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58 외전 -비가 내리는 날에는- =========================
밖에서 고요한 빗소리가 들려왔다. 추적 추적, 창문을 두들기며 맺히는 물방울이 동그랗게 뭉쳐져 미끄러지듯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어릴 때는 빗소리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어른이 된 지금도 좋아하지만, 어릴 때는 비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정도였다.
비가 내리는 소리와, 차가운 감촉을 전신으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더없이 즐거웠다. 때로는 빗소리를 반주삼아 책을 읽기도 하고, 평소에는 장화를 신고 우비를 입은 채 빗속을 걷곤 했다.
비가 모든 것을 씻어주는 것만 같았기에, 이 세계가 모두 비로 물들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했다.
어릴 때부터 소심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길었던 나였기에, 늘 집에서 책만을 읽었지만 이 날만큼은 달랐다. 빗속의 개처럼 방방 뛰면서 비를 맞고, 실컷 웃으면서 거리를 돌아다녔다.
간간이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보기도 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빗속에서 상대가 누군지는 잘 보이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은 이런 일은 쉽게 잊어버리니 말이다.
의젓하고, 어른 같이 굴던 내가 유일하게 어린애처럼 뛰어놀던 거리가 떠올랐다. 물 웅덩이를 밟으면서 튀기는 물의 감촉에 배시시 웃으면서 ,차가운 비가 온몸을 적셨을 때의 감각을 말이다.
다음날 컨디션 조절을 못해서 감기라도 걸린 날에는 실로 드물게 엄마의 간호를 받을 수도 있었다. 지금은 없지만 말이다.
"...하아."
나도 모르게 숨을 내쉬었다. 읽고 있던 책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책갈피를 끼운 다음 덮었다. 덮은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서 창문 밖을 응시했다.
시원하게 내리는 비는 거의 폭우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 아저씨들은 이런 날에 파전에 막걸리를 먹고 싶다고 했었지. 파전도, 막걸리도 먹어본 적은 없지만 왠지 맛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대학생 여자 혼자서 파전을 먹으러 가기에는 조금 껄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도 보일 뿐더러, 어쩐지 청승맞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포기해야 하나,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문쪽에서 똑똑하고 소리가 울려퍼졌다.
'...?'
고개를 갸웃했다. 이 부실에 올 사람은 두 명 뿐이다. 태훈과 유민 언니. 하지만 유민 언니는 최근 무척이나 바빠보였으니 한가하게 자신을 찾아오거나 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소거법으로 봤을 때, 지금 밖에 온 사람은 아마 태훈이리라. 그리고 그 예상을 증명하듯이 철컥하고 열쇠를 꽂는 소리와 함께 문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들어온 태훈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으아아... 비 엄청 오네. 송희 누나. 밖에 비 오는 거 모르죠?"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어요? 이제 막 집에 가려는데 갑자기 확 쏟아져서.......어우."
옆의 선반에 놓여 있던 수건을 집어 들어서 내게 들어보인 태훈에게 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태훈은 그걸로 자신의 얼굴을 닦은 다음 머리를 털기 시작했다.
'저거, 내가 샤워하고 나중에 빨래하려고 갖다놓은건데.'
태훈이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졌지만 비를 쫄딱 맞은 사람한테 할 장난은 아닐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렇게 나는 천천히 태훈에게 다가가서 태훈이 자신의 머리를 털고 있는 수건을 받은 뒤 뒤로 돌게했다.
"어? 누나?"
"...가만히 있어."
키 차이가 있어서 까치발을 들어야했지만 손을 뻗으니 간신히 닿았다. 나는 수건을 들어서 그의 목덜미와 머리 뒷부분, 그리고 귀를 천천히 닦아주었다. 비에 젖었을 때 귀에 물이 들어간걸 닦거나 하지 않으면 감기 걸릴 확률이 올라간다.
