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8. 잠입 수사관 니키타 로마노바의 비극
"그리고 이 서류들은, 지금 시청에서 공무원들하고 건설업자들하고 뭔가 크게 해먹으려는 증거들. 위에서 아래까지 아주 여기저기 연결되 있어. 아까 그 동영상으로 모자라면, 이것도 도움이 될 거야. 얽힌 사람이 한둘이 아냐."
난 그녀가 이날 하루 열심히 모아온 노고의 산물을 마치 내가 한 일인양,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하하... 말도 안 나와. 어떻게 했는지는 둘째치고, 이걸 하루만에?"
"말했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려고 노력하면, 길이 생길 수도 있다고."
꿀꺽!
보라는 속이 타는지, 콜라 한 모금을 마셨다.
"하아... 당신... 정말로 어떤 사람이야?"
"당신이 알고 있는 그대로. 파렴치하고, 비열한 옆집 남자."
보라는 날 빤히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그녀의 눈에서 나에 대한 증오가 사라져있었다.
서운했다.
"고마워."
그것도 마음에 안 들어.
우리는 잠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녀는 나란 남자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었을 테고, 난 어떻게 그녀의 눈동자에 다시 증오가 깃들게 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기 바빴다.
"근데... 그 사람한테 어떻게 말을 해야하지? 나조차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데, 그사람을 어떻게 납득시켜?"
잠시 뒤 그녀가 한 가지 난점을 알아차렸다.
"쯧쯧. 숫가락에 얹어서 입에 넣어주기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이런 거 경찰도 못해!"
내 비난에도 보라는 그다지 개의치 않는 모습이다.
당연하지. 하루만에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보라 그녀 뿐일 터이다.
"때론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잖아. 예를 들면 당신 동기중에 안기부? 아니. 감사원이 낫겠다.
그래. 감사원에 다니는 친구가 한 명 있어서, 하소연을 했더니, 어떻겐가 해서 구해다 주었다던지."
"그걸 믿을 거 같아?"
"믿지 않으면? 그사람이 자신을 살릴 증거를 갖다 버리기라도 할까봐? 남편이 그렇게 멍청해?"
내 말에 보라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당신은 이게 어떻게 구한 건지 모르잖아?"
"그래... 어차피 난 하나도 모르지."
"그러니까 그걸 해줄만한 사람을 만들고, 그 사람에게 떠넘겨 버리는 수밖에 더있어?"
"알았어. 여하튼 고마워. 끝까지..."
"그리고 절대 나와 관계되었단 소리는 하지 마. 왠지는 당신도 잘 알지?"
"어..."
그냥 옆집 총각이 이런 엄청난 일을 해 주었다?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누구라도 의심이 머리에 자리잡기 마련이다.
보라도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 남자는 나에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제일이다.
다른 누구도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건 부탁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야. 절대로 남편에게 이걸 해준 사람이 나라고 밝히면 안 돼. 만일 그런 경우가 생기면..."
난 비열한 웃음으로 그녀에게 겁을 주었다.
우리는 모두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무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알았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건 지킬게."
됐다. 여전히 난 그녀에게 우위에 서있을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이번 일... 당신 말대로 잘 해결 되면..."
그녀는 차마 뒷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내뱉었던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지. 만일 정말로 잘 해결되면, 당신과 나 사이의 계약을 한 달 더 연장하는 걸로.
그리고 해결 될 때까지는 우리집엔 더 올 필요 없어.
그래. 한 일주일 쉬는 걸로 하지."
"정말? 그거면 되겠어?"
보라는 한 달만 더 고생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 한 달이면 되지. 세상에 한 달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뭐. 그정도면 나도 질리지 않을까? 벌써 쓸만큼 써봤고 말야."
역시. 난 이 여자의 미움을 사는 법을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얼굴이 매서워졌다.
"당신은 언제고 벌 받을 거야."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분노를 보자, 오늘 저녁 있었던 유희가 떠올랐다.
좋다.
니키타 로마노바의 가슴시린 분노도, 이웃의 고결한 부인 보라의 차가운 증오도.
무엇 하나 버릴 수 없다.
"지옥에나 떨어져."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틀림없이 지옥엔 내 자리가 예약되어 있을테지.
그건 하나도 두렵지 않다.
단지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가능하다면 내가 괴롭혔던 여자들과 함께 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정도?
그리고 앞으로 괴롭힐 여자들도 마찬가지.
