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1. 나를 남자로 보지 않던 여사친이 짓궂은 장난을 치며...
전화벨이 울린 것은 퇴근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남겨진 금요일 오후였다.
"나다. 뭐하냐? 바빠? 사무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평상시와 다름없는 목소리의 그녀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쉴새 없이 질문을 던졌다.
"야! 진짜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나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반가움을 남김없이 표출했다.
우리는 꽤 오랫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왔다.
언제인가 은희의 남자 친구가 나와 그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불편함을 표한 다음부터였다.
뭐 대단한 짓을 한 것은 아니다.
그저 몇 번 정도 만나 가볍게 차를 한 잔 마시고 헤어졌고, 특별한 날이 오면 문자 메시지를 통해 간단한 인사말을 주고받은 것이 전부이다.
은희도 나도 평범한 상식을 지닌 사람들이라, 각자 애인이 생기면 굳이 오해를 살만한 일은 자제하려 노력한다.
남사친, 여사친 사이의 조심성 없는 행동이 각자의 연인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은희의 남자 친구는 그런 평범한 문자 메시지도 불편한 모양이었다.
솔직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다. 이런 경우라면 무심하게 행동한 나와 은희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녀가 사정을 설명했고, 난 연락을 끊는 것에 흔쾌히 동의했다.
"잘 못지냈어."
인사가 오간 뒤 그녀의 목소리 톤이 낮아졌다.
뭔가 심기가 좋지 못한 모양이다.
"너 남친이랑 싸웠구나?"
본능적으로, 혹은 그간의 경험으로 난 그녀에게 생긴 일을 추측할 수 있었다.
"아. 진짜. 짜증 나니까 묻지 마."
은희의 투덜거림이 수화기 너머에서 생생하게 전달되어왔다.
"안 됐네. 크크크"
뭐 우리는 서로의 불행을 다독거려주는 사이는 아니다. 그보다는 서로의 불행에 대해 키득거리며 갈굴 준비가 되어있다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아. 시끄러. 너 어디야? 술 한잔할려구 했는데, 오늘 뭔 날이냐? 다들 바쁘데!"
"지금 퇴근 준비하고 있어. 한 십 분 정도 있으면 나갈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글로 와."
그녀와 친구들이 늘 모이던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그녀가 먼저 도착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어. 어서 와."
그녀가 내게 맥주를 따라 주었고, 우리는 건배를 하고 한 잔씩 비우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요즘은 뭐 하고 지냈어?"
"응? 너 혹시 내 SNS도 안 보고 살아?"
"SNS? 그걸 왜 봐? 그거 보다가 내가 좋아요 라도 누르면 남자 친구가 뭐라 할 거 아냐?"
"아 진짜... 그럼 딴 아디로 보면 되지. 무심한 자식."
그녀는 억지로 쑥스러움을 참으며 스마트폰을 켜고는 자신의 SNS를 보여주었다.
"와. 화끈한데?"
가장 위에 올라온 사진은 정말 딱 가려야 할 부분만 가리고 있는 비키니 사진이었다.
다른 사진들은 대부분 평상복 차림으로 카페나 식당에서 찍은 사진이나, 조금 달라붙는 옷이라도 가릴 것은 전부 가리고 찍은 운동하는 사진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가장 최근에 올라온 게시글에만 그런 비키니 사진과 동영상까지 몇 장이나 들어있어 확연하게 대비가 되었다.
"그지? 이 누나가 좀 핫하다 이거지. 흐흐흐"
"이거... 때문에 싸웠냐?"
내가 알기로 그녀의 남자 친구는 조금, 아니 요즘 사람치고는 꽤 보수적이다.
자신의 여자 친구의 비키니 사진을 공개적으로 올리는 것에 흔쾌히 기뻐할 남자가 결코 아니다.
"하아... 사실 어지간하면 맞춰주고 싶은데..."
하지만 얼마 전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요가 학원을 열었는데, 그때부터 문제가 생긴 듯 하다.
아무래도 요가 학원 홍보를 위해서는 강사들이 열심히 SNS를 해야 하는 것 같다.
"요즘 누가 전단지 보고 와? 다들 인스타 아니면 틱택이지."
그리고 SNS 홍보를 위해서는 역시 팔로워 수가 가장 중요하고, 팔로워를 늘리기 위해서는 노출 사진이 필수적인가 보다.
"그걸로 같이 일하는 사람들하고도 좀 불편해졌고..."
사실 그녀 스스로가 그런 노출 사진을 꺼려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녀가 지금까지 남자 친구에게 맞춰왔던 것이 이번 일을 계기로 터져 나온 모양이다.
"이 사진... 확실히 효과가 있는 모양이네..."
그 비키니 사진에 달려있는 좋아요 수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니까. 그거 하나로 팔로워가 두 배가 넘게 늘었거든."
역시 팔로워를 늘리는 데에는 노출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그래서 요즘 좀 냉전 중이야."
