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10. 매리지 블루 - 결혼전 알 수 없는 우울감에 빠진 그녀는 옛남친에게 전화를 하고
"그럼. 행복하지. 그래. 고마워. 그럼 또 연락할게. 그날 보자."
지아는 전화를 끊고 나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결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요며칠 지아의 하루는 대부분 그녀가 알던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서 결혼을 알리고, 청첩장을 보내는 나날이었다.
"좋은 남편감을 만나 다행이다."
"얼마냐 행복하겠냐."
그런 덕담을 듣다보면 하루가 다 가있다.
뭐 그만큼 그녀가 쌓아온 인맥이 적지 않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정말로 남편 될 사람이 좋은 남편감이기도 하다.
"하아..."
지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이제 리스트에 적혀있는 이름들은 거의 다 연락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사람...
전화를 해야 할까?
사실 하지 않는 편이 좋다.
특히 남편이 될 사람에 대한 도리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세상 어떤 남자가 결혼식날 신부의 옛 남자 친구가 하객으로 찾아오길 바라겠는가?
그녀도 그 사람을 부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꼭 이야기는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쩐지 마지막으로 한 번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이게 혼전 우울증인가?'
지아는 자신의 상태를 되짚어본다.
매리지 블루...
결혼식을 코앞에 둔 신부들이 종종 빠진다는 식전 우울증.
미래에 대한 불안감, 혹은 상대에 대한 신뢰 문제. 결혼식 준비 동안 생기기 마련인 다툼...
사실 지아에게 그런 것들은 전혀 해당하지 않는다.
남들이 그러듯 신랑이 될 사람은 훌륭하다.
집안도 번듯하고, 경제적으로도 모자람이 없다.
결혼식 준비를 위해 그녀가 부담한 것은 남자가 준비한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용돈에 불과할 정도이다.
그나마도 남자 친구의 부친이 결혼식 준비에 필요하면 쓰라고 건네준 용돈에도 미치지 못한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없다.
오히려 그런 불안감이 해소될 예정이다.
그렇지만...
지아의 한숨은 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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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도 평소와 하나 다를 바 없는 평범한 금요일이었다.
해야 할 일은 많았고, 퇴근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될 수 있으면 일을 다음주로 미루지 않으려고 난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어서, 내 전화기가 부르르 떨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선배. 전화 온 거 같아요."
마침 지나가던 문희 양이 그걸 알려주었다.
그리고 부르르 떨리고 있는 스마트폰의 화면에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발견하고 너무 놀란 나는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을 뻔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전화를 절대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난 급하게 손을 내밀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야."
지아였다.
"응. 오랜만이네."
난 최대한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를 유지하려 노력하며 전화를 받았다.
"목소리가 하나도 안 변했다."
"그러네. 꽤 오랜만인데도 그대로네. 잘 지냈지?"
"어. 아주. 잘."
그녀는 또박 또박 자신이 잘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해주었다.
"잠깐 만날 수 있어? 얼굴 한 번 보고 싶은데."
그리고 평소처럼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자신의 용건을 밝혔다.
그런 점이 좋았다. 솔직했다. 돌아가지 않고, 늘 직구였다.
"그래. 어디서 볼까?"
그녀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세상에 행복한 마음으로 헤어진 커플은 없을 것이다.
우리도 그랬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악감정이 남아있지도 않다.
마침 그녀쪽이 더 시간이 있어, 그녀가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근처로 오기로 했다.
하던 일을 마치고 약속 장소인 카페로 나갔다.
그리 어렵지 않게 테이블 앞에 앉아 조용히 커피를 마시는 지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도 날 발견하고 손을 들어 반갑게 맞아주었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네?"
"넌 어떻게 전보다 더 이뻐졌네?"
빈말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우리가 헤어졌던 시절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정말?"
지아는 자신이 이쁘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아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아주 잘 사용하는 편에 속했다.
"오늘 처음 보는 여자였으면 좋았을 걸."
"왜?"
"고백하려고. 첫눈에 반했다고."
"차암! 실없기는. 입바른 소리는 예전이나 다름없네. 정말로 변한 게 하나도 없나 봐."
우리는 헤어진 사이라는 것도 잊은 채 한참 동안 수다를 즐겼다.
비록 헤어진 사이라 해도 그녀처럼 아름다운 여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여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면, 아마 막 이십 대의 중반을 넘어설 무렵이리라. 지금의 지아가 그랬다.
우리가 사귀고 있을 때보다 더 이쁜 것 같았다.
물론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스무 살 초반의 그녀도 무척 이뻤다. 그러니까 지금의 그녀가 내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이쁘게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 결혼해요. 사실 그거 얘기해주려고 불렀어."
