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페미헌터-260-21화 (281/289)

여전히 조용한 방문 앞에 서서, 언니들이 하나씩 문에 물건을 가져다 댔습니다.

"안 먹히네."

"으음, 전에는 팬티로 되어서 될 줄 알았는데. 이번에는 안 되네요."

"어, 이거 피는 되는데요?"

제가 가져온 피 묻은 손수건을 가져다 대자.

문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성문이 스르륵 열렸습니다.

...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와, 이걸 공주님이?"

"나였으면 저거 안 챙겼을 것 같은데."

"고마워 공주님. 덕분에 들어갈 수 있겠다."

"에헤헤...."

저희는 기쁜 마음으로 성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성 안쪽은 아주 큰 방 같은 것이 있는데, 이제까지 보지 못한 곳이라서 정말 신기했습니다.

매번 엄마랑 아빠는 이곳에 저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니까요.

"무슨 그림책에 들어온 것 같아요. 거인이 사는 곳에 들어온 기분이에요."

"침대가 엄청나게 크지? 아마 우리 가족 전부가 누워서 잘 수 있을걸? 그 정도면 좁게 느껴지겠지만."

"사실 우리도 왜 저렇게 큰지는 잘 몰라. 혜은 엄마는 12P를 고려하고 만들었다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는 나도 잘 모르고."

"12P, 뭔가 대단해 보이는 이름이네요."

"13P라고 하지 않았어?"

"처음에 12P로 만들었는데, 이제는 13P가 어쩌고 했어."

뭔가 심오한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것 이외에도 이 방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습니다.

침대는 서랍처럼 생겨서, 이것저것 처음 보는 물건들이 가득 들어 있고.

방 전체 벽장에는 역시 신기한 장난감 같은 것들이 전시되어 있으니까요.

"이 장난감 같은 것들은 뭘까요?"

"글쎄, 저번에 눌러보니까 막 진동하던데. 안마기 아닐까?"

"오, 움직여요. 빙글빙글빙글."

커다란 침대 위에서 방방 뛰어도 보고.

이것저것 신기한 것들을 만져도 보면서.

언니들과 저는 아빠가 사는 성을 잔뜩 구경했습니다.

"어라."

이쪽에 있는 물건들은 보석일까요?

유리 같으면서 보석 같기도 한 반짝이는 물건들이 많습니다.

보석이라기엔 크기가 좀 크긴 하네요.

"예쁘다...."

"이 작은 거로 하나 가져가는 거 어때?"

"네? 그래도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지만. 그래도, 가지고 싶잖아?"

"으음...."

"기껏해야 엄마랑 아빠한테 혼나는 정도겠지."

"그것도 그러네요."

솔직히 모험은 전리품이 있어야 하잖아요.

엄마한테 걸리면 혼나겠지만.

그래도 뭔가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럼, 저 이걸로 할게요."

동글동글한 유리로 만들어진 막대기였는데.

그 위쪽에는 핑크색 하트 모양 유리 장식이 붙어 있어서.

마법소녀의 마법봉처럼 생긴 물건이었습니다.

언니들도 비슷하지만, 모양이 다른 것으로 하나씩 고른 뒤.

원래부터 비어 있었던 것처럼 책장을 꾸몄습니다.

"어때 공주님. 재밌었어?"

"에헤헤, 엄청 재밌었어요."

"그럼 나중에도 종종 같이 놀러 오자."

"정말요?"

"응. 오늘처럼 조건이 맞으면 세 명이서 하는 것도 재밌을 것 같아."

"좋아요!"

"오케이, 전리품도 챙겼고. 오늘의 모험은 여기서 해산!"

"해산!"

오늘 언니들과 했던 모험은.

제 첫 번째 모험으로, 평생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정말 재미있었어요!

"루시퍼! 루시퍼!"

"......."

반드시 죽이겠다.

배정아.

"애가 저렇게 좋아하는데, 정말로 안 될까요?"

"너 때문이잖아...."

정아와 내 딸인 서현이가, 모니터를 보며 응원봉을 흔드는 모습을.

나는 망연자실한 느낌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모니터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내 모습이었으니까.

정아는 저쪽 세계에서 내가 콘서트 했던 것들을 전부 녹화해놨는데.

그걸 이쪽에서 볼 수 있도록 변환한 뒤, 심심하면 TV로 돌려 보면서 내 무대를 즐겼다.

문제는 그걸 혼자 보는 게 아니라, 서현이랑 같이 봤다는 거지.

