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8. 잠입 수사관 니키타 로마노바의 비극
보라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라텍스 제복을 벗고, 깔끔한 회색 정장 투피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도수 없는 안경을 찾아 얼굴에 썼다.
그렇게 옷을 갖춰입고 아마도 남편의 것인듯한 가죽 재질의 서류 가방을 들고 굽이 높지 않은 구두를 신고 나니 영락없이 오피스 레이디의 모습이다.
그것도 굉장히 매력 있는 여직원이다.
어느 회사이든 그런 여자 직원이 있다면, 누구라도 반하고 말 것 같았다.
그렇게 완벽한 직장 여성의 모습으로 집을 나선 잠입수사관 니키타 로마노바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호오... 지난번 지연 때에도 느꼈지만, 코스튬카드는 사용한 대상을 정말로 그 역할에 완전하게 몰입시키는 모양이다.
과연 그녀가 오늘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아파트를 나선 것을 확인하고 나도 집을 나섰다.
보라의 모험이 궁금하기는 했지만,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
지하철을 타고서 다시 모니터를 사용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차피 회사에 도착할 때까지는 달리 할 일도 없다.
보라는 택시를 타고 남편이 근무하고 있는 시청에서 내렸다.
그녀가 민원실을 지나, 신분증이 필요한 검색대 앞에 다가설 무렵, 보라는 자기 옆을 지나치는 한 남자에게 슬쩍 부딪쳤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낯선 미인 여직원의 사과를 받은 젊은 남자는 웃음가득한 얼굴로 오히려 사과한다.
남자가 사라지고, 잠입 수사관의 손에는 신분증이 들려있다.
와! 만일 보라가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얼마나 당황할까?
문득 그녀가 마트에서 도둑질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의 니키타 로마노바의 기술에는 전혀 따라갈 수 없겠지만, 보라는 어쩌면 저런 일에 정말로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렇지도 않게, 검색대에 전자 신분증을 대고 통과한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이미 남편을 따라 몇 번을 와봐서 길을 잘 알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도라도 외워왔는지, 또각 또각 힐을 신고 거침없이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지나치는 사람들은 그 멋진 여자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워낙에 눈에 띄게 매력적인 여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낯선 그녀의 모습에 수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설정상 그녀는 어디에 있던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때때로 지나치며 눈이 마주치면, 니키타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눈으로 인사를 나눴다. 남자 직원들은 그 눈웃음에 발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는 여기 저기 사무실을 돌아다녔다.
바쁜척 서류를 들척이기도 했고, 괜히 사람들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시청 직원들은 그 낯선 여자가 자신의 일터에 있다는 사실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니키타 또한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사람들과 어울렸다.
괜히 잡담을 하고, 시정의 이런 저런 일들을 꺼내놓기도 하고, 때론 슬쩍 어떤 상사의 흉을 보기도 한다.
보라는 매력있는 여자이다.
그러니까 잠입 수사관 니키타가 아니더라도, 길을 나서면 남자들의 시선을 끌어모으는 여자이다.
그리고 니키타가 되어서는 그런 매력이 아주 한껏 꽃을 피우고 있었다.
남자들은 그녀의 한 마디에 서로 부리나케 대답을 했다.
그녀의 웃음 한 번에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음꽃이 피었다.
여자들도 그녀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같은 공간에 너무 매력적인 여자가 있으면 의례히 있기 마련인 질투어린 시선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보라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게 그녀의 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어쩌면 그녀는 평범한 주부가 아니라 그렇게 사회 생활이 어울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녀의 모습이 어디까지나 설정 때문이란 것을.
보라는 무릇 범인들과 그리 편하게 어울릴 수 있는 여자는 못된다.
그보다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남편이 출세해서 사모님 소리를 듣게 되면 아주 잘 어울릴 것이다.
흠... 그거 아주 괜찮다.
불현듯 재미있는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보라를 사모님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아니다.
그건 너무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보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회사에서 내 할일을 한다.
딱히 보라에게 대단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내 시야에서 저쪽 구석에 밀어놓고 때때로 눈을 돌려 지켜보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렇게 오전 시간이 지나갔다. 그녀는 어느 부서의 직원들과 함께 식당을 가서 식사를 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남자들이 앞을 다퉈 그녀의 물음에 대답을 한다.