보라는 내가 준 서류 따위를 전부 챙겨 휙 자리에서 일어나 수영장을 나가버렸다.
아! 한 번 할 걸 그랬다.
방금 보라의 그 화난 얼굴을 보니, 그냥 보낸 게 아쉽다.
그건 그렇고, 그 남자도 역시 남자였구나...
난 노트북 속 동영상을 하나 찾아 재생했다.
유아영이란 여자가 감사실에 주려고 했던 바로 그 동영상이다.
영상이 시작되면 서류철로 가득한 창고 같은 곳에 두 남녀가 마주보고 서있는 장면이 나온다.
여자쪽은 약간 후방이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고, 남자쪽은 정면이라 누군지 바로 알 수 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냥 평범한 대화였다. 직장에서 있을 수 있는.
단지 남자의 목소리가 꽤나 부드러웠고, 여자의 목소리에도 호의가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느껴지는 정도이다.
그러다가 남자가 여자에게 한발자국 다가서며, 그녀에게 키스를 한다. 여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팔을 들어 남자를 밀어낸다.
남자는 머쓱한 얼굴로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김한성 씨 그렇게 안 봤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전과는 달리 무척이나 화난 목소리다.
"아니... 그. 난... 우리 사이가..."
"우리가 뭐요?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요? 같이 시청에서 근무하는 동료 아니었나요? 김한성씨는 같은 동료한테는 마음대로 이렇게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나보죠?"
여자의 똑떨어지는 음성. 누가 봐도 난데 없는 기습 키스에 항의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미안해. 내가 우리 사이를 오해했었나 보내."
결국 남자가 사과를 한다.
"오해라뇨? 오해할 게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 김한성씨 나 결혼한 거 몰랐어요? 그리고 김한성씨도 유부남 아닌가요?"
여자가 한동안 몰아쳤고, 김한성은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고 말았다.
"좋아요. 이번 한 번은 오해라고 생각하고 넘어갈게요. 다시는 이런 일 없었으면 좋겠어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사과를 하고, 이런 행동은 않겠다며 뒤로 돌아나갔다.
여자는 남자가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카메라가 있는 쪽으로 와서, 카메라를 잡는다.
동영상은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너무나도 명백하게 김한성이 유아영에게 추행을 한 증거 영상이었다.
빼도박도 못할 영상. 이게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김한성은 그녀의 고발에 아무대답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마 이런 영상이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 지금 잡아떼고 있는 것이지.
뭐. 자신의 인생이 걸려있으니 어쩔 수 없을 터이다.
그런데 그녀의 스마트폰에 들어있던 김한성의 동영상은 그 하나 뿐이 아니다.
비슷한 장소, 비슷한 구도로 두 사람이 대화하는 모습이 찍혀있는 영상이 여럿이다.
단지 다른 영상에서는 그저 대화를 나누는 장면만 찍혀있다.
그 한 번을 제외하고는 김한성은 여자에게 키스는 커녕 손 한 번 올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충분히 추론이 가능하다.
그녀는 세팅을 해 놓고 김한성이 낚이기를 기다렸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마지막 한 번의 그런 장면을 위해서.
그리고 카메라에 잡히지 않는 그녀의 표정은 과연 어떤 종류였을까?
유혹의 눈길은 아니었을까?
날 안아달라는 무언의 신호는?
어쩌면 이 동영상들이야말로 김한성의 무고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걸 보라에게 넘기지 않았다.
이건 보라가 보아서도, 결코 공개되어서도 안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보라이다.
남편의 배신에 화가나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합리화하려는 보라의 모습은 절대로 보고싶지 않다.
터무니없이 나쁜 놈이다.
하하...
그건 그렇고... 내가 느끼기에 보라의 남편은 조금은 그 유아라에게 반해있었나 보다.
그 여자 결코 보라에 비해 이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까 백 명의 남자에게 물어보면 80명은 보라의 손을 들어줄터이다.
뭐. 그래도 남자란 짐승들은 원래 바깥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것이 본능 같은 것이지.
조금은 실망했다. 난 보라의 남편도 보라처럼 자신의 배우자에게 충실했으면 했었다.
그러니까 그녀가 이 동영상들을 볼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차라리 그 남자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시청에서 잘리고, 인생이 망가지는 한이 있어도 그건 안 된다.
그래서 난 그 동영상들을 전부 삭제해버렸다.
