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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가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실금을 하고 울먹거리는 빈이를 달래고 돌아온 것은 대략 20분 가까이 지나고 나서였다. 돌아오니 빈이와 나를 제외한 다른 여자들은 빈이와 나를 힐끔 쳐다보고 물었다.
"...빈이 울렸어?"
송희 누나의 물음에 나는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서연과 송희 누나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지만 빈이는 울면서도 내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에 신경쓰지 않기로 한 모양이다.
그렇게 약간 어색한 분위기로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하는데 지나가 말을 시작했다.
"점심은 호텔이 아니라 근처 가게에서 먹겠습니다. 이곳에서는 꽤나 유명한 곳이니 맛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앞장서서 걷는 지나의 바로 뒤를 유민이 도도한 표정으로 걸어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녀가 속으로 방금 전의 일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방금 전부터 나를 의식해서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황급히 눈을 돌렸기 때문이다. 방금 전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걸까.
나는 속으로 킥킥 웃으면서 제일 뒤에서 빈이를 데리고 걷기 시작하는데 잠시 후, 앞쪽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멈춰섰다.
"헤에, 얘들 쩐다."
"와우, 너희 한국인이야? 몇 살?"
"미국년들 밖에 없는줄 알았는데 한국인도 있구나. 땡 잡았네."
"제기랄, 말이 통해야 꼬시던가 하지."
그렇게 시시껄렁한 소리를 하면서 지나와 유민의 앞을 가로막고 낄낄거리는 남자들 4명이 보였다.
네 명의 옆에서 안절부절하고 있는 금발의 미녀가 한 명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오늘 내가 보고 헤벌레...가 아니라 시선을 빼앗긴 그녀였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이 네 명한테 헌팅을 당하던 도중에 우리가 지나가다 잡힌 것 같았다. 한 명은 전형적인 양아치처럼 폭탄머리를 하고 있었고 한 놈은 파인애플 머리를 하고 있었다.
핑크색 파인애플 머리라... 뭐 개인의 취향은 자유라곤 해도 저 머리로 여자를 꼬실 생각이었나? 진심으로?
내 외모 스텟이 아무리 낮아도 쟤보단 낫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놈들의 말이 이어졌다.
"와, 가슴 봐. 개쩐다."
유민을 보고 품평하는 놈이나.
"근데 옆에 누님은 누구에요? 얘들 누나? 보호자 같은건가?"
지나에게 슬쩍 말을 거는 놈이나.
"야야, 너희들 우리랑 놀러가지 않을래? 우리가 여기 잘 알거든."
서연과 루시에게 접근하는 두 놈이나.
하나같이 저질스러운 티를 줄줄 흘렸다.
특히 '우리가 여기 잘 알거든'이라는 그 말에 송희 누나가 '풉'하고 웃었다.
딱 봐도 처음 오는걸로 보이는 양아치들이 그런 소리를 하니 웃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양아치들 중 한놈이 송희 누나가 웃는걸 들었는지 얼굴을 찌푸리면서 다가왔다.
"야, 너 뭐야. 왜 웃어?"
아무래도 다른 여자들에 비해 내성적이고 키가 작은 송희누나한테는 관심이 없었는지 곧바로 험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송희 누나는 조심스레 내 뒤로 이동했고, 소동을 들은 양아치 네 놈은 송희 누나와 내게 점점 다가왔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아니, 쟤 뒤에 있는 년이 우릴 비웃잖아."
"뭐? 진짜?"
"이야, 이거 안되겠네."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는 양아치놈들은 실로 비열한 썩소를 지으면서 한 걸음씩 내게 다가왔다. 송희 누나가 뒤에서 내 옷자락을 잡는게 느껴졌지만 나는 누나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고 뒤로 물러나게했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주변의 외국인들이 다들 눈살을 찌푸리고 이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부 커플은 흥미롭다는 듯이 보고 있었지만 적어도 저 양아치들한테 호의적인 시선은 없었다.