그 시간 나는 회사 근처의 5,000원짜리 뷔페에서 제육 볶음을 곁들여 바쁜 식사를 했다.
점심 시간은 대개 나 혼자이다. 우리 부서에 남직원은 나 혼자라 어지간하면 혼자 식사를 하는 편이다.
딱히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여러 여자와 함께 다니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그러니까 균형사업과하고, 도시과하고 요즘 아주 정신이 없는 모양이더라고."
"며칠 전에 보니까, 일양건설 사람들하고 미팅을 자주 하던데... 그쪽 소문이 별로 안 좋은데 말야."
"김 비서 말야, 뭔가 재수가 없던 거 같아. 그 여자 조금 소문이 있던데."
"윤아영씨 남편도 도청에 근무한다고 했었지? 아마."
"윤아영 씨가 전부터 비서실에서 근무하고 싶어한다는 소리 들었어요."
"김 비서가 시장님한테 이쁨을 받으니까 여기저기 음해성 소문을 퍼트리는 사람이 있더라고."
"아무래도 부시장님 쪽하고, 알력이 없지는 않은 것 같아."
"소 비서관이 부시장님 추천으로 들어간 거지?"
소문에 소문에 소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보라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하고, 사람들의 대화를 뒤에서 들어보기도 한다.
그녀는 어떤 자리에 있어도 어울렸고, 또 어디에 있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언제나 거기에 있었던 사람 같았고, 그곳에 있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 어디에 있건,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 자신의 매력을 충분하게 발휘하세요. 이성이든 동성이든 저항하지 못합니다.
코스튬 카드 < 잠입 수사관 >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보라의 일은 대화를 탐문하는 것 뿐이 아니다. 때로는 사무실에서 몇 장의 서류를 복사해서 챙기기도 한다.
그렇게 하기를 얼마일까? 오후 시간이 되어서는 주로 도시과 주변을 맴돌았다. 무언가 실마리가 잡혀가는 모양이다.
그곳에서 새로운 사업에 대한 소문을 취합하던 그녀는 시청을 나가 호원시 시내의 어느 건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건물의 6층 어느 허름한 사무실로 들어선다.
일양건설.
꽤 여럿의 입에 오르내리던 회사로 호원시 토착 건설업체인 듯 하다.
회사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대략 수십 평 정도 되는 사무실에 서너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도 보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
"오 사장님 처제가 제 언니예요."
"다음주부터 여기서 일을 보라고 하시더라구요."
"그럼요. 오 사장님하곤 여러번 같이 했었죠."
너무나도 능청스럽게 다음주에 일을 시작할 직원 행세를 했다.
그리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물어본다면서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니까. 이번 프로젝트만 성사되면, 호원 시에서 우리 회살 따라올 데가 없을 거라고."
강 과장이란 사내는 마치 그 일을 자기가 따낸 것이라도 되는양 으스됐다. 그런 그의 눈은 보라의 풀어져내린 셔츠 단추에서 떠나질 않는다.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사냥감을 점찍은 보라는 단추를 세 개나 풀었고, 대화를 나누면서 상체를 숙여 가슴골을 보여주었다.
때때로 다리를 꼬고 스커트 안쪽을 슬며시 보여주기도 하고, 괜히 검은 스타킹을 만지작거리기도 한다.
고혹적이다. 내가 그녀 앞에 앉아있었어도, 그 유혹의 눈길에서 벗어나질 못했을 것이다.
"그럼 언제 과장님이 술 한 번 사주세요. 호호."
시청에 있을 때와 달리 보라는 잘 줄 것같은 여자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꿀꺽!
강 과장이 침을 넘기는 모습이 쉴새없이 보였다.
그 남자 머릿속에는 지금 어떻게 보라를 넘어트릴까 하는 생각 뿐일 거다.
"근데 작년 수주 금액이 10억 밖에 안 되는데, 그렇게 수백억 짜리 프로젝트를 수주할 수 있어요? 강 부장님 정말 대단하시다."
"뭐. 내가 실력이 있으니까 여기 스카웃 된 거 아니겠어? 흐흐흐."
남자는 여자의 입바른 소리 하나에 구름 위를 떠다니는 모습이다.
"그니까 아연씨도 딱 좋은 때에 온 거야. 사실 작년까지만해도 진짜 힘들었거든. 근데 오사장님이 어떻게 그분이랑 친분이 생겨서말이야."
