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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로레밸업-66화 (66/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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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유

몽롱한 상태에서 눈이 떠졌다. 무의식적으로 떠진 눈이 천장을 응시했다. 보석같은 샹들리에가 나를 반겼고 나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옆을 보니 침대에서 떨어진 채 곯아떨어져 있는 루시와 내게 안겨있다시피 한 빈이가 보였다.

나는 내게 안겨있는 빈이를 조심스레 떼어낸 뒤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주며 흐뭇하게 바라봤다.

"...우움...오빠."

빈이가 칭얼거리는 소리를내면서 잠꼬대를하는게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는 순간 빈이가 잠꼬대를 더해댔다.

"오빠...도망치지마...괜찮아...그냥 몸을 묶는 것 뿐이니까..."

내 손이 멈췄다. 어째서인지 평소 빈이가 헤실헤실 웃는 표정이 지금은 음흉한 아저씨의 수상한 표정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괜찮아 오빠. 아픈건 처음뿐이지만..."

그리고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무슨 꿈인지는 몰라도 더 들었다간 내 정신에 상당히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빈아 대체 무슨 꿈을 꾸는거니. 오빠는 심히 걱정스럽단다.

'주로 내 안위가 말이야.'

나는 한숨을 내쉬면서 침대에서 나와서 밖으로 나왔다. 목이 말라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해서 거실의 음수대로 향하는데 선객이 한 명 있었다.

차갑고 정제된 본래의 분위기를 풍기는 유민이 소파에 앉아서 상념에 빠진 듯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는데, 나는 물을 마시기 전에 유민에게 한 번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렇게 천천히 유민에 다가갔지만 유민은 여전히 나를 보지 못한 것인지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유민의 바로 옆까지가서 어깨를 툭 치자 그제서야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왜?"

딱히 놀라거나 하지 않는걸보니 역시 유민은 유민이었다. 어제 식사 이후로 유민의 태도가 다시 차가워졌기에 나는 조금 조바심이 나는 상태였다.

나는 별로 눈치가 좋지 않다. 사람과의 관계에 서투르며 여심에 관해서는 거의 무지하다고 봐도 좋다.

그렇기에 이런 방법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어제 저녁 식사 이후로 조금 이상한 것 같아서."

내 말에 유민이 입술을 모으며 나를 차갑게 한 번 노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그런 유민의 태도에서 나는 유민이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유민의 눈은 차가웠다. 늘 그렇듯이 말이다.

...늘 그랬던가?

머릿속으로 어제 하룻동안의 일이 다시 되감겼다. 그리고 나는 어렴풋이 흐릿한 무언가가 잡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내 이성이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내가 잡아낸 가닥이 맞다면, 그 이론은 '유민이 나를 이성적으로 좋아한다'라는 것이 전제로 깔려 있어야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더더욱 헷갈리는 것이다.

분명 이게 맞는 것 같으면서도 '정말로 유민이 그럴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리고 나는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너..."

하지만 유민은 중간에 내 말을 자르며 이어말했다.

"넌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데?"

유민의 말에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고가 더뎌졌다. 아니, 사고를 거부하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유민이 내게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모르겠어."

단순한 섹스 파트너라고 하기에는 이제 너무나도 먼 곳까지 와버렸다. 나는 언제부턴가 유민을 배려하는 걸 넘어서 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고, 내 짐작이 맞다면 유민 또한 내가 다른 여자들과 하는 것을 질투하고 있었다.

사실 유민은 이때까지 나와의 관계가 가장 불명확한 이 중 하나였다. 송희 누나처럼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것도, 빈이처럼 오랫동안 함께한 것도 아니었다.

서연이처럼 자연스럽게 붙으면서 거리를 두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우리는 이때까지 서로의 간을 보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었다. 하지만 최근 일어난 일들은 그 거리를 너무나도 좁혀버렸다.

이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유민과의 관계를 끊거나, 확실하게 관계를 맺는 것.

