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0 수업 참관을 시작합니다 =========================
모처럼 기분 좋은 꿈을 꾸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뭔가 아련하면서도, 그리운 꿈을 꾼듯한 기분이었다.
"...후아암."
하품을 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왠일인지 루시가 없었다. 아침에 혼자서 돌아다닐 녀석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폰을 켜니 떠오르는 숫자는...
"12시 반?"
거의 반나절 넘게 잔 셈이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내 핸드폰 밑에 쪽지가 놓여 있었다. 아마 모처럼 기분 좋게 잠을 자는 나를 깨우고 싶지 않아서 루시가 적어놓은 것이겠지.
쪽지를 펴보니 반듯한 글씨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너무 곤히 자시길래 깨우지 않았습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러 장 보고 올게요. 일어나셨다면 준비해둔 토스트나 피자로 간단하게 요기해주세요.]
나는 쪽지를 다 읽은 다음 적당히 접어 다시 탁자 위에 올려놓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모처럼 오랫동안 자서 그런지 피로도, 뻐근함도 없었다.
배가 연신 배고프다고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기에 일단은 루시의 말대로 요기를 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 오늘 아침, 지금이 점심 때니 내리 하루를 굶었던 셈이다.
나는 꼬르륵거리는 배를 부여잡고 베란다로 나가니 그곳에는 아침식사로 적당한 토스트와 슈크림, 그리고 팥빵들이 놓여 있었다. 내가 딱히 가리는 빵이 없다는 것을 아는 루시가 준비해둔 것 같았다.
나는 토스트를 뜯어 두 개를 토스트기에 넣은 다음 냉동고의 문을 열었다. 아이스크림 몇 개와 야채 약간을 확인한 나는 제일 오른쪽에 놓여 있는 피자 조각들을 꺼내들었다.
참고로 루시는 냉동식품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처음 이곳에 온 며칠 동안은 나를 무서워하거나, 두려워하기만 했는데 며칠 지나자 내 식습관을 보고는 경악하면서 완전히 현모양처마냥 내 생활습관을 뜯어고치기 시작했다.
뭐, 아무튼 루시가 온 이후로 냉동식품이나 즉석식품을 먹을 일은 거의 없어졌고, 정말로 가끔씩 치킨이나 피자를 시켜먹게 되었다. 루시의 음식 솜씨가 좋아서 냉동식품 같은 것보다 훨씬 맛있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속으로 웃으면서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 토스트기의 '띵'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뜨고 다 된 토스트를 꺼내 접시에 옮겨 담았다.
직후, 전자레인지에서도 모두 데워진 피자를 꺼내 접시에 옮겨 담았고, 우선은 피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으면서 옛날을 떠올렸다. 아니, 옛날이라 하기조차 민망한 시간이지만, 나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을 겪었다.
처음 에로스가 찾아온 날, 나는 그를 수상한 놈 취급했다. 실제로 그는 수상한 존재였다. 비록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기회를 얻었다. 설화를 되살릴 수 있는 기회와, 방구석에 쳐박혀서 스스로를 학대하는 짓만 하던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말이다.
에로스 녀석이 '그쪽'신인만큼 방식은 그 다웠지만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그에게 무척이나 감사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이든, 나는 그대로 삶을 살았다간 얼마살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아마 어느날 문득 자괴감이 들어 자살했고, 빈이랑 부모님은 그것때문에 충격받은 채 평생을 살아갔겠지. 지금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끔찍한 일이었다. 빈이가 날 그렇게 걱정했던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나는 피자를 모두 먹은 다음 토스트를 집어 들었다. 입에 베어무니 바삭한 식감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토스트를 베어물면서 떠올렸다.
그리고, 에로스에게서 부여받은 능력 덕분에 서연이를 만났다. 그녀는 내 첫 상대였다. 게임의 능력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그녀였고, 내가 첫 경험을 치룬 것도 그녀와 함께였다.
송희 누나를 만났다. 무척이나 작고 왜소하면서도, 상대를 배려하는 그런 누나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그녀를 보듬어 주고 싶었고, 그녀는 내게 안겼다.