오 사장이 운영하는 건설 회사는 호원시에서도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받아 겨우 인력이나 제공하는 영세 업체였다.
하지만 어찌어찌 부시장과 연줄이 생긴 모양이다.
"거기 그린벨트만 풀어지면 대박날 사람 참 많지."
핵심은 그것인 모양이다. 평당 가격이 겨우 몇만 원에 불과한 그곳에 시립 운동장 건설이 예정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제대로 된 시공 실적도 없는 일양 건설에 그렇게 큰 일이 떨어지게 된 모양이다.
"시공능력이 그렇게 떨어져도 그런 사업을 할 수 있는 건가요?"
"다 방법이 있지. 기준에 들어가는 회사가 입찰을 넣고, 커미션 먹고, 일은 또 딴데 주고..."
돈이 없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은 인맥이 있으면 된다는 얘기였다.
"그럼 주말에 연락 꼭 줄거지? 내가 지금은 가야할 데가 있으니까 아연씨 연락 기다릴게."
그렇게 자기 자랑 겸 회사 비밀을 잔뜩 털어놓던 강 과장이 볼일이 있다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주말의 약속을 고대하며 나가버린 뒤, 보라는 뻔뻔하게 강 과장의 자리에 앉아 그의 컴퓨터를 마음껏 만지고 있었다.
"윤 대리님!"
그러다가 뭐가 막히는지 경리팀의 직원에게 가서 무얼 물어본다.
"강 과장님이 뭘 좀 시키셨는데, 좀 도와주세요."
보라가 강 과장과 한참을 다정하게 대화하는 모습을 보았던 윤 대리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보라를 도와주었다.
"근데... 다음주부터 근무하기로 했다고 해서 하는 말인데..."
윤 대리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듯 보라에게 속삭였다.
"강 과장님은 좀 조심하셔야 해요. 손버릇이 좀 안 좋거든요."
"어머나! 그래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몰라서요."
"보라 씨가 너무 순수하신 분 같아서 그래요."
"맞아요. 제가 어디서 좀 어리숙하단 소리 많이 들어요. 그래도 윤 대리님 같이 좋은 분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보라는 윤 대리를 향해 인사를 하며 상체를 깊게 숙였다.
윤 대리의 동공이 잔뜩 확장되고, 얼굴이 붉어졌다.
"ERP는 이렇게 하고... 은행 사이트에 들어가서 공인인증서에... 아이... 나 이런 거 다 해낼 수 있나 모르겠다."
보라가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그건 이렇게 하고, 여기서는 이렇게 하면 되고..."
윤 대리는 성심껏 보라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어머나! 나 스타킹이 나갔네... 어쩌지? 이래서는 창피해서 못 돌아다니는데..."
보라는 손톱 끝으로 허벅지 위를 긁어 올을 잘라버리고, 굉장한 일이라도 생긴 모양으로 호들갑스레 엄살을 부렸다.
"아... 그럼 내가 가서 사다드릴게요."
"정말요? 윤 대리님 밖에 없어! 진짜 고마워요. 근데 윤 대리님 이번 주말에 혹시 시간 있으세요? 저 개인적으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이, 있죠. 시간!"
윤 대리는 보라와의 약속을 잡고, 신이 나서 스타킹을 사러 나갔다.
혼자 남은 보라는 이번엔 윤 대리의 컴퓨터에서 필요한 걸 찾아본다. 마침 은행에도 로그인을 해놓은 상태라 좀 더 많은 걸 찾을 수 있었다.
보라는 아주 능숙하게 컴퓨터를 다루고 있었다.
그건 그녀의 능력일까? 아니면 잠입 수사요원의 설정에 포함된 것일까?
지연의 비현실적인 몸놀림을 돌이켜보면, 보라의 컴퓨터 실력도 설정에 포함되었다 해도 조금도 이상치 않다.
보라는 마치 해커처럼 빠르게 컴퓨터의 파일들을 훑었고, 가방에서 꺼낸 USB로 옮겨 넣었다.
그리고 윤 대리가 돌아오자, 계속해서 그의 넋을 빼앗으며 여유있게, USB를 회수했다.
윤 대리로서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보라처럼 매력 넘치는 여자가, 바로 앞에 앉아서 스타킹을 갈아신는 모습을 보았으니, 집에가면 아마 서너 번은 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