아까 유아영과 소 비서의 대화에서 듣기로 복사본은 없는 것이 틀림없다.
이게 없어지면 고고한 이웃의 부인 보라씨 남편이 잠시라도 한눈을 판 증거는 세상에서 사라진다.
- 영상물 유통 번호 AVM-008이 마켓에 출시되었습니다.
이웃의 부인 보라씨의 잠입 수사물이 출시됐다.
'특별 잠입 수사관 - 배신자를 찾아라'
내용은 실제와 조금 달랐다.
여자 잠입 수사관은 정부 내의 배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공무원으로 잠입해 용의자를 찾아냈지만, 진짜 배신자는 다름아닌 자신의 상관이었다는 비극적인 내용이다.
멋진데!
그 어떤 성인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열연이다.
스토리가 있는 성인물을 볼때면, 배우들의 연기에서 늘 아쉬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녀들이 연기를 공부한 배우가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보라 씨의 연기는 정말로 리얼했다.
당연하지. 연기가 아니니까.
상관에게 배신당한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의 그 눈빛은 정말 멋졌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쾌락에 허덕이는 모습은 또 성인물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 또한 너무나 대단했다.
참!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다음 번 그녀에게 다시 잠입 수사관의 코스플레이를 활성화한다면, 그녀는 이번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전부 잊어버리고, 다시 새롭게 날 믿을 수 있는 상관으로 생각할까?
그걸 생각하니 짜릿해졌다.
어느쪽이라도 좋다.
완전히 리셋을 한다면 또 한 번 배신하는 맛이 있을 터이고, 기억을 하고 있다면 또 나름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니 무슨 대기 시간이 한 달이나 되는 거지? 그건 꽤 마음에 들지 않는다.
Epilogue
보라의 남편 문제는 잘 해결된 것 같다.
바로 다음날 보라가 우리집에 방문했다.
"어제 그사람한테 당신이 준 자료들 전부 넘겼어. 남편이 굉장히 고마워하더라고. 꼭 인사를 하고 싶다고 하던데. 난 절대 그쪽에서 밝히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 그걸 준 사람도 불법적으로 넘겨준 거라, 곤란하다고."
남편에게 둘러대는 문제는 나름 해결을 한 모양이다.
"그 사람이 그걸로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어. 여하튼 오늘 오후에 그사람에 대한 감사는 더이상 없을 거라고 알려왔다네. 고마워."
그녀가 허리를 숙여 내게 인사를 했다.
그래도 옷은 벗고 싶지 않았는지, 현관에서 한 발자국도 들어오려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주에 보자고."
"알았어. 그럼..."
아... 정말로 고마워하면 안 되는데...
그녀를 괴롭힐 강도 높은 방도를 찾아야겠다.
난 절대 그녀가 나에 대해 호의를 갖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얼마 뒤에 난 보라에게서, 그 유아영이라는 여자에게 여러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소 비서관과의 사이를 어떻겐가 알아내고, 시청으로 찾아와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고 한다.
남편도 공무원, 여자도 공무원, 그리고 정부도 공무원인 희대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닌 모양이다. 유아영과 소비서관이 거의 벗은 모습으로 다정하게 있는 사진이 시청 직원들에게 유포되었단다. 물론 유포한 사람의 신원을 밝혀지지 않았다.
뭐. 다른 사람은 몰라도 보라와 난 그 일을 저지른 자가 누군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보라의 남편, 생각보다 뒤끝이 있다.
결국 소 비서관도 그 여자도 더이상 공직에 남아있질 못하게 된 모양이다.
뭐. 법적으로 싸우는 방법도 있겠지만, 낯뜨거워서라도 얼굴을 들고 시청에 나타나기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호원 시에서 추진중인 시민 구장의 건설은 아무 문제없이 차근차근 진행중인가보다.
운동장이 들어서는 장소가 사람들이 접근하기 불편한 외진곳이라는 사실이나, 그린벨트가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시에 수용된다는 사실도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그 김 비서가 그 대단한 자료로 무얼 했는지는 알지 못한다.
일개 비서관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그 일에 처음부터 관여되어 있었는지 따위의 일은 난 전혀 알 수 없다.
또 내 상관할 바도 아니고.
난 그저 이쁜 보라씨를 불행에서 구해낸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한다. 처음부터 원한 것도 그것 뿐이고.
어?
그러고보니 나 굉장히 착한 놈이었잖아?
왠지 기분이 나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