"하아...."

서현이는 내 아이돌 모습인 '루시퍼'에 푹 빠져버렸고.

결국 우리 딸의 최애 아이돌이 아빠인 상황이 되어버렸다.

사실 그것까진 괜찮은데, 그 아이돌이 여장 아이돌인게 문제지.

"서현이가 엄청나게 좋아하잖아요. 눈 딱 감고 한 번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요?"

"내가 마지막에 무대에 선 게 몇 년 전인데.... 연습부터 다시 해야 하잖아."

"그걸 어떻게 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억지로 여장하고 다닌 것도 억울한데.

이제는 딸아이 생일의 광대가 되기 위해서 여장하라니.

아빠라는 자리는 원래 이렇게 힘든 거야?

나는 서현이 앞에서 항상 멋진 아빠가 되고 싶었다고.

물론 루시퍼의 무대가 멋지지 않다는 건 아닌데.

아무리 그래도 여장해야 한다는 게 싫다.

"히잉...."

"뭘 히잉이야."

"그치만 이미 약속했는데."

"어느 틈에!?"

너 진짜 미쳤지.

뭘 네 마음대로 약속하고 있는 거야.

일단 약속한 이상, 콘서트 못 보면 애가 실망할 거 아니야.

"아하, 너 일부러 그랬지. 내가 이러면 할 것 같다고 생각했지."

"에헤헤...."

"너 진짜...."

전성기 시절 무대랑 같이 전성기 시절 자지 맛도 봐야 정신 차리지.

...처음부터 그게 목적 아니야?

아이의 순수함을 이용해서 본인의 삿된 욕망을 채우지 말라고.

'아니지, 내가 딱히 안 해주는 것도 아니고.'

임신했을 때야, 하드한 플레이를 최대한 자제했지만.

아이가 태어난 이후에는, 좀 과격한 것도 적당한 수위 내에서는 해줬다.

물론 예전처럼 위험하다 싶은 수준까지는 가지 않지만....

'어차피 날 화나게 한다고, 그런 걸 해줄 리 없다는 것도 알 거고.'

괜히 애가 전성기 마조 상태처럼 변해서, 일상생활에서도 마조끼가 나오기 시작하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지금은 플레이를 진행하더라도 일정 수위를 넘기지는 않는 중이다.

....내가 너무 정아라고 마조에 관련된 생각만 했나?

'그게 아니면,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사실 딸한테 이걸 보여주면서, 같이 활동하고 싶었던 마음은 안다.

정아가 어린 시절부터 좋아했던 게 내 아이돌 모습인 루시퍼고.

그런 마음을 나눌 상대는 지구에 없으니까.

그렇다고 저쪽으로 넘어갈 수도 없잖아?

'심지어 저쪽도, 이제 새로운 아이돌이 여럿 생긴 모양이던데.'

뭐, 그렇다고 무대를 본 적은 없지만.

그렇게 되는 정보 정도는 전달받은 것 같다.

요즘 꽤 안정화되고 있는 모양이던데, 정말 다행이지.

'아, 이게 아니지.'

순간 다른 생각으로 빠져들 뻔했다.

아무튼 나는 정아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왜 자꾸 나를 괴롭....

"아."

왜 나는 계속 정아가 날 괴롭히고 싶은 거라고만 생각했지?

사실 생각해보면 정아도 서현이와 같은 마음일 수 있는 거잖아.

맨날 오래된 녹화본만 보는 게 아니라, 진짜 루시퍼의 무대를 보고 싶다.

그런 감정은 왜 배제하고 있었던 걸까.

"알았어. 할게."

"정말요!?"

"그렇게 보고 싶었어? 내 무대."

"헉, 들켰나요."

어찌 보면 나한테 있어서 흑역사 같은 일이라서, 일단 부정적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루시퍼로서 활동했던 것은 정아와 내가 이어질 수 있었던 원인이며.

그녀가 평생을 의지한 '언니'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후, 결국 생각해보면 이것도 다 내 원죄인가.'

너무 멋진 무대로 정아를 푹 빠지게 만들고.

이제는 딸아이까지 푹 빠지게 했으니.

최소한의 책임은 져야겠지.

"대신, 촬영 금지야. 무조건 라이브로만 감상할 것."

"그건 좀 아쉬운데...."

"그럼 찍던가. 대신 그 이후로 평생 없어."

"헉, 다음이 있어요!?"

몰라, 묻지 마.

솔직히 이번 한 번도 하고 싶지 않으니까.