그녀가 폭탄 선언을 했다.
난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내 얼굴이 너무 딱딱하게 굳어지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들었을 뿐이다.
"사실 고민을 되게 많이 했어.
당신한테 말을 해야 하나? 그냥 잊혀진대로 둘까...
괜히 연락해서 쓸데 없이 괴롭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결혼식에 부를까 말까."
"마음만은 고마워. 그래도 내가 가면 네가 불편할 거야."
"음... 그렇겠지?"
세상에는 자신의 옛 연인을 자신의 결혼식에 부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난 도통 그걸 이해할 수 없다.
"대신 축의금...
아니. 혹시 내가 해줬으면 하는 결혼 선물은 혹시 없어?"
"진짜로...
설마 내가 당신한테 뭘 받고 싶어서 연락했겠어요?"
"그래도 이미 알았으니,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작은 거라도 좋아. 마음은 전하고 싶어. 아니. 큰 거였으면..."
난 꽤나 허둥대고 있었다.
결국 난 내가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풉!"
그녀가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어쩜 그래..."
웃음을 참으려다, 눈가에 눈물이 고인 그녀를 보자, 난 다시 한 번 사랑한다는 말을 할 뻔 했다.
"진짜로 하나도 안 변했어."
"있잖아. 나 다른 사람 앞에서는 안 그러거든."
"알아. 딴 사람 앞에서는 듬직한 사람이란 거.
그래. 알았어. 그럼 한 번 생각해 볼게. 무슨 선물을 받으면 좋을지.
참! 당신 근데 계속 시간은 돼?"
"그럼. 오늘 일은 다 끝났으니까.
그런데 신부가 이럴 시간 있어?
지금이 한참 바쁠때 아냐?"
"아냐. 이미 준비는 거의 다 끝났어. 이제 식만 치루면 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약간 우울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르지만, 적지 않은 시간을 그녀와 보낸 내가 눈치채지 못할 수는 없었다.
"그럼 다른 데로 옮길까?"
"응. 나 시원한 게 마시고 싶어."
우리는 가까운 펍으로 옮겨 맥주를 시켰다.
"회사 일은 재미있어?"
"응. 잘맞는 거 같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한 가지 주제는 계속 피하고 있었다.
바로 그녀가 결혼할 상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로서야 굳이 알고 싶지 않았고, 그녀도 어쩐지 그 이야기는 피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내가 팀장으로 승진하게되니까, 뒤에서 수근거리던 사람들 하나같이 태도가 변하더라고. 재미있어. 사람들이란..."
한참의 이야기 끝에 우리는 그간 서로에게 있었던 일들을 거의 이야기했다.
물론 정말로 모두를 한 것은 아니다.
나도 그녀도 서로에게 꺼내놓을 수 있는 걸 말한 뿐이다.
"그 사람은 어때?"
묻고 싶지는 않았지만, 아마 예의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기어이 그걸 묻고야 말았다.
"좋은 사람."
지아의 평가는 너무나 간결했다.
그리고 한동안 우리는 서로 묵묵하게 자기 잔에 남아있던 술을 비웠다.
이제 일어나야할 시간이 온 모양이다.
"나갈까?"
내가 먼저 그 말을 했다.
"오늘 즐거웠어. 시간 내 줘서 고마워요."
펍에서 나와 지아는 공손하게 머리를 살짝 숙이고 인사를 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늘 그랬다.
또래의 여자들 같지 않게 예의를 차리고, 누구에게든 감사를 표시했다.
때론 그런 그녀를 가식적으로 본 사람도 없지는 않았지만, 한결 같은 그녀의 태도는 대개 좋은 평을 끌어내기 마련이었다.
"나야말로 고마웠어. 이렇게 다시 한 번 널 볼 수 있어서.
앞으로도 행복하게 잘 살아."
나이는 내가 더 많지만, 난 그녀에게 배운 게 많다.
적어도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만큼은 그녀를 만난 이후로 훨씬 더 나아진 게 틀림없다.
우리는 그렇게 몇 초 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먼저 몸을 돌렸다.
어쩐지 가슴이 쓰라렸다.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난 엄청난 갈등 속에 서 있었다.
이대로 그녀를 그냥 보내도 되는 걸까?
물론이지!
얼마 뒤면 결혼한 다는 여자를 그냥 돌려보내지 그럼 뭘 어쩌려고?
하지만 굳이 날 찾아온 것은 그녀도 조금은 미련이 남아 그런 게 아닐까?
웃기는 소리.
