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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와 만나기로 한 곳은 다름 아니라 시내의 변두리에 있는 대형 서점이었다. 중고책 매입부터 시작해서 19금 소설과 만화까지. 다양한 책들을 취급하는 곳이었는데,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나와 송희 선배에게는 실로 천국같은 곳이었다.
"후아..."
송희 선배가 심호흡을 하면서 서점에 늘어오면 곧바로 느껴지는 오래된 장서의 냄새를 맡았다.
"이 냄새 좋네요. 오랜만이에요."
한동안은 이런 대형 서점이 아니라 대학 앞 서점에서 필요한 교재만 구입했으니까 올 일이 없었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책 냄새였다.
"...응. 나도 올 때마다 이 냄새가 좋아."
그렇게 말하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인 송희 선배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나는 흠칫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도 그럴게 송희 선배는 지금까지와 달리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타킹을 입었지만 살색 스타킹과 새하얀 짧은 치마가 대비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선배는 내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치마를 입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한 듯 했다.
휙 하고 치마를 잡아채서는 가리면서 내게 말했다.
"...미안. 치마를 입는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손을 내민 송희 선배는 오늘도 여전히 긴 셔츠를 입고 있었다. 이미 봄이 와서 날씨가 완전히 풀렸는데도 굳이 긴 셔츠를 입는 이유는...
'흉터 때문이겠지.'
순간 머릿속으로 유민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약간의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것을 눌렀다. 그래, 이미 끝난 일은 어쩔 수 없다. 지금 이 순간부터가 중요할 뿐.
나는 금세 그 기세를 지우고 부끄러워하는 선배를 놀렸다. 화제를 돌리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선배에게 캐물어서 상처를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선배, 그렇게 치마를 잡았다가는 못 걸을 걸요?"
내 말대로 그녀의 치마는 미니스커트가 아니라 무릎밑까지 내려오는 긴 치마였기에 그대로는 움직이기 힘들게 뻔했다.
"으으...그럼..."
답지않게 혼란스러워하며 부끄럼타는 선배를 조금 더 놀리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이쯤에서 멈추기로했다.
"제가 먼저 올라갈게요. 밑에 다른 사람이 이 지나가지는 않는지 잘 보고 따라오세요."
내 말에 그녀는 그제서야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하게 홍조가 띈것을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요염하지도, 섹시하지도 않은. 풋풋한 그런 감정에 두근거린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이전의 감정들과는 약간다른. 여성의 몸을 범하고, 내 것으로 하고싶다기보다는 흡사 애완동물이나 인형같이 지켜주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리여리한 팔과 다리. 잘록한 허리에 짧은 머리칼. 인형처럼 창백한 피부. 이 모든 요소가 그녀의 보호욕구를 자극했다.
나는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손목을 잡고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녀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그제서야 내가 멍청한짓을 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래서 모처럼의 데이트인데 송희 선배의 기분이 나빠진건 아닐까 했는데 웬걸 오히려 그녀는 쿡쿡 웃으면서 우아하게 내게 다시 손을 내밀었다.
마치 기사에게 구애받는 공주처럼 우아하게 내민손의 의미를 모를리가 없었기에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약간은 차갑지만, 그래도 인형같이 창백한 그녀의 모습과 달리 생기가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이었다. 나는 그 손의 감촉에 취해서 잠시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듣지 못했다.
"송희...라고 불러도 되니까."
"네?"
"굳이 선배 호칭 붙일 필요는...아니면 누나라고 불러도 괜찮아."
머뭇머뭇거리면서 그렇게 말하는 선배는 엄청 귀여워서 껴안아주고싶을 정도였다.
이란 선배는 천연기념물로 보존해서 남겨야한다. 이 풋풋함과 약간의 달달함을 봐라.
최근 내 주변에 여자라곤 달다못해 설탕을 쏟아붇는 치녀 후배랑 배속에 뱀을 수십마리는 키울 학생회장 뿐이었으니 말이다.
"알았어요 송희 누나."