그래도 딸이랑 배우자의 부탁인데, 심지어 진심으로 원하는데 해줄 수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오랜만에 매니저 노릇 좀 해라."

"네!"

요즘에는 음악도 AI로 만들 수 있다던데.

시간 없으니까 그런 거라도 써서 신곡 만들어주던가.

아니면 그냥 커버곡으로 무대 진행해도 괜찮고.

"그럴 필요 없어요. 제가 다 준비해놨으니까요."

"아."

애초에 서현이를 이 덕질의 길에 빠트릴 때부터 계획 중이었구나.

그 좋은 머리로 이상한 거 설계하고 있었네....

도대체 내 아이돌 활동이 뭐가 좋다고 저러는지.

"여장만 아니어도 꾸준히 해줄 텐데."

"어쩔 수 없잖아요. 루시퍼는 여자 아이돌이니까요."

"하...."

결국 나는 오랜만에 연습실에 서서.

몇 년 전에 했던 안무를 한 번 시도해봤다.

무대에 정말 오랜만인데도, 생각보다 몸이 잘 움직여지는 느낌이다.

"후우...."

딱히 장비 같은 것 없이도, 내 특성을 이용해서 꾸밀 수 있으니까.

그런 부분도 연습 시간만 충분하면 괜찮을 거고.

연습에 대한 것도....

'철저하게도 준비해놨네.'

내가 사용할 곡부터 안무까지.

혹시 연습할 때 필요할까 싶었는지, 강의 영상까지 다 준비되어 있다.

...역시 간간이 무대를 열어줘야 하나 싶네.

저렇게까지 기뻐하고 원하는데, 안 해주기도 뭐하잖아.

'내가 쪽팔려서 그렇지. 마조에 비하면 엄청나게 건전한 취미고.'

마조도 위험하다면서 금지했는데.

루시퍼를 덕질하는 것까지 막으면, 너무한 처사 같긴 해.

"아, 막 당일에 다른 사람 데리고 오고 그러지 마라. 이건 오로지 너희 모녀 보여주려고 하는 거니까."

"마, 만약 데리고 오면?"

"다음부터는 내 무대가 없어지는 거지."

...최소한 바깥으로 퍼져나가진 않아야 한다.

무대를 재밌게 관람하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무대 내용이 퍼지면 다들 나보고 아이돌 하라고 할 거 아니야.

"진짜 루시퍼...!"

"서현이였죠. 오늘 무대 재미있었어요?"

"네!"

"제가 좋아요?"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속보, 박은혁 여장 모습으로 아빠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

그나저나 진짜 좋아하네.

물론 서현이가 루시퍼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야 알았지만, 그래도 신기할 수밖에 없다.

어린애들은 친구들과 노는 경향이 짙은 편이고.

그러다 보면 친구들과 관심사를 나누면서, 그것에 맞게 평범한 취미가 발생하는 법인데.

서현이는 그것과 반대로, 다른 아이들은 아무도 모르는 이상한 아이돌을 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쪽 세계에는 제가 없잖아요. 활동도 하지 않고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노래가 엄청 좋단 말이에요."

"고마워요."

하, 우리 딸이 저러니까 심장마비 걸릴 것 같네.

여장이고 뭐고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아빠라는 존재는 딸한테 약한 법이니까.

'딸이 아홉 명이나 있어서 문제지.'

아무튼 좋은 아빠가 되어서,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한 거니까.

조금 내가 힘들더라도 견딜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견디고 나서 이렇게 아이들이 웃어주면, 나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나오는 법이고.

'뭐, 노력하기로 하고 시도한 거니까.'

아이들이 각기 원하는 건 다르겠지만.

최대한 아빠로서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루시퍼 언니."

"응?"

"나도 언니처럼 아이돌이 될 수 있어?"

오, 동경과 팬심이 커져 버린 끝에.

서현이는 자기가 직접 아이돌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 보다.

하고 싶다면 못 할 이유는 없지.

"아이돌은, 누구든 될 수 있는 거야."

"누구든...."

"그러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말고, 엄마랑 대화를 나눠보면 어떨까?"

솔직히 말해서 내가 아이돌이긴 해도.

정작 아이돌 생태계나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냥 무턱대고 연습한 다음, 정아가 시킨 대로 했으니까.

'이건 정아가 도와주겠지.'

솔직히 누구보다 아이돌을 잘 아는 엄마가 있는데.

그 이상으로 뭐가 필요하겠어.

'서현이가 아이돌이라....'

