다. 자존심이 강하고, 욕망도 강했다.
사실 그녀에게 난 그리 어울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한 여자였고, 그걸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인맥 쌓기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사귀고 있는 동안 내내 난 그녀가 언제고 날 떠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녀는 높이 훨훨 날아갈 사람이었고, 난 그렇지 못할 사람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처럼 그녀가 날 버리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서로 우리의 관계가 여기까지였음을 깨달은 것 뿐이었다.
"커진 건 그렇다쳐도. 뭔가 달라졌어. 뭐라고 하지? 스킬? 진짜 나랑 헤어지고 섹스만 한 거야?"
"음... 하긴 좀 했지."
"징그러."
지아가 내 어깨를 때렸다. 살짝 따끔했다. 정말로 감정이 실린 손길이었다.
그래도 금세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오는 걸 보면,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남편 될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섹스를 하고 난 뒤여서인지 우리는 아까보다 좀 더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좋은 사람. 음.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어. 일하다가 만났어. 내가 많이 서툴러하니까 도와주더라고."
똑똑하고 착실한 사람이고, 꽤 대단한 집안의 자제라고 한다.
뭐. 내가 예상했던 종류의 사람인가보다.
지아는 언제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만날 거라 생각했었다.
"잘됐다.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잘 된 건지 모르겠네..."
그녀가 말을 흐렸다.
아주 조금은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우리의 섹스가 아무리 아름다웠다해도, 그녀는 윤리적으로 큰 잘못을 했다.
괜히 그 사람 이야기를 꺼낸가 싶었다.
"나. 사실은 자기랑 딱 한 번만,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어."
지아는 천장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해주니까, 괜히 우쭐해지는 거 같다."
"그래서 오늘 일 후회는 안 해."
지아가 고개를 돌리고 내게 입을 맞춰주었다.
하지만 아까의 그 열정적인 키스와는 달랐다.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뭔가 미묘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뭘까?
오랜 시간을 그녀와 함께해왔었지만, 내가 그녀를 완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발가벗은 그녀와 다시 키스를 하니, 난 다시 욕망이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두 번째가 필요한 것 같다.
"또 커졌어? 잘 서는 건, 그때랑 똑 같네."
지아가 웃었다.
"네 모습을 보고 바로 안 서는 게 더 이상하다니까."
우리가 함께였단 시절과 똑같은 말을 했다.
"하하..."
잔뜩 발기된 물건을 보고 웃던 지아는 금세 정색을 했다.
"아무래도 나..."
순간 난 그녀의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만 해야 할 거 같아. 미안."
지아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후회는 하지 않아. 정말로 좋았으니까. 하지만 여기까지야."
지아가 몸을 일으켰다.
"당신. 너무 중독성이 강해. 그걸 잊고 있었네. 나 여기서 또 한 번 해버리면, 다시는 벗어나지 못할거야.
그러면 정말로 끝이야."
그녀는 내게서 멀어졌다.
지아는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벌써 나에 대해 경각심을 가져버렸다.
아직 내가 그녀에게 캐스팅 카드를 사용하지 않았고, 내 설정에 아무런 영향도 받고 있지 않는데도, 그녀는 나와 더이상 섹스를 하는 것이 문제가 될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지. 은희랑 비슷한 여자였지.
두 사람 모두 눈치가 빨랐다.
아니. 사실 여자들은 위험에 대해서는 남자보다 훨씬 더 빨리 알아차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