이런걸 어떻게 아냐고? 물론 경험담이다. 태훈이 감기에 걸려서 내가 그걸 간호해주는 것도 재밌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건 보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속으로 후후 웃으면서 태훈의 머리를 닦아주었고, 태훈은 내 손길을 느끼면서 기분좋은 콧소리를 냈다. 그렇게 한참을 닦자 그제서야 쫄딱 젖은 태훈의 머리가 제상태로 돌아왔다.
"드라이기 줄까?"
"고마워요 누나."
나는 구석에 있던 드라이기를 태훈에게 건넸고, 태훈은 드라이기로 자신의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건 그렇고 옷이 잔뜩 젖어서 그런지 부실 안으로 들어오질 않고 있는 태훈을 보니 조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옷은...안 갈아입게?"
내가 조심스레 묻자 태훈이 움찔했다. 그리고는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손사래를 쳤다.
"갈아입을 옷도 없고, 송이 누나 앞에서 옷 갈아입는건 약간 부끄러워서요."
"...옷, 있어."
나는 구석에 놓여 있는 옷장을 열고 남녀 공용 셔츠와 반바지를 꺼내들었다. 혹시나 태훈이 옷을 갈아입어야하는 상황이 있을까 싶어서 유민 언니한테 부탁했었는데, 이럴때 쓰게 될 줄이야.
내가 꺼내든 셔츠와 바지를 번갈아본 태훈은 멋쩍게 웃으면서도 받아들었다. 그리고 나는 바닥에 앉아서 태훈을 지그시 응시했다.
"...저기, 송희 누나? 나 옷갈아입을건데..."
"........"
"누나?"
"........"
"......."
내가 여전히 빤히, 그것도 기대하는 시선으로 바라보자 태훈은 한숨을 내쉬면서 천천히 웃옷을 벗었다. 그리고 드러난 탄탄한 복근이 잡힌 몸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와... 나는 잠시 속으로 감탄했다. 딱히 복근에 감탄한게 아니었다. 그저 나와 태훈이 처음 만난지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그 때의 태훈은 분명 저런 복근이 없었다. 오히려 약간 마른편이었기에 운동을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저렇게 탄탄한 복근을 가지고, 거기다가 왠지 모르게 키도 좀 큰 것 같았다.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건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저런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부러웠다.
늘 방구석에서 책만 읽는 나로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태훈의 웃통을 빤히 쳐다보자 태훈은 벗은 셔츠를 구석에 개놓은 뒤 황급히 내가 건넨 셔츠로 갈아입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입맛을 다시면서 태훈을 계속 응시했고, 태훈은 머뭇거리면서도 결국 바지를 끌어내렸다. 태훈은 푸른색의 사각팬티를 입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팬티는 비에 젖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태훈은 실로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곧바로 내가 건넨 바지로 갈아입었다. 자세히 볼 틈도 없었지만 이미 팬티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기 때문에 그렇게 신경쓰진 않았다.
그렇게 태훈이 모두 옷을 갈아입은 다음 내게 물었다.
"송희 누나는 오늘도 여기서 잘 거에요?"
"...응."
내 말에 태훈이 흐음하고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그럼 저녁은요?"
"...그냥, 간단하게...컵라면..."
"에헤이, 비도 오는데 그런 거 먹으면 더 안 좋아요. 하다못해 제대로 밥을 먹어야지."
태훈의 꾸중에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생활력이 빵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컵라면, 피자, 치킨, 이런 기름진 것들만 먹는게 일상이었다. 이런 음식만 먹는데 살이 안 찌는게 미스터리라면 미스터리였다. 기왕이면 가슴이 좀 쪘으면 좋을텐데 말이다.
가끔 태훈이 요리실력을 발휘해서 밥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도 드물게였다.
그렇게 내가 뭘 먹어야하지 고민하던 도중 방금 전의 그게 떠올랐다.
"...파전..."
"네?"
되묻는 태훈에게 다시 말해줬다.
"파전이랑...막걸리, 먹어보고 싶어."