아직 너무 애라서 잘 상상이 가질 않네.

그래도 아이돌 같은 경우에는 일찍 연습을 시작한다고 하니까.

'우리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내가 회사 하나 만들어서, 서현이만을 위한 아이돌 회사로 굴리면.

어디 가서 사기당하거나 위험한 일 당하지 않긴 할 텐데.

심지어 전문가인 정아가 있으니까, 정아가 운영하면 되잖아?

아무튼 서현이가 원한다면 할 수 있는 만큼 지원해줄 거다.

물론 아직 어린 나이니까, 나중에 꿈이 바뀔 수 있으니.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게 해줘야겠지만.

"오늘, 감사했습니다!"

"응, 나도 즐거웠어. 다음에 또 올게. 좋아해 줘서 고마워."

아무래도 아빠인 만큼, 딸한테 눈이 돌아가서 그쪽에 집중하긴 했지만.

지금 보니까 정아도 꽤 감동한 표정이었다.

반쯤 울먹이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 보니까, 열심히 준비한 보람이 있네.

"저, 저기요. 언니!"

"응?"

서현이는 돌아가려는 나를 불러세우더니.

내 손에 자그마한 상자를 쥐여주고는, 정아의 뒤로 쪼르르 달려가서 숨었다.

...이건 뭐지?

"키링이에요.... 제가 만들었어요."

가짜 보석처럼 생긴 걸로 도트 찍듯이 열쇠고리를 만들 수 있는 장난감이었다.

그걸로 나름 내 모습을 도트로 찍어서 만든 모양이다.

...그럴듯하고 귀엽네.

얼마 전부터 열심히 뭔갈 하더니, 이거 만들고 있었구나.

나는 무대를 선물해줄 생각만 했지, 이런 걸 받을 줄은 몰랐기에.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고마워 소중하게 간직할게."

우리 딸이 준 선물이니까, 평생 소중히 여겨야겠지.

「응, 엄마는 아빠를 담아주는 그릇인 거야. 그러니까, 엄마는 아빠의 집 같은 거지. 영어로는 케이스.」

엄마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빠나 엄마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취급받지만.

사실 까놓고 보면, 다들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그렇기에 혼자서 버티기에는 너무나 힘들어서.

그 누구보다 힘든 자리에서 싸우는 아빠를 위해.

엄마는 아빠를 보듬어 줄 수 있는 위치를 선택했다고.

「물론, 좋아한다고 고백하기 부끄러워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나름 그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해.」 「힘들 때도 즐거울 때도 자신을 내줘서. 편하게 쉬면서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거든.」

"

조금 오해가 생겨서, 오히려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린 적도 있었지만.

그때 다 터놓고 서로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는 엄마에게 몸을 맡기고, 엄마는 아빠에게 몸을 내어주는.

지금의 관계에 도달했다고 했습니다.

'그릇....'

그렇게 엄마처럼, 누군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라고.

엄마는 제 이름을 유기(裕器)라고 지어주셨습니다.

물론 딱히 그 이름에 맡게 살아가 본 적은 없지만요.

시도해 본 적은 있었지만, 저는 좀 별난 모양이라.

어른들이랑은 나름대로 이야기가 통하는데, 또래 애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습니다.

말도 안 통하는 애한테 몸을 맡길 애가 있을 리 없죠.

'으음....'

그래서, 신님은 기회를 주신 모양입니다.

제가 정말로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해보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요.

그게 아닌 이상,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웠으니까요.

"참나, 재미없는 녀석일세."

"저, 재미없어요?"

"딱히 공격한 건 아니고."

"네...? 공격?"

"못 알아먹었으면 됐다."

꽤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제가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한 걸까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반응이 좀 무서워하고 그래야지. 난 유령이라고?"

"유령이죠."

"...심지어 네 몸을 빼앗으러 온 유령이잖아. 좀 무서워해."

그건 오히려 괜찮습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죠.

기회가 되면, 저는 누군가의 그릇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유령이 몸을 빼앗는 것도, 어쩌면 유령의 영혼이 저에게 들어온다는 것이고.

이건 제가 그 유령의 케이스가 된다는 의미기도 합니다.

...그거라면 엄마의 기분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사는 건 굉장히 재미없으니까요.'

물론 엄마랑 아빠가 잘 놀아주고, 아낌없이 지원도 해주셔서.

제가 해보지 않은 건 거의 없었지만.

그런데도 무료합니다.

