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2. 이웃의 도도한 부인은 마트에서 절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내가 들어가기 전에 엘리베이터를 닫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기 전에 내가 올라타는 것이 더 빨랐다.
"진짜..."
그녀가 투덜거렸다.
내가 먼저 왔고, 내가 그녀를 위해 먼저 타게 몸을 비켜주었건만, 그녀는 오히려 날 경멸의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같이 올라가죠. 저도 오늘은 바빠서요."
"전부터도 하고 싶었던 건데, 당신이랑 엘리베이터에 타면 상대가 얼마나 불편할지도 생각 좀 해보라구요."
내가 뭘 잘못 했다는 걸까?
뭐가 문제일까? 이 여자는?
한번 속시원히 말해보라 해보고 싶었지만, 뭐 구태여 싸울 필요까지야. 어차피 그런 도도한 표정도 이걸로 끝이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동영상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스마트폰을 들고 보기 시작했다.
"진짜 시끄럽게... 엘리베이터 안에서 뭐 하는 짓이야? 공중도덕도 모르..."
도도한 부인은 날 보며 또 한마디를 던지다가 스마트폰 화면에 눈이 가고 말았다.
"아!"
소스라치게 놀라는 소리.
"흐음..."
난 모르는 척 동영상을 감상했다.
"다, 당신! 그걸 왜?"
그녀는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다.
"그거... 도촬이에요!! 당장 지워요!"
아까 그 유치원 선생들에게 했던 것처럼 당당하고, 날카로운 음성으로 이웃의 부인이 내게 요구했다.
"그죠? 도촬이라... 범죄네... 아무래도 신고해야겠죠?"
난 그녀를 향해 씩 웃어주었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이웃 부인을 지나쳐 내가 먼저 내렸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고, 현관의 도어락에 엄지손가락을 가져대었다.
"자. 잠깐만!"
여자가 허겁지겁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난 이미 현관문을 열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서 신고해야겠네."
나라도 열 받을 것 같은 능글맞은 목소리도 잊지 않았다.
"기다려! 기다리라고!"
그녀의 목소리를 귀로 흘리고 난 현관문을 닫았다.
쾅! 쾅!
"문열어! 문열지 못해!"
여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는데요? 남의 집에. 시끄럽게. 아래위층 사람들 전부 듣겠네"
"저... 문, 문 좀 열어봐요."
그녀는 더이상 문은 두들기지 않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저기... 아저씨... 옆집 아저씨..."
그녀가 날 그렇게 부르는 것은 처음 본다.
잠시 그녀가 애가 바짝 탈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문을 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여자가 날 노려보며 말했다.
역시 문이 열리자 대뜸 태도를 바꾼다.
"뭐라고요?"
난 싱글거리는 웃음을 띠고 물었다.
"그 동영상! 도대체 그걸 왜 찍은 거야? 뭘 하려고? 그런 짓이 용납될 수 있다고 생각해?"
남들이 보면 내가 잘못하고, 그녀가 옳은 줄 알 것이다. 너무나도 당당하다.
"당장 지우지 못해?"
그녀는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 아직도 잘 파악을 하지 못한 모양이다.
때때로 그런 사람들이 있다. 생각지 못한 사태에서 잠시라도 차분하게 대응 방법을 간구하기보다, 당장에 해결하겠다고 달려들어 사태를 오히려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사람들.
내가 여초 회사에 다녀서 그런지 여자 중 그런 행동을 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여자를 거론했다고, 남자보다 여자가 우월하다거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내가 알기로는 단순히 경험의 문제에 가깝다.
생각하지 못했던 사태가 발생할 때 어떤 대응을 할지 전혀 훈련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경우이다.
그러니까 많은 한국 남자들의 경우에는 군대에서 별 지랄 같은 상황을 겪어봐서, 상정치 못한 상황에서 조금이나마 적응의 준비가 되어있고, 여자들은 그런 기회를 접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 회사의 경우도 연륜이 쌓인 사람은 그렇게 대응하지 않는다. 과장이나 팀장급만 되면, 당황하기보다 사태를 먼저 이해하려 노력한다.
대개 사회 초년생이나, 사회 경험이 부족한 주부들에게서 볼 수 있다.
지금 이 고고한 부인의 태도가 그랬다.