유민을 만났다. 유민은 나와의 첫만남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 때 한 발만 잘못내딛었다면 나는 지금쯤 바다 속에 있거나, 지금쯤 송희 누나를 다시는 볼 수도 없었겠지. 하지만 어떻게든 버텨낸 결과 지금 유민과 나는 대등한 관계로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
루시를 만났다. 루시와의 첫만남도 결코 좋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이렇게 함께 살면서 서로를 걱정하고, 아껴주고 있었다. 참 모를 일이었다.
빈이와 마주했다. 이때까지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마주하고, 빈이의 진심을 마주했다. 이때까지 얼마나 슬퍼했을까,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그런 빈이의 마음을 나는 결코 모두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가졌던 빈이를 이제 최대한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싶었다.
레베카를 만났다. 레베카는 유일하게 내가 소설 주인공같은 장면에서 만난 여자였다. 양아치들을 두들겨패고, 구해내는 그런 장면 말이다. 레베카는 그런 내게 호감을 품었고, 나 또한 그런 레베카를 밀어내지 않았다. 나는 선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다면 굳이 남을 돕는 것을 꺼리지는 않는 인간이었다. 특히, 이런 게임 시스템을 얻은 이후로는 말이다.
세미나를 만났다. 그녀는 특유의 고고함과 신기한 체질을 가진 미녀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맞는 상대를 원했고, 나는 게임 시스템 덕분에 그녀에게 걸맞는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내게 집착했고, 나도 그런 그녀를 좋아했다.
수빈과 수연, 임정은을 만났다. 자신의 가족에게 버림받은 세 자매는 상처를 입은 채였고, 잘못된 길로 빠져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세 명은 과거의 서로를 믿으며 다시 옛날의 그녀들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내게 호감을 품고 있었는데, 솔직히 임정은을 제외한 둘은 아직 고등학생이라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즈음, 어느새 토스트를 모두 먹어치웠다. 나는 입가에 묻은 빵가루를 털어낸 뒤, 의자에 앉아서 생각했다. 이 게임이 언제 끝날지는 불명확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실상 두 번째 삶이나 다름 없는 것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살리기 위해 이러는 것이 미련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한심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한가. 어차피 이 세계는 '버려진 세계'인데 말이다.
버려진 세계를 에로스가 수거해서 내게 선물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의 삶을 나름대로 즐기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내가 살짝 미소 지을 때, 현관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루시가 나를 보면서 말했다.
"어라, 벌써 일어나있으셨네요 주인님?"
"응, 오랫동안 잤더니 몸이 개운해."
내 말에 루시가 살짝 실소하면서 말했다.
"조심히 다뤄주세요. 그건 주인님 혼자의 몸이 아니니까요."
혼자의 몸이 아니다라. 에로스의 부하였던 루시라서 '에로스의 것'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다른 여자들과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으니 혼자의 몸이 아니라고 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후자의 의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루시가 저렇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 후자가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오랜만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렇네, 이제는. '혼자'가 아니니까."
꿈을 꾸었다. 아주 달콤한 꿈을.
그 꿈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절대 깨고 싶지 않았다.
마치, 지금의 일상처럼 말이다.
그렇게, 나는 이 '버려진 세계'를 조금 더 이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H로 레벨업 1부(完)]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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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걸로 1부가 완전히 끝났습니다. 111회인 다음화는 후기가 이어집니다. 하고 싶었던 말이나 그런 것들도 풀어놓고, 혹시라도 독자분들이 궁금하신게 있다면 댓글로 질문을 남겨주세요. 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해드리겠습니다.
2.사실상 처음 써본 글을 6000명이 넘는 독자분들이 과분하게 사랑해주셔서 무척 감사드립니다. 부디 신작이랑 2부도 사랑해주시길.
3.2부에 반영되거나 나왔으면 하는 에피소드, 혹은 바라는 점을 댓글로 적어주시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4.1부 완결까지 함께해주신 독자여러분, 정말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