제가 취향이 독특한 건지, 어지간한 걸로는 즐겁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엄마는 예전에 비슷한 기분이었다가, 아빠를 만나고 달라졌다고 하셨습니다.

엄마가 아빠의 케이스가 된 이후로, 무료함이 해결되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도 누군가의 케이스가 되면, 이런 기분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나이답지 않게 평온한 녀석이네...."

"나이, 말한 적 없는데요."

"딱 봐도 초등학생이잖아. 애매하게 큰 것도 아니고. 엄청나게 앳된 얼굴이면서."

"그쪽은요?"

"...중학생."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 크게 하품했습니다.

굉장히 피곤해 보입니다.

아빠가 저럴 때는 엄마가 안아주면서, 괜찮냐고 했었죠.

"뭐하냐?"

"피곤해 보여서요."

"앙?"

"저한테 안겨서 쉬세요."

물론 어디까지나 제가 제 몸을 껴안는 거라서.

모양새가 매우 이상했지만.

아무튼 껴안는 겁니다.

"그게 뭔.... 너 진짜 이상한 애다."

"저 이상해요?"

"어. 이제까지 본 사람 중에 가장 이상해."

흐음, 또래 아이들과만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저는 중학교에서도 맞지 않는 걸까요?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지금 그대로인 건 싫은데.

"난 지금 네가 평온한 것부터 신기해. 내가 뭔지 모르겠어?"

"귀신?"

"그래, 그런 거 비슷한 거지. 심지어 네 몸의 제어권도 빼앗고 있잖아. 몸을 훔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야, 제가 내주고 있으니까요. 스스로 하는 행동에 무서움을 느낄 필요는 없잖아요."

"하아?"

...지낼 몸이 필요해서 온 거잖아요?

그럼 내 몸을 내어주면, 그걸로 충분히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제 몸에 들어오는 것이니, 저는 원하던 케이스가 되는 셈이잖아요.

"정말로 괜찮다고?"

"네, 몸이 없어서 불편했던 거잖아요? 제가 빌려드릴게요."

"...내가 이제까지 만난 사람은 다 싫어하던데."

"그래요?"

"응. 그래서 항상 길게 뺏기는 힘들어서, 원하는 건 끝까지 못 했지만."

"원하시는 만큼 빌려드릴게요."

"...진짜 이상한 녀석이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굉장히 고마워하는 게 느껴집니다.

역시 같은 몸에 있으니까 감정 같은 것도 공유되는 걸까요?

...확실히 엄마 말대로 케이스 역할이라는 건, 즐거운 역할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괜찮은 거야? 일단 초등학생인데, 이렇게 멀리 나가도?"

"네, 저니까 아마 엄마도 믿고 있을 거예요."

"초등학생에 대한 신뢰도가 아니잖아...."

그야, 저는 다른 초등학생들이랑은 다른 취급을 받고 있으니까요.

...다들 천재가 어쩌고 하긴 하지만, 저는 그냥 조숙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이 나쁘지는 않지만, 어디까지나 초등학생 수준의 문제니까요.

"이해할 수 없는 녀석이네."

"그래서, 어딜 가는 건데요?"

"...죽은 사람은 어떻게든 끝내고 싶은 미련 같은 게 있는 법이거든."

"무슨 미련인데요?"

"몸까지 뺏어놓고 그런 것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어? 오히려 내가 하는 걸 포장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쁜데."

"빼앗으신 게 아니라, 제가 빌려드린 거라니까요."

"그게 그거지. 아무튼 네 몸인데 내가 움직이고 있잖아."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시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는 편하신 대로 하시는 게 좋으니까요."

사실 그녀가 뭘 하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제 몸이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는 점은 조금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저는 잠자코 몸을 빌려주기로 했습니다.

그녀는 제 몸을 가지고 이것저것 교통을 갈아타더니.

지금은 기차까지 타버렸습니다.

"용돈 다 써버렸네. 올라오는 건 알아서 해라."

"네, 괜찮아요."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건지 말해줄래...?"

아까 전부 말한 건데, 이해하지 못하신 모양이네요.

오히려 몸을 빼앗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저런 걸 하나씩 다 설명하는 게 더 이상한데.

역시 본인의 이상한 점은 자신이 느끼기 어려운가 봅니다.

"헉!?"

"왜 그러세요?"

"...평소에는 이쯤 되면 쫓겨났으니까. 자다가도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이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빌려드리겠다고."

"...고맙다."

점점 표정이 진지해지는 모습을 보니.

역시 사람 몸을 나쁜 의도로 강탈할만한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오래 못 버텼던 거겠죠.