그녀는 하소연을 마치고는 맥주 한 잔을 아주 시원하게 비워버렸다.
"으으... 오랜만에 마시니까 너무 좋다."
"설마 술도 못 마시게 하는 건 아니지?"
"그럴 리야. 그렇게 못난 사람은 아니야. 요즘 몸 만드느라 먹을 거에 엄청 신경을 써왔거든."
멋진 몸매를 만들고, 한껏 강렬한 사진을 찍어, 팔로워를 늘려 광고를 해서 학원을 성공시킨다.
그녀의 소박한 희망인 모양이다.
나름 그걸 위해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남자 친구가 말은 하지 않아도 뚱해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고 동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하자니 또 속상한 모양이다.
결국 하소연할 곳은 친구뿐이란다.
"그래. 나한테는 얼마든지 해도 돼."
"됐어. 오랜만에 만났는데 뭐 그런 얘기로 날 샐 거 있냐? 그런데 넌 요즘 어떻게 지내? 여자 친구는?"
"없어."
"계속 그런 거야? 어구 불쌍해라. 이 누나한테 말하지. 그럼 또 이쁜 여자 친구 소개해 줬을 텐데."
"됐네. 이 사람아. 한 번이면 충분하네."
한참 만에 만났어도, 우리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거침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맥주병이 비어 갔고, 그녀의 목소리가 점차 가벼워졌다.
"그래서 요즘은 쌓인 걸 어떻게 풀어? 어디 오피라도 가는 거야?"
"가겠냐?"
원래부터 그녀는 거침이 없었다. 섹드립도 부담 없이 튀어나왔고, 술이 들어가면 서로의 경험도 꺼내놓기도 했었다.
"넌 어때. 갑갑한데도 그렇게 오래 사귀는 걸 보면, 어지간히 좋은가 봐?"
"음... 솔직히 그렇게 좋은 건 아냐. 사람이 뭐랄까? 조금 옛날 사람? 고지식? 여튼 그래.
사실 꽤 많이 부딪치는데, 어지간하면 내가 양보하고 있어. 워낙 그런 사람이니 어쩔 수 없잖아."
"뭐야. 그럼 밤일이라도 잘하는 모양이네."
"그니까 말야! 그건 또 잘한다니까."
자기가 참고 사는 이유는 전적으로 남자 친구와 속궁합이 너무 잘 맞아서라고 했다.
"그럼. 참아야지. 그게 잘 맞는 사람 찾기가 뭐 쉬운가?"
"그런가? 맞다. 너 예전에 지아랑 사귈 때, 걔가 그랬는데. 너 장난 아니라고."
뜬금없이 은희는 내 옛 애인의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그녀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내가 지아와 사귄 것은 은희가 소개시켜준 덕이었다.
은희의 친한 후배였고, 은희가 중간에서 굉장히 열심히 다리를 놓아주었었다.
"기억이 나. 지아가 그때 너랑 하는 거 엄청 좋아했는데...
그런데도 헤어진 걸 보면 확실히 속궁합이 전부는 아닌가 봐."
은희는 비웃는 것인지, 놀리는 것인지 알기 어려운 게슴츠레한 눈으로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내 옛 애인을 소환했다.
"술이나 먹어."
어쩐지 은희와 지아의 이야기를 나누기 싫어져, 난 맥주잔을 거푸 비웠다.
"내가 괜한 얘기 꺼낸 거야?"
은희가 미안한 표정으로 상반신을 앞으로 숙여 내 머리를 어루만졌다.
아... 그녀의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난 그녀의 가슴골을 정확히 내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자식. 이거 미안하네... 응? 너 뭘 봐?"
"생각보다 크네..."
어차피 들킨 거 난 당당하게 나가기로 했다.
"이게! 어딜 공짜로 훔쳐보고."
"친구 사이에 볼 수도 있지 뭐."
"무슨 개소리야. 아무리 친구라도 가슴을 훔쳐보냐? 보고 싶으면 돈 내고 봐!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응? 그래. 오늘 술은 니가 사는 거다!"
"겨우 가슴골로 바가지냐?"
"좋아! 오늘 니가 전부 쏘면 내가 화끈하게 보여주지. 크크크"
술이 취한 모양이다. 그녀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셔츠의 목 부분을 슬쩍 잡아당기고는 안쪽을 보여주었다.
그래봤자 브래지어가 가릴 건 다 가리고 있으니, 볼 수 있는 거라고는 가슴 윗부분이 전부였다.
"됐지? 이거 남친 말고는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는 거니까 아주 비싼 거야. 흐흐흐"
"뭐. 술이야 사지. 그렇다고 그 잘난 가슴 보여준 대가는 아냐."
"푸하하하! 아니긴..."
그녀는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꺄륵 꺄륵 대며 좋아했다.
그리고도 한참을 더 마셨다.
각자 사는 이야기를 했고, 그녀의 남자 친구 험담을 했고, 때때로 야한 농담도 했다.