그걸로 충분하다. 여차하면 아이템을 사용해서 이 일을 덮어도 되고, 유민이나 송희누나가 조금만 힘을 써도 이 정도 일은 금세 덮을 수 있으리라. 게다가 저들이 먼저 시비를 거는 걸 목격한 이들도 꽤나 많으니 말이다.
"야, 빨랑 비켜. 네 뒤에 있는 년만 넘기면 그냥 보내줄게."
"야, 그러지말고 쟤들 보내고 이 애들만 좀 빌려달라 그래봐."
"그래, 저런 어린애 하나 패서 뭐하게."
"그거 괜찮네 큭큭."
그들이 그런 소리를 해대면서 나를 힐끔 쳐다보자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흠, 그럼 어떻게 해볼까.
고민하면서 유민쪽으로 고개를 슬쩍 돌리자 유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유민은 슬쩍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했다. 오, 왠일이래.
'고용주님 허락도 받았겠다. 조져볼까.'
그래도 다짜고짜 패면 별로 보기 안 좋을테니 예고, 혹은 도발이라도 해두는게 좋을 것 같았다. 나는 살짝 떨고 있는 송희 누나에게 안심하라는 제스쳐를 취한 뒤에 말했다.
"그래,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한 번 봐줄게. 지금이라도 고개 숙여서 내 뒤에 있는 누나한테 사과하면 이대로 끝날거야."
내 말에 제일 앞에서 걸어오던 놈이 피식 웃었다.
"이게 어디서 되도 않는 소리를... 그리고 저게 누나라고?"
나를 비웃으면서 송희 누나에게 삿대질을 하던 녀석은 갑작스레 내게 주먹을 휘둘렀다. 대충 보니 그렇게 힘을 주지는 않았고, 그냥 내게 한 방 먹이고 망신을 줄 생각인 것 같았다.
"흠."
하지만 나는 여유롭게 놈의 주먹을 잡아낸 뒤에 그대로 팔을 비틀어 놈의 팔을 꺾어버렸다. 동시에, 녀석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끄아아악! X발!"
그리고 녀석의 비명이 터져나오자 뒤에 있던 남자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병X. 맨날 복싱하러 다닌다고 하더만 털리네."
"쪽팔린줄 알아라 새꺄."
"설치더니 결국 저러네."
남은 세 명은 지금 내게 잡혀 있는 놈을 조롱하면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녀석들이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녀석의 팔을 더 세게 비틀었다. 조금만 더 했다간 완전히 뼈가 박살나겠지.
"아악! X발! 야, 이거 안 놓..."
녀석이 고래고래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질러대면서 발악을 하길래 나도 모르게 짜증이 치밀어 올라 녀석의 면상에 주먹을 갈겨버렸다. 퍽, 하고 녀석의 얼굴이 내 주먹에 의해 일그러지면서 그대로 면상을 바닥에 쳐박았다.
흠, 이 정도면 나름대로 괜찮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왠지 주변이 조용했다.
"...미친."
"진짜 친 거야?"
"......."
남자 세 놈은 그제서야 내가 진심이란걸 깨달았는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미치긴 뭐가 미쳤냐. 저 새끼가 먼저 주먹질한 거 안 보여? 난 어디까지나 정당방위라고.
"왜, 방금전에 했던 말 다시 해보지?"
그러면서 내가 피식 웃자 녀석들 세 명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 경험상 저런 녀석들이 이런 상황에서 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한창 자존심이 강할 때고, 특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을 해놓고도 이제와서 빼면 도저히 견디기 힘들 치욕이겠지.
녀석들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내게 달려들었고, 나도 자세를 잡고 맞대응할 준비를 했다.
그렇게 10분이 지나고, 모래사장에는 네 명의 남자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나는 손에 묻은 모래를 털고 있었다.
"후."
모래를 털면서 숨을 내뱉자 동시에 주변에서 외국인들의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잔뜩 쏟아졌다. 4대 1로 이긴게 꽤나 신기한 모양이었다. 뭐, 이 녀석들이 제대로 자세도 잡지 않고 마구잡이로 덤벼들었기에 가능한 거였지만...
