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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로레밸업-67화 (67/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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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유

솔직히 말해서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나는 그저 와인을 입 안에 머금은 채 씁쓸하게 웃었고, 유민은 그런 날 보고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내가 확인했을 때는 아침 5시였다.

다시 자기에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할만한 것도 없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이번에는 송희 누나의 방문이 열리면서 송희 누나가 나왔다.

"...들어와."

그리고 반쯤 멍한 상태의 내게 그 말 한마디를 하고 송희 누나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홀리듯이 송희 누나의 방으로 따라들어갔다.

방에 들어가니 송희 누나는 침대 위에 누워 베개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송희 누나는 평소의 조용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나는 송희 누나가 내게 말을 하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편하게 말해도 돼."

그 말에 울컥했다. 엉망이 된 감정이 소용돌이 치면서 머릿속이 지릿거렸다.

과거 설화와 함께할 때의 모습, 그리고 지금의 나 자신에 대한 회한, 후회. 이런 감정들이 뒤섞여 스스로를 괴롭게 했고, 송희 누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더니 내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꼬옥 안아주었다.

물론 유민이나 레베카처럼 두드러지는 가슴이 있는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굉장히 부드러운 가슴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상냥하게 나를 달래는 송희 누나를 바라봤다.

평소와는 반대로 송희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부드럽게 달래고 있었고, 나는 입을 열려다가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이 욱씬거렸기에 조금 더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기로 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조금 안정이 되자 입을 열었다.

"송희 누나, 만약에 누나는 누나가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내가 말하고도 다소 횡설수설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송희 누나도 그런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뜻이야?"

"그러니까, 누나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미지의 무언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떨 것 같아요?"

"예를 들면?"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래도 얘기하기로 했다.

"누군가의 곁에 있으면 좋고, 누군가의 손길을 원하게 되는 거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사랑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의해서인거죠."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건 내 능력에 관해서였다. 에로스의 손과 페로몬. 이 두가지 스킬은 공략을 손쉽게 만들어주지만 동시에 사람에게 본래 없는 감정을 만들고 조종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나는 계속 생각해왔다. 내가 처음에 서연이를 첫 스킬 사용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았다면 서연은 지금 나 따위와는 다르게 멋진 남자와 사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송희 누나도, 빈이도 마찬가지였다. 본래 내가 아니었다면 다들 나보다 훨씬 좋은 남자들을 만날 운명이었다. 아닐 수도 있긴 하지만, 결국은 나 때문에 삶이 일그러진 셈이었다.

내 욕심 때문에 많은 이들의 인생을 일그러뜨렸다. 그것이 한없이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나는 송희 누나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송희 누나는 눈을 감고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딱히 상관없을 것 같은데."

"......네?"

"딱히.상관.없을 것. 같다고."

내가 멍하니 반문하자 친절하게 하나하나 끊어 말해주는 송희 누나였지만 나는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하지 못해서 반문했다는걸 알아줬으면 한다.

"어째서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의 개입 때문에 감정을 휘둘리게 된거잖아요. 그리고... 그 개입 때문에 자신이 원래는 좋아하지도 않았을 사람을 좋아하게 됐을 수도 있고요."

내가 열변을 토했지만 송희 누나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반대야. 그 사람의 손길, 그리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랑이 아닐까?"

"......무슨 소리를 하는거에요. 그래봤자 그건 타인의 개입에 의해서..."

"자신의 의지로 사랑에 빠지는 거랑, 타인에 의해서 사랑에 빠지든, '사랑에 빠진다'라는 결과는 같잖아. 상대가 아무리 추악하든 내가 그 사실을 모르고 그 사람에게 빠져든다면 상관없지 않을까?"

"......"

송희 누나의 말을 들은 나는 침묵했다. 담담하게 말하는 송희 누나는 진심으로 저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사랑에 빠져서 내가 잘못되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나는 다소 떨떠름하게 말했다. 기대했던 것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은 타인의 개입에 의해 자신이 사랑에 빠진다면 당연히 거부감을 느끼는게 정상이 아닌가.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감정을 멋대로 고치는 것은 결코 기분좋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송희 누나의 말은 자신이 모른다면 상관없다고, 그게 사랑이라고 믿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가진 능력들을 송희 누나에게 말한다면 송희 누나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경멸, 증오, 배신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이 소용돌이 치는 기분을 맛보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다소 우울해졌다.

그렇게 축 쳐지려는 순간, 송희 누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태훈아,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널 잘 몰라."

그 말에 나는 약간 움찔했다. 송희 누나한테서 저런 말이 나올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차라리 유민이라면 모를까, 송희 누나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약간 서운했다.

"네."

나는 다소 씁쓸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실제로 송희 누나와 내가 알게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으니 말이다.

"네가 이때까지 보여준 모습대로, 네가 특별한 사람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날 구해준 은인이라는 사실이, 내가 널 좋아한다는 사실이 변하는건 아니야."

그리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 송희 누나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평소에는 절대 볼 수 없는 송희 누나의 그런 모습에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덧붙이자면 송희 누나가 내가 어딘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무엇보다, 태훈이 너는 나를 계속 아끼고 배려해주잖아. 너와 함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사랑'이라는 감정을 실감해. 한 번도 가지지 못한 감정. 그걸 네 덕분에 깨달았다고. 그래서 이 감정을 깨워준 너한테 굉장히 감사하고 있어."

그렇게 말한 송희 누나는 이마를 내 이마에 갖다대더니 서로 이마를 맞추고는 내 눈을 바라보며 속삭이듯이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그렇게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아줘. 자책하지 말고, 스스로를 조금 더 믿어 봐."

그렇게 말하는 송희 누나의 목소리는 한없이 상냥하고도 달콤하게 느껴졌다.

"넌 그래도 될 자격이 있으니까. 설령 네가 다른 사람들한테 버림받는데도, 나만큼은 언제까지고 널 사랑하니까."

그렇게 말한 송희 누나는 닿을락말락한 거리에서 입술을 가볍게 겹치고는 금세 입술을 떼어냈다. 가벼운 키스였지만 나는 그런 송희 누나를 볼수록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평소에는 내게 어리광 부리는 송희 누나와 그걸 달래는 나였지만, 오늘 하루만큼은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그렇게 내가 어리광부리듯이 송희 누나를 껴안는 순간, 송희 누나가 내 등을 토닥이며 마지막 한 마디를 속삭였다.

"네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너를 사랑했을거야. 나는 네 배려깊은 모습과 쓸데없이 오지랖 넓은 정의감, 그러면서도 한없이 둔한. 그런 네 모습을 사랑하는거니까."

그 말에, 나는 결국 감정이 폭발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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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번째 히로인인 송희의 성격을 처음 잡을 때 이번 파트를 고려해서 짰습니다만 정말로 이번 파트까지 오게 됐네요. 67편이라... 사실 인기 없으면 10화쯤 쓰고 질리면 접으려 했건만...ㅎㅎ 이게 다 독자 여러분 덕입니다.

2. 대략 2편 정도 '사랑하는 이유' 챕터가 이어집니다. 이번 챕터에서 현실에서 이뤄지기 힘든 '하렘'을 주인공이 어떻게 만들어내는지와 각 히로인들과의 관계 재정립이 이뤄집니다.

3. 사실 이번 편 같은 생각을 하는 것도 송희 같은 성격이기에 가능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설정했고요. 만약 다른 히로인들이었다면...O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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