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H로레밸업-35화 (35/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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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에로스와 천사들-

"...지루하네."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힘든 중성적인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가면을 쓴 에로스가 중얼거리는 것을 들은 미카엘이 쏘아붙혔다.

"그러니까 인간계 좀 그만 들락날락 거리시라고 말씀드렸잖아요. 계속 인간으로 변신해서 유희를 다니시는건 그만두시라고요. 이번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신거에요? 자그마치 20년 동안이나."

미카엘의 물음에 에로스는 답지 않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뭐, 그럴일이 있었어. 것보다, 어찌됐든 딱 맞춰왔잖아. 안 그래?"

"그렇긴 하지만요. 자, 여기 이번에 에로스님이 받게 될 평행세계에요."

미카엘이 건넨 서류를 쳐다보던 에로스가 씨익. 악동같은 웃음을 지었지만 미카엘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기에 아무렇지 않게 에로스에게 다시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실험을 하실거에요? 힘이랑 행운, 민첩이랑 지력까지 다 해보셨는데. 더 할게 남아있긴 한가요?"

그런 미카엘의 말에 에로스가 대답했다.

"이번에는 내 권능을 직접 부여할거야. 그리고 이번에는 랜덤이 아니라 내가 직접 인간을 선택할거고."

그렇게 말하면서 에로스는 자신이 선택한 남자에 대한 정보를 미카엘에게 넘겼다.

"네? 아니 뭐 상관없긴 하지만... 그런데 무슨 바람이 부신거에요? 자기 권능을 주는걸 죽기보다 싫어하셨으면서."

그거야 내 권능이 인간의 손에 더럽혀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에로스였지만 꾹 참고 미카엘에게 대답했다.

"단순한 변덕이야."

그라면, 이 권능을 마구잡이로 사용해서 자신을 실망시키지는 않으리라.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설화'가 말했던가. 쓸데없이 착해빠지고, 한심하지만 혼자 둘 수 없는 사람이라고.

그런 그라면 적어도 자신을 재밌게 해줄 수 있으리라.

"그럼 일단 권능은 에로스 님의 것으로 해두고, 담당 천사는 제가 맡을까요?"

"아니, 우리엘로 부탁할게."

우리엘은 자신에게 조금 광신적인 면을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성실하고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적어도 태훈이 엇나가는 걸 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태훈의 방식을 조금 답답해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고는 에로스는 몸을 돌려서 미카엘에게서 멀어졌다.

뒤에서 미카엘이 불러대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역시 잡무 처리와 자신은 맞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진 '무(無)'의 공간을 거닐며 에로스는 생각했다.

어째서 자신은 신이란 것이 되었는가. 자신을 비롯한 그 어느 신도 어째서 자신이 신이 되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되었기에 해야할 일을 하는 것 뿐.

'아니, 해야할 일이랄 것도 없나.'

기본적으로는 방임주의에 사실상 하는 일도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인간계는 아무런 문제 없이 돌아간다. 하지만 그것을 신들의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서 일을 하는 척 하는것일 뿐이다.

그렇게 입맛대로 바꿔지는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이 바로 평행 세계.

에로스가 손을 한 번 들자 마치 지금 움직이는 듯한 생생한 영상이 흘러나왔다.

괴물같은 힘으로 수백, 수천 명의 가시들이 달려드는 것을 몸으로 분쇄하고, 기사단을 산산조각 내는 괴력의 사나이가 활개치고 있었다.

그렇게 무서울 것 하나 없어 보이던 그는 어느 날 밤, 그를 배신한 자신의 연인이 탄 독약을 먹고 어이가 없을 정도로 손쉽게 죽어버렸다.

뛰어난 지력으로 마법을 사용하며 세계를 호령했던 여자 마법사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흡사 신처럼 번개를 내리치고, 비를 내리개 하는 모습은 감탄스러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재산을 탐냈던 그녀의 연인인 남자가 그녀의 목에 칼침을 박는 것으로 죽어버렸다.

그 이후에도 수십, 수백개의 영상들이 흘러나왔다.

지력, 운, 힘. 그것 말고도 수십 개의 권능을 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말은 한결같았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배신당하거나,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이에게서 배신당하거나.

결국은 배신이 문제였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다루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이성의 마음을 알고, 사랑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에로스는 한숨을 내쉬면서 모든 영상을 꺼버렸다.

그렇게, 적막한 공간 속에서 에로스는 중얼거렸다.

"내 권능은..."

사실 자신의 권능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지력과 힘같은 것에 비해서 지나치게 효과가 없었고, 추상적이라고는 해도 삶에 영향을 크게 끼치는 운에 비해서 그렇게 영향력이 큰 편도 아니었다.

다만, 그런 권능이라도.

다른 사람이 가진다면.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가진다면. 조금은 자신의 권능을 제대로 사용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젖었다.

방금 전 영상에 흘러나왔던 이들이 이 권능을 가진다면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허겁지겁, 그리고 무차별적으로 능력을 사용해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강제로 당하는 이성들을 보면서 절규하겠지.

자신의 권능이 더럽혀지는 것은, 더러운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은 썩 보기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자신의 능력을 '그'가 사용한다면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한다는 비참한 결말은 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을 끝마친 에로스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순간 미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비 다 됐어요! 그런데 정말로 이 남자로 괜찮으신건가요?  딱히 특별한 점도 없고... 약간 절박해 보이기는 하지만요.]

"그래, 그걸로 충분해."

그 절박함이 중요했다. 누구보다 절박해도 천박한 방법으로 빠르게 끝내려고만 해서는 이때까지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하나, 천천히.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럼, 전송하겠습니다!]

"고마워, 갔다올게."

그것과 동시에, 세계가 반전했다.

다시 눈을 뜬 순간, 자신은 한 집의 앞에 서 있었다. 이제 인터폰을 누르면 정말로 시작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두 번째 인생과, 신의 유희가.

숨을 들이마쉰 에로스가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럼, 게임을 시작합니다."

============================ 작품 후기 ============================

우선 오늘 저녁에 올렸던 공지가 너무 푸념에 가까웠던 것 같아서 사과의 말을 드립니다. 사실 낮부터 두통이랑 복통이 있었는데 그 상태에서 코멘트를 보다 약간 울컥한 것 같습니다. 지금은 조금 상태가 호전되어 정리합니다.

1.이번편이 번외편인 것은 컨디션이 안 좋고 솔직히 약간 화가났었던 저녁때의 마음으론 제대로된 다음편이 나올리가 없으리라 생각해서 전에 짜놨던 번외를 썼습니다.

2.연재는 정상적으로 합니다. 사실 저녁때 났던 화를 삭이기 위해 다른 작품들을 보다가 문득 제 작품이 이런 재미있는 작품들보다도 인기가 많았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욕설이나 이유없는 비방은 5명도 채 되지않았는데 그것때문에 제 멘탈이 터져서 2500분이나 되는 독자분들이 불편해하시면 그게 훨씬 손해고 저도 지는 기분이 들 것 같았습니다. 내일부터 간간이 정상적으로 다음편을 들고 오겠습니다.

3.수정작업은 천천히 진행됩니다. 연재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시험이 끝난 직후 5월 연휴때 연참과 동시에 시작할 예정입니다. 물론 한 번에 되지는 않겠지요. 그래도 과분한 사랑을 받는만큼 정성들여 작업할 예정입니다. 정 불편하신 분들은 몇 달 뒤에 다시 오시길. 그땐 달라져 있으리라 장담합니다.

4.걱정하고 기대해주신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이제 원래대로 돌아왔어요. 내일부터 에로한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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