"이제 나갈까?"
술집에 들어와 시간이 꽤 흘렀다.
"음. 그래. 이제 옮기자."
그녀는 아무래도 여기서 마치고 싶은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더 마실 수 있겠어?"
아직 취할 만큼 마신 것은 아니지만, 시간은 꽤 되었다.
"한 잔만 더 하고 가자. 웅? 오늘 너무 재미있단 말야."
어울리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럼 가벼운 걸로 하자. 더 취하면 집에 가기 어렵잖아."
"뭐. 취하면 니가 책임져야지. 키키키. 잘 하면 너 오랜만에 끅!"
워낙에도 섹드립에 부담이 없는 그녀였는데, 오늘은 유달리 더했다.
"어디로 갈까? 먹고 싶은 거 있어?"
"웅? 잠깐만..."
번화가의 한복판에서 한 바퀴 돌아보던 그녀가 방향을 정했다.
"저리로 가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고 간 곳에는 편의점이 있었다.
"이거랑, 이거랑..."
캔맥주 몇 개와 마른안주 따위를 골라 편의점을 나와서는 다시 그 뒤편의 건물로 향했다.
"저기서 쉬었다가 가자."
우리가 도착한 곳은 번화가에서 골목 하나 들어가 서 있는 핑크색 간판이 붙어있는 모텔이었다.
"좀 편하게 마시고 싶어서 그런 거야. 너. 이상한 생각 하지 마!"
내 손을 끌고 자기가 모텔비 계산까지 하며, 그녀는 결코 다른 의도가 없다고 항변했다.
"설마 너한테 그런 생각을 하겠냐?"
우리가 좀 더 젊었을 적엔, 다른 친구들과 함께 종종 모텔에서 밤이 새도록 마시고는 했었다. 물론 그때에도 술을 마시고 게임을 하는 이상의 행위는 없었다.
나와 은희의 관계는 정말로 친구, 그 이상이었던 적은 없다.
그녀와는 꽤 맞는 부분이 많았다. 음식의 취향이라든지, 대화의 결이라든지.
그러니까 연인 사이로 발전했다가 사이가 벌어질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그녀 또한 날 그냥 친구로만 받아들였고, 아마도 그래서 더더욱 그녀가 거침없이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아! 편하다."
모텔 방에 들어가 바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우와! 우리 같이 이런데 온 게 얼마 만이야?"
은희가 웃으며 말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오해 하라지. 너랑 나랑 우리 둘이 진실을 알고 있으면 그만 아냐?"
"그래. 그래도 니 남친이가..."
"됐어. 그 쫌팽이! 나 헤어질 거야! 흥!"
괜히 이야기를 꺼낸 듯하다.
"아아 피곤하다. 먼저 씻을래?"
은희가 음흉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녀의 얼굴에 가득한 웃음이 장난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씻겠냐?"
티테이블을 그녀 앞으로 옮기고, 사 온 맥주 따위를 꺼내며 말했다.
"그지? 크크크. 자 마셔."
맥주 캔을 따서 하나씩 들고 다시 술자리를 이어갔다.
그리고 오늘따라 그녀는 전보다 잘 웃었고, 전보다 과감했다.
"잠깐만... 나 답답해서..."
맥주 한 캔을 비우고 나서, 그녀는 취기가 오른다며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고 꿈틀거리더니 무언가를 휙 빼버렸다. 붉은색 브래지어였다.
"응큼한 생각하지 마. 덥고 갑갑해서 그런 거니까."
"하겠냐?"
"하긴. 크크크."
그녀는 웃으면서 자신의 브래지어를 침대 위로 휙 던져버렸다. 그리곤 다리를 구부려 스타킹도 벗어버렸다.
"너도 갑갑하면 벗어."
"됐네."
우리는 다시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언뜻언뜻 그녀를 바라볼 때면, 셔츠 아래로 젖꼭지가 비추는 듯했지만, 그녀는 술에 취해서인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니까. 지아 요새 만나는 사람이... 아! 미안. 내가 좀 푼수 같지?"
"괜찮아. 지아 얘기 들어도 아무렇지 않아."
정말이다. 헤어진 지도 벌써 두 해나 된 옛 애인의 연애 소식 따위에 연연할 만큼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다.
내 대답에 여유가 생겼는지, 은희가 그녀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래서 그때 지아가 그러는데 너랑 다시 사귀고 싶지는 않은데, 너랑 했던 잠자리는 계속 기억난대. 대단해."
그녀는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펴 보였다.
"뭐. 딴 건 몰라도 그거라면 어디서 빠지지 않지."
뭐 예전 여자친구가 밤일을 칭찬했다는 소리에 기분이 나쁠 이유는 없다.
"너 그거 졸라 크다며?"
은희는 내 아랫도리를 바라보며 두 손으로 내 물건 크기를 묘사하고는 깔깔대며 물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