나라면 우선 한 발자국 물러서 잠시 생각해보고 대응 방법을 고려하겠지만, 이 여자는 당장 자신에게 닥친 위기를 윽박지르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이봐요! 내 말 안 들려요? 사람이 말하고 있잖아요!"
그나마 말을 하는 도중 반말에서 반 존대 정도로 바뀐 걸 보면 아주 조금은 이해하기 시작한 것도 같다.
"당장 지우지 않으면 고발하겠어요! 가만둘 것 같아요? 우리 남편이 알면..."
그리고 아무리 당황했어도 시간이 지나면 점차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게 되는 법이다.
남편을 꺼내놓은 여자는 드디어 자신의 처지를 이해한 모양이다.
"그러면 남편분과 상의를 하지요."
"아. 아니... 그건..."
솔직히 세상에 얼마나 많은 여자가 마트에서 도둑질하다 다른 사람에게 들킨 사실을 남편에게 알리고 싶을까?
물론 부부가 비슷한 수준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경우가 더 많다.
부인이 무례하다면, 남편은 무례의 수준을 훌쩍 넘어서 무식하고 적반하장에, 난폭하기까지 한 경우가 많다.
회사에서 고객 상담 팀에 근무하는 동료에게 들으니 상식 없는 여자와 대화를 하다 보면 피가 마를 것 같은데, 그 남편에게 전화가 돌아가면 목숨에 위협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부인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잘 되었네요. 부군께서 시청에 근무하신다고 했었죠?"
그녀의 남편이 공무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것도 상당한 엘리트 공무원. 그런 위치의 사람에게 가족의 사소한 실수도 약점이 될 수 있다.
공무원 내부의 분위기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시장 비서 누구누구 부인이 마켓에서 도둑질하다 잡혔데... 정도의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
물론 당사자가 시장 정도 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하지만 비서라는 것은 원래 쉽게 잘려나가는 자리이다. 밖에서 보기야 엘리트이지만, 내부에서야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머슴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도도한 부인은 남들 앞에서는 꽤나 고압적인데, 부부 사이에는 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무엇보다 남편 쪽이 부인에 비해 나이가 꽤 많아 보이기도 했고, 집안에서의 권위도 그쪽이 우월해보였다.
"안 돼요!"
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 그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사랑 때문인가? 두려워하는 걸까? 아직은 알 수 없다.
더군다나 공무원 신분인 남편까지 연루되면 사태가 어떻게 흘러갈지 대충 예상이 되는 모양이다.
"부탁이에요. 그 동영상... 지워 주세요."
조금 전에 비해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아까부터 대체 무슨 동영상을 말씀하시는 거죠?"
난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아까 마트에서 찍은..."
부인은 지금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분노? 아니면 공포?
"그러니까 무슨 동영상을 말하는 건지, 정확하게 말씀해 주세요."
애처롭게 말하면서도 독기 서린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에게 난 다시 한번 요구했다.
그녀는 아직도 기가 완전히 죽지 않았다.
니 입으로 말해. 무슨 짓을 한 건지.
"제가... 마트에서... 도둑질하는 그 동영상이요."
그녀가 입술을 깨물고 힘겹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야기했다.
"어라? 도둑질이요? 마트에서 도둑질을 하셨군요?"
난 능글거리며 그녀를 조롱했다.
"아! 맞다. 아까 유치원 선생님들이 오셨던 것 같은데."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녀가 싫어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 안 돼요! 절대로!"
그녀가 화들짝 놀랐다. 남편을 거론했을 때보다도 오히려 더 커다란 반응이었다.
"제발 부탁드려요. 유치원... 유치원 선생님한테는 제가 가서 사과할게요."
"음... 뭔가 잘못 알고 계시네요. 그쪽이랑 유치원 선생님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나랑은 관계없잖아요?"
"윽!"
이웃의 고고한 부인은 이제 확실하게 내가 원하는 것이 정의 구현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전 모르는 일이니까 인제 그만 돌아가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동안 난 계속해서 싱글거리며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얼굴에 쓰인 표정은 그녀를 위협하고, 협박하고, 조롱하고 있었다.
"저... 뭐든지 할게요.
그녀는 자리에 주저앉아 내 바짓자락을 잡았다.
마침내 이 사태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깨달은 모양이다.
"미안하지만 난 그쪽한테 원하는 거 없어요."
"제발요. 그거... 그거 신고하면 나 죽어요."