내 말이 기쁜것인지 송희 누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살짝 팔짱을 꼈다가 황급히 풀었다.
"아, 혹시 기분나빴어? 그렇다면..."
하...미칠 것 같다. 전과는 달리, 송희 누나의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연상에게 '귀엽다'라는 감정을 느끼는게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소심함과, 자학적인 태도가 마치 과거의 나를 비추는 것 같아서 더더욱 그랬다.
"누나, 제발 그 이상은 말하지 마세요."
내 말에 송희누나는 아리송함이 절반, 시무룩함이 절반 담긴 표정을 지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한 마디만 더했으면 내가 덮쳐버렸을테니까. 정말이지 너무 귀엽다고! 자기가 팔짱을 꼈다가 날 배려해서 물어보는 표정이 가관이었다.
과장 좀 보태서 거절하면 눈물이라도 흘릴듯이 안절부절하는 표정이 꼭 아기 토끼를 연상시켰다. 연약하고 귀엽고, 꼭 품에 안기기 좋은 크기의 토끼 말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누나를 안았다. 물론 가벼운 포옹 수준으로. 누나의 등을 감싸안으면서 누나에게 속삭였다.
"누나...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세요. 누나는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내 말에 그녀가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왼손으로 오른팔의 내 등쪽의 셔츠 위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선배. 아니, 송희 누나. 누나가 어떤 약점을 가졌든 결점을 가졌든 난 그런 송희 누나가 좋아요. 내가 좋아하는건 책 읽기 좋아하고, 평소엔 조용하면서도 소설 토론만 되면 엄청나게 흥분하는. 그런 송희 누나가 좋은거라구요!"
내가 그녀의 어깨를 잡고 소리치자 그녀가 움찔하면서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
"저기...태훈아. 그런 말은 여기서 하기엔 조금.."
그런 말? 나는 내가 방금 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고 그제서야 내가 한게 고백 비슷한 것이란걸 깨달았다. 그 증거로 내 주변의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구경하고있었다. 제기랄, 이 게임 시스템을 하게 되고나서 너무 겁대가리랑 개념을 상실 한 것 같다. 그래도 나름 내 주변 사람들에 비해서 정상인이라 자부하고 있었는데...
"일단은 나가자."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서점을 도망치듯이 빠져나왔고 함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저기...태훈아."
솜희 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서연이랑은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고했지?"
"네. 물론이죠. 그때는... 잠깐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랬던 거라니까요."
"그럼 지금은 여자친구는 없는거지?"
섹파가 둘 있긴합니다만.
"네, 여자친구같은게 있을리 없잖아요."
뭐, 거짓말은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그럼, 오늘 하루만. 내가 너랑 함께 있는다고 뭐라할 사람은 없겠네."
그렇게 말하는 송희누나의 얼굴은 이때까지의 창백한 흰색이 아니라 앵두빛을 띄고 있었다. 어라?
"...어...음..."
갑작스런 누나의 대쉬에 내가 뭐라 대답해야할지 고민하는 순간 송희 누나가 내 입에 누나의 입을 가볍게 맞췄고, 금세 떨어진 앵두같은 입술로 말했다.
"오늘 하루 정도는... 괜찮은거지?"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그런...거지?"
어째서인지.
".......흑."
금방이라도 깨져버릴 듯한 표정으로,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울먹이고 있었다.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에 나는 당황했지만 곧바로 주머니에 넣어뒀던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선배. 아니, 송희 누나. 갑자기 왜 그래요..."
"미안... 흐흑..."
갑작스럽게 눈물을 터뜨린 송희 누나를 데리고 공원이나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려했으나 그녀는 울먹이면서도 오른손으로 내 팔을 잡고는 왼손으로 앞에 있는 한 건물을 가리켰다.
모텔이었다. 그것도 어제 내가 유민과 몸을 섞었던 것과 비슷할 정도로 화려한 모텔.
".......진짜요?"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무언의 긍정이란 것을 알아들은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를 조심스레 업은 채 모텔로 걸어들어갔다.