나는 침을 꿀꺽삼켰다. 입 안에서 여러 단어가 맴돌며 바깥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막상 말하려하니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부끄러움과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정말 온전한 내 감정일까, 그런 생각들이 들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유민은 차가운 표정을 잠시 지우고 피식 웃었다.

"그래, 모르겠다라..."

'모르겠다'라는 말을 되뇌이던 유민이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거 다행이네, 사실 나도 잘 모르겠거든. 지금 내가 너한테 품은 감정이 뭔지 잘 모르겠어."

그렇게 말한 유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에 가더니 안에 있던 와인을 하나 꺼내왔다. 아침부터 술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확실히 이런 대화는 맨정신으로 하기에는 조금 문제가 있을 수도 있었기에 나는 그냥 기다렸다.

유민은 와인과 함께 잔을 두 개 가져오더니 와인을 따고는 잔에 와인을 붓기 시작했다.

'나도 마시란건가.'

와인을 보니 문득 어제 레베카가 와인을 가지고 내 물건에 장난을 친게 떠올라서 살짝 얼굴이 붉어지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참은 결과 물건이 일어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유민은 잔 하나를 잡고는 그대로 자신의 입가에 가져가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널 볼 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어."

나는 묵묵히 유민의 말을 경청하면서 와인잔을 손에 잡았다. 찰랑거리는 와인의 보랏빛이 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몇 년 동안이나 많은 사람들을 보다보니 사람의 분위기라는게 느껴져. 너는 어딘가 고장난 것처럼, 필사적으로 자신을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이거든."

뭐, 아니라면 어쩔 수 없고. 그렇게 자조한 유민은 와인을 입안 가득 털어넣고는 꿀꺽꿀꺽 마셔댔다. 그리고, 묘하게 풀린 동공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지금의 너는,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것만같아."

마치, 신기루처럼. 유민이 덧붙였다.

유민의 말에 나는 침묵했다. 유민의 말은 하나하나가 바늘이 되어 내 몸을 찌르고 있었다. 따끔따끔한 감각이 온몸을 긁어대는게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안도했다.

유민은 내게 종속되지 않았다. 오히려 침착하게 나를 바라보며 자신의 감정을 재단하고 있었다.

서연을 그렇다쳐도 빈이나 송희 누나는 내게 지나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내가 게임을 끝내고 '설화'를 만나기 위해 세계를 비튼다면 지금 이 곳에 있는 송희 누나와 빈이는 어떻게 되는가?

만약에 내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으로 된다면 두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그러지 않기를 빌지만 혹시라도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선택을 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들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너무 내게 의존하지 않도록 노력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의 웃는 모습과, 나를 바라보는 눈을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그녀들과 함께 있는 행복감에 젖게 되버렸다.

나는 에로스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화가 돌아오는지 듣지 못했다. 루시에게 물어봤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그에 대해 대답할 권한이 없다고 했을 뿐이었다.

그래, 차라리 그녀들의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죽었던 설화가 살아 돌아온다면 괜찮았다. 하지만 만약에.

'이 세계에 있는 그녀들은 그대로 남고, 나만이 설화가 살아있는 세계로 이동한다면.'

최악의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다. 말 그대로 최악의 상황이었다. 에로스는 이미 수많은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그렇기에 나는 결코 내 짐작이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에로스가 어떤식으로 설화를 되돌려줄지 모르는 이상 나는 그녀들에게 상처를 입힐지도 모르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

이래서는 대체 어떻게 하고 싶다는 말인가?

나는 예전부터 이랬다. 줏대도 없고 답답하며 우유부단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어떡하란 말인가. 누구도 상처입히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선택하면 누군가는 버려진다.

누군가를 되돌리면 누군가는 잊혀진다.

내가 사라진다면, 그녀들은 상처를 받게 된다.

"......"

나는 손에 잡힌 와인잔을 거칠게 쥐면서 잔에 담긴 와인을 입에 털어넣었다.

씁쓸한 와인의 맛이 내 혀에 깊숙히 배어들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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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번 챕터는 조금 진지하고 감상적입니다.

2. 추천이랑 쿠폰은 사랑입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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