"아니 누가 도둑질 한 번 했다고 사람을 죽인답니까?"
"남편하고... 아이한테... 알려질 수는 없어요. 정말로 죽지 않으면..."
여자의 눈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이 붉어져 있었다.
"좋아요. 그럼 지워드릴게요. 이제 돌아가세요."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날 바라보았다.
"왜요?"
"살려주세요."
"그러니까 지워드린다고 했잖아요."
"믿을 수 없어요."
당연히 믿을 수 없지.
그녀에게 지워준다 말하면서도 난 비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하아. 그럼 어쩌자고요?"
"모르겠어요."
이웃의 부인은 날 바라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자. 동영상은 내가 지울 테니 이제 돌아가셔서 진정하세요. 여기서 이렇게 시끄럽게 굴다가 남편분이 보시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그녀는 내 말에 잠시 고민을 하다가 현관 안으로 한 발자국 들어와 현관문을 닫았다.
그리곤 말없이 내 손목을 잡고 안쪽으로 이끌어 거실로 끌고 들어왔다.
물론 여자의 손아귀 힘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뿌리치질 못할까만, 난 그녀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동영상... 지워주시면 뭐든지 할게요."
그녀가 날 노려보며 말했다.
"뭘요? 아무것도 필요한 거 없어요."
"같이 자... 자줄게요. 그러면 그 동영상 지워줄 수 있나요?"
드디어 원하던 말이 나왔다. 난 적어도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먼저 나오기를 기다렸다.
"네?"
"같이 자줄게요. 그러면 되나요?"
여자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흠..."
난 셔츠 앞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스마트폰을 꺼냈다.
켜져 있는 화면에선 카메라로 찍고 있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털썩! 여자는 아직까지 들고 있던 마트에서 산 물건들이 들어있던 봉투를 떨어트렸다. 정말로 놀란 모양이다.
"그러니까 뭐라고요?"
여전히 싱글거리며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이거 큰일이네요. 남편분이 이걸 보시면 정말 기뻐하시겠군요."
"당신!"
여자의 얼굴엔 지금까지와는 다른 절망감이 가득했다.
부인이 도둑질한 것과 도둑질을 밝히지 않는 대가로 자신의 몸을 제공하겠다고 말하는 것.
둘 중 어떤 것이 더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일까?
"이 비열한 자식!"
당장이라도 덤벼들 것처럼 그녀가 날 노려보았다.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나도 더 이상은 참지 않을 거야."
이제 난 더는 그녀를 존중해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내가 그녀의 도둑질 동영상을 손에 넣은 순간부터 이미 균형의 추는 한참 기울어져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수고로움을 더해, 그녀가 내게 몸을 대가로 주겠다는 동영상까지 확보했다.
그녀가 말을 하는 내내, 난 그녀의 얼굴에서 가슴을 거쳐 아랫도리까지 끊임없이 위아래로 훑었다. 명백하게 희롱하는 시선을 멈추지 않은 것이다. 때로는 혀로 입술을 훑기까지 했다.
그녀도 눈이 있으니 내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고, 결국 지레짐작으로 잠자리 얘기를 꺼내고 만 것이다.
"아아..."
그녀도 이젠 확실히 깨닫고 있는 모양이다.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럼. 우리 이제 협상을 해볼까?"
협박과 협상은 겨우 한 음절 차이이고,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잃을 것이 많은 쪽이 불리하다.
물론 법률적으로야 그녀가 반드시 불리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법정에 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이 동영상을 가지고 법정까지 끌고 간다는 것은 그녀에게 있어서 인생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 부담이 크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엘리트 공무원인 남편이 마트에서 도둑질하다 걸리고, 협박까지 하던 아내를 어떻게 대할까?
솔직히 그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으니, 예측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부부에 있어 엄청난 위기가 올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잠시 동안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세상 그 누구보다 밉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을 뿐.
"알았어요. 시키는 대로 할게요."
마침내 결정을 지은 모양이다. 여자는 머리를 숙였다.
"우선 전화기 좀 줘봐."
그녀가 이 집으로 들어오기 전에 전화기를 건드리지 않은 사실은 인터폰으로 지켜 보고 있어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그녀가 스마트폰으로 몰래 녹화나 녹음을 시도할 수도 있다.
"비밀번호? 패턴?"
난 비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물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