모텔 카운터의 사람이 울먹이면서 내 등에 업힌 송희 누나를 힐끔 쳐다봤지만 별 말 하지 않고 방 열쇠를 건네줬고 나는 송희 선배를 업은 채 방에 들어왔다.
모텔이라 그런지 자극적인 영상이나 도구들이 몇 개 눈에 들어왔지만 당장은 그럴 욕구도,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송희 누나가 우는 이유를 알고 싶을 뿐이었다.
지릿. 어째서인지 머리가 지릿거렸다. 마치, 그 빌어먹을 신이란 놈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그것보다도 더 지독하게 머리가 웅웅 거리는 느낌이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위화감. 모순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평소같았으면 이 지독한 감각의 원인을 찾아내려 했겠지만 지금은 내 눈앞의 송희 누나가 더 중요했다.
나는 침대 위에 송희 누나를 올려 놓은 뒤 티슈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면서 말했다.
"누나, 왜 우는거에요. 혹시 나 때문이에요?"
내 말에 그녀는 고개를 격하게 도리도리 흔들면서 내게 안겨서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살과 여린 허리. 가녀린 팔이 동시에 느껴졌고, 나는 그제서야 지금 내 눈앞의 여자가 이전에 없는 격한 감정을 내 앞에서 분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하자면 일종의 플래그 같은 것이다.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어?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는 느낌이 더욱 커졌다. 나는 그제서야 알 수 있었다. 두 개의 위화감. 나를 계속해서 괴롭히고, 자극했던 두 가지를.
한 가지는 자각한 지금 이 순간도 외면하고 있었지만, 한 가지는 지금 당장 그만둬야 하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과의 관계를 맺는 것에 안일했다.'
나는 지금 내 눈앞의 송희 누나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단순한 공략 대상? 마치 게임처럼. 적당히 대화를 나누고, 일종의 플래그를 세우면 바로 가랑이를 벌리는 그런 천박한 게임이라 생각했던걸까?
아이템을 사용하면 얼마든지 기억을 지우고, 관계를 초기화시킬 수 있으니까. 나는 그녀를 마치 하나의 장난감, 혹은 매크로처럼 대했다. 그건 내 신념과 위배되는 일이었다.
내 유일한 신념.
나는 벌써 여자 세 명을 따먹은 개새끼고, 앞으로도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개새끼지만. 설화를 구하겠다는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한. 내 더럽고, 추잡한 소망 때문에 다른 여자들에게 손을 댄 천하의 악랄한 놈이지만.
그런 나조차도 유일하게 가진 신념이 있다. 사람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대하고, 생각한다는 것. 내 소망을 빠르게 이루기 위해 다른 이들에게 최소한의 피해 이상의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
모순이나, 위선이라 해도 상관없는 내 유일한 신념이었다. 서연과 관계를 나누고 나서도 고집했던 유일한 신념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뎌지고 있었다.
철썩. 나도 모르게 내게 안겨 있는 송희 누나를 침대 위로 부드럽게 밀어낸 뒤 나 자신의 뺨을 강하게 후려쳤다. 내가 때리고나서도 꽤나 아플 정도였다. 입 속에서 피 맛이 비릿하게 났지만 괜찮았다. 오히려 이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것 같았다.
그렇게 눈을 뜬 순간, 나는 그제서야 송희 누나가 날 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송희 누나는 내가 나 자신을 때린 것이 자신 때문이라 생각한것인지 울먹이다 못해 대성통곡을 하면서 방금 내가 때린 뺨의 일부분을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지면서 자신이 우는 이유를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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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커튼콜의 시간이다!
그런데 정말로 여동생을 히로인 중 한 명으로 넣을까요... 유사행위는 하나 나올 예정이었는데 생각해보니 의외로 괜찮을지도..?
주인공이 나쁜놈인지 착한놈인지는 가끔 저도 헷갈리는데 확실한건 개새끼입니다. 시작한지20편만에 여자 세 명을 따먹고 (심지어 두명은 처녀) 여동생한테 성드립을 치는 아주 악질이에요. 절대 제가 주인공이 부러워서 그런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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