지아를 몰라? 그녀는 그런 사람 아니야.
적어도 결혼을 앞두고 다른 남자와 그런 생각을 할 리 없어.
그간의 추억이 있는데, 최소한 지켜줘야 할 것은 지켜줘!
맞아. 하나 쯤은 아름다운 추억을 남겨두는 것도 좋아.
다른 여자한테는 다 그렇게 해도 지아만은 그러지 말자.
그렇게 해서 추억 지킴이가 이겼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난 계속 손에 들고 있던 캐스팅 카드 < 수동적 주인공 >을 사용하지 못했다.
바보 같은 놈이었다.
정말로 원하고 있었으면서도 차마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렇게 소중한 친구인 은희는 그렇게나 가볍게 이용해놓고서.
'병신...'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뒤로 돌아서면서, 난 스스로를 욕하고 말았다.
아. 안 되겠다.
빨리 집에가서 딸이나 한 번 치고 자야겠다.
오늘은 누군가를 안을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빠."
그때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며, 난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 선물로 받고 싶은 거 생각해냈어."
"뭔데?"
"민초. 민초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지금"
그녀는 조금전까지와는 달리 무척이나 쾌활한 태도로 내게 말했다.
"저쪽에 있을 거야."
난 아까 그녀를 만나러 가면서 보았던 어떤 장소를 기억해냈다.
지아가 내게 다가와 가볍게 팔장을 꼈다.
그것 만으로도 난 벌써 마음이 달아올랐다.
5분 거리에 있는 모텔로 들어갈 때까지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를 사실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민초 아이스크림.
그녀와 나만의 시크릿 워드.
민초가 먹고 싶다는 말은 섹스를 하고 싶다는 의미였다.
섹스란 단어를 사용하기 싫어 그런 단어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
항상 품위와 절도 있는 태도를 견지하는 그녀였지만, 관계를 가질 때면 야성적인 여자이기도 했다.
"왠지 잘 어울리잖아? 민초하고 섹스."
때론 그런 엉뚱함이 그녀를 더욱 매력있게 했을지도 모른다.
"오랜만이네. 이런데."
모텔 방에 들어가자 그녀가 가장 처음 한 말이었다.
"이런데 안 다니나 봐?"
"바보 같은 사람. 당신이랑 말이야."
지아가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하긴. 요즘 세상에 결혼할 사이에 모텔 한 번 가지 않는 커플이 어디 있으랴.
객실로 들어가자, 지아는 가볍게 내게 달려들었다.
우리는 키스를 나누었다.
순간 지난 2년 동안 멈추었던 시간이 갑자기 흘러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가 마지막이었나? 속초항?"
서로에게 입을 떼고 그녀가 말했다.
"그랬었지. 그 허름한 모텔... 515호. 바다가 내려다 보였지."
이별 여행. 우린 그런 걸 했었다.
이별을 합의했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를 보내기 위한 준비를 했었다.
두 사람 모두 관계를 더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추하게 다투면서 헤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도 지아의 제안이었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품위있게 보낼 생각을 하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슬펐지만, 쾌락으로 가득했던 날이었다.
도착한 날 저녁부터, 이틀 뒤의 아침까지 우리는 방에서 한발자국도 나가지 않고, 오로지 서로의 몸을 탐닉했었다.
섹스를 하고, 하고, 또 했다.
가끔 욕실로 가 서로의 몸을 씻어주었고, 다시 돌아와 서로의 몸을 더럽혔다.
배가 고파지면 사가지고 간 빵과 음료수로 때웠다.
마지막이라는 절박감 때문이었을까?
그땐 밥을 먹는 시간조차 아쉬울만큼 서로의 몸을 원했었다.
"나 봐줄 거지?"
지아가 내 앞에서 하나씩 옷을 벗었다.
여름의 초입이라 걸치고 있던 옷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 얼마 안되는 옷을 벗는 시간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벌거벗은 그녀의 몸을 보니 다시 그 때의 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예쁘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그때도 지금도 이뻤다.
"바보야. 지금은 입을 열 때가 아니야."
지아는 웃고 있었다.
난 옷을 휙휙 벗어던지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전화벨이 울렸다. 내 것은 아니다. 경쾌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벨소리.
난 결코 전화벨까지 신경쓰는 타입은 아니다.
처음 구입할 때의 전화벨소리를 내 의지로 바꾼 적이 거의 없다.
저 감미로운 벨소리가 울리고 있는 전화기의 주인은 그러니까 그녀였다.
벌거벗은 지아가 조심스럽게 전화기를 확인했다.
난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딱딱하게 굳어진 모습은 그때 처음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