별다른 무기가 없었던 것도 있고. 지난번 유민이 고용한 폭력배들과 싸울 때가 이것보다 수십배는 힘들었다. 그때에 비하면 이건 몸풀기도 채 되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에 한 녀석이 모래를 집어서 내게 뿌렸던게 유일한 위기라면 위기랄까. 반사적으로 팔로 눈을 가린 덕에 곧바로 반격해서 땅에 눕힐 수 있었지만 말이다.
"...퉤."
하지만 눈을 제외한 코나 입에는 모래가 약간 들어간 상황이었다. 나는 입에 들어간 모래를 뱉으면서 녀석들 중 한 명의 등을 짓밟는데 유민과 방금 전 녀석들에게 헌팅을 당하는 중이던 여성이 같이 걸어왔다.
그리고, 그 여성의 뒤에는 머리가 살짝 벗겨진 연한 황색의 머리칼을 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다.
"@$#(@)@!*"
중년의 남자는 유쾌한 웃음을 지으면서 날 향해 뭐라뭐라 말했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충 들어보니 프랑스어쪽인 것 같은데 영어도 잘 기억 안 나는 내가 프랑스어를 잘 할 수 있을리가.
"자기 딸한테 추근덕거리는 남자들을 쳐 내 줘서 고맙다네요."
좋은 타이밍에 지나 씨가 통역 역할을 해줬다. 금발 미녀의 아빠였구나.
"뭘요. 그냥 별 거 아니라고 전해주..."
"아니, 잠깐만."
내 말을 중간에 자르고 들어온건 다름 아니라 유민이었다. 유민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아저씨같아 보여도 저 남자는 프랑스에서 온 외교관이야. 부탁인데 조금 더 관계를 맺게 해주면 안 될까? 저런 인맥은 다시 구하기 힘들어."
유민 치고는 드물게도 '부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내게 말했다. 그건 그렇고 저 아저씨가 외교관이라니.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아저씨같았는데.
보아하니 나한테 꽤나 호감을 갖고 있는 것 같으니 유민의 말대로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 내가 유민을 괴롭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일이었다. 이런일에서 도와줄 수 있는데 일부러 외면할 정도로 나는 유민을 싫어하지 않았다.
"어떡하면 되는데?"
내 말에 유민이 말을 이었다.
"말하는걸 보니 나중에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는 것 같으니까 그 때 나랑 같이 저녁 식사를 하는 정도면 충분해."
유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뭐. 하지만 내가 아무런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민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래?"
내 말에 유민이 흠칫하더니 우물쭈물거렸다.
"아니... 난 네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말하는 유민은 살짝 부끄럽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동시에 유민의 가슴이 은근하게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아아, 그런거 아냐. 처음 만났을 때만 그랬지 이제는 대충 이해했으니까. 오히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편..."
거기까지 말하는데 빈이랑 서연이 내 옆구리를 꼬집었다. 너흰 또 왜 그러는건데?
"...고마워, 그럼 그렇게 전해둘게."
유민은 진심으로 기쁜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 돌아갔다. 그렇게 말하러 간 유민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라? 나 유민한테 고맙다는 말 들은거 이번이 처음 아닌가?
어쩐지 유민이 내 뺨에 입을 맞춘건 단순히 저녁 식사에 참여하는게 고마워서 그런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너무 김칫국이지.'
유민같은 성격의 여자가 그렇게 손쉽게 넘어올리도 없고, 그냥 내가 자의식과잉인 것이리라.
나는 멍하니 선 채 유민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감사합니다.)
(후원, 원고료 쿠폰은 연재 속도나 연참 확률을 대폭 상승시킵니다.)
1. 참고로 비축분이 두 편 있습니다. 선택은 독자님들의 몫입니다.(웃음)
2. 이번 챕터에서 유민과의 관계가 꽤나 개선될 예정입니다.
3. 치킨 먹고 싶다...... 배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