"송희 누나가 뭐 먹고 싶다고 하는건 되게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흠, 좋아요. 마침 대학로 술집 중에 그런 곳이 있으니까. 근데 거긴 좀 시끄러울텐데 괜찮겠어요?"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아저씨들도 슬슬 술판 벌이고, 거의 다 남자들일텐데. 라는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태훈이랑 함께라면 딱히 다른 사람이랑 있어도 상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 수긍에 태훈은 갑자기 내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면서 껴안았다. 이렇게 애 취급을 하는게 별로 기분 좋지는 않았지만 태훈이 즐겁다면 어쩔 수 없다고 속으로 중얼거린 나는 태훈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약간 크고, 투박하지만 묘하게 부드러운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그렇게 태훈의 손길을 즐기면서 나갈 채비를 했고, 비에 젖어도 상관없는 셔츠와 허벅지가 다 드러나는 핫 팬츠를 입었다.
오랜만에 비에 잠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갈 때는 태훈과 함께니까, 그리고 음식점에 들어가야하니 어쩔 수 없지만, 돌아올 때는 비에 푹 잠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를 쓰다듬던 태훈은 내가 채비가 다 되자 입구 옆에 걸려 있던 우산을 꺼냈다.
"...어?"
그렇게 우산을 꺼내려던 태훈은 의아한 소리를 흘렸다. 아, 그러고보니 우산 한 개 밖에 없을텐데.
"괜찮아, 큰 우산이니까."
내 말에 태훈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면서 우산을 꺼내들었다.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닌데... 뭐, 상관없겠죠."
그렇게 말한 태훈과 함께 부실을 나선 나는 태훈이 든 큰 우산 안으로 들어갔다. 은근슬쩍 태훈에게 딱 달라붙자 태훈이 간지러워했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저기 누나, 이거 너무 붙은건..."
"떨어지면 비 맞는걸."
"...알겠습니다."
결국 내 말에 수긍한 태훈은 얌전히 걷기 시작했다. 확실히 남자라 그런지 보폭이 컸는데, 간신히 따라가던 도중 태훈이 날 쳐다보더니 갑자기 보폭을 늦추기 시작했다.
마치 내 보폭에 맞추듯이 말이다. 그런 태훈의 행동에 나는 작게 미소지으면서 태훈과 팔짱을꼈다. 태훈은 움찔하면서도 나를 밀어내지는 않았고, 나는 기분좋게 태훈과 팔짱을 낀 채 비가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쏟아지는 비에 사람들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가방을 머리 위에 둔 채 뛰어가고, 갑작스런 바람에 우산이 뒤집어져 욕지거리를 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부실에서 책만 읽고 있어서 못 본 인간들을 오늘 하루만에 다 본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태훈과 함께 기분좋게 거리를 걷던 도중, 태훈이 말했다.
"저기에요, 누나."
태훈이 가리킨 곳은 다름 아니라 흰색의 구형 전등이 달려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술냄새. 그리고 묘하게 고소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먹어본 적은 없지만 맛있을거라는 근거없는 확신이 들면서 나는 걸음을 조금 빨리 했고, 태훈도 내 걸음에 맞춰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태훈과 함께 처음으로 '주점'에 가게 됐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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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연휴라 그런지 시간이 넉넉해서 글쓸 여유가 좀 더 있네요. 그런 기념해서 한 편 올립니다.
2.참고로 송희는 주인공의 두 번째 공략 히로인입니다. 잘 모르시겠다면 두 번째 공략 참조.
3.송희의 이미지는 작은 고양이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책 읽는걸 좋아하고, 평소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지만 태훈한정 데레! (송희 기여어!)
4.오늘 밤에 한 편 더 올라올 수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번 외전 역시도 당연히 H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5.송희가 너무 잊혀진 것도 있고, 모처럼 비가 와서 이런 글이 쓰고 싶어지기도 해서요. ㅎㅎ.
6.즐거운 한가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