"......"

"안 들어가요?"

"발이 안 떨어질 뿐이야."

그리고 어떤 집 앞에 도착하고 나서.

그녀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마음을 다졌는지.

현관문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가며 인사를 던집니다.

"유내야...?"

"엄마...."

아마 그녀의 이름이 유내인 것이겠죠.

분명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보일 텐데.

그녀의 어머니는, 말 몇 마디만으로도 그녀를 알아보며 놀란 표정으로 뛰어와서.

그녀를 꼬옥 안아줬습니다.

"유내야, 유내야...!"

"엄마, 나 숨 막혀."

그렇군요.

미련이라는 건 부모님이었나 봅니다.

...집 안에는 아직도 유내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잔뜩 남아 있었습니다.

"집, 그대로네. 이제 나도 없는데 다 갖다 버리지."

"엄마는, 유내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거든."

"그런 거 믿지 말라고. 바보야?"

죽은 사람은 못 돌아와 엄마.

나는 어디까지나 귀신이고.

예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어.

"아, 밥 차려줄게. 기다리렴. 오랜만에 힘 좀 써야겠다."

"...그게 아니라."

"밥 먹으면서, 오랜만에 이야기도 하고 그러자. 응?"

"......."

유내는 결국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눈물이 터져 나왔고.

한참을 울고 나서야, 자신의 엄마에게 속내를 마구 털어놓았습니다.

"미안해, 마지막일 줄 몰랐단 말이야. 그렇게 막 화내고 이상한 말 하지 말걸...."

"유내야. 엄마는 괜찮아. 유내가 이렇게 돌아와 줬잖아."

"엄마, 알고 있잖아. 나는 못 돌아와. 죽었다구...."

그녀의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마구 젓고는.

유내를 껴안으며 그 말을 부정하려고 했습니다.

"벌써, 10년 가까이 지났어."

"...유내야."

"나, 죽은 지 한참 지났다고. 근데 엄마는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야."

"나는...."

"이제 나 놔줘. 엄마도 엄마 인생 살아야지. 나는 푹 쉴게. 그 말 하려고 왔어."

한참을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울고 또 우는 두 모녀를 보고 있으니.

무언가 묘한 기분이 듭니다.

내가 빌려준 몸이, 이렇게나 아름다운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에 놀랐거든요.

'...이건, 어쩔 수 없네요.'

몰랐으면 모를까.

케이스로 사는 것이, 이렇게나 좋다는 걸 알아 버렸으니.

아마도 저는 평생 이 상태를 포기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안녕."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유내는 사라지려고 했습니다.

아마 미련을 해결해서, 성불한다거나 뭐 그런 거겠죠.

정확한 시스템은 모르겠지만, 그런 느낌일 겁니다.

'하지만, 그건 싫어요.'

처음으로 제 안을 채워줄.

나를 케이스로 만들어 줄 사람을 찾았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습니다.

"엣...?"

"가지 마요."

"너, 뭐 하는 거야? 나 이제 올라가서 쉴 거야."

"여기 계속 있어 줘요."

"무슨 미친 소리야...!"

"앞으로는 제 몸에서 같이 살아요. 여기가 오늘부터 유내의 집인 거로 해요."

물론 성불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던 그녀는 제 손을 뿌리치려고 했습니다만.

하지만 제가 더 힘이 강했기에, 그냥 무시하고 제 몸 안으로 끌고 들어와서.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잠가버렸습니다.

"야!?"

수단은 조금 과격했지만.

저한테서 도망가려고 한 유내가 나쁜 거니까요.

'과연, 그런 일이 있었나요.'

유기가 최근 이상했던 이유를 전부 보고 났더니, 나름 즐거워져서 자연스레 웃음이 흘러나왔습니다.

평소에 흥미라는 걸 느낀 적이 없는 막내라,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 이상으로 유기가 막 나가는 느낌이라, 솔직히 안심했습니다.

저러면 아마 걱정할 필요 없겠죠.

물론 그녀에게 붙잡힌 귀신은 조금 불쌍하지만.

좋은 녀석인 것 같으니, 지금처럼 유기와 친하게 지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늘아?"

"네?"

"뭘 그렇게 봐?"

"유기요. 요즘 즐거워 보이여서요. 보고 있으니까 저도 즐거워져요."

"...초등학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야, 저랑 유기는 조금 특이하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최고의 재능을 가진 구원자들의 딸들인데.

이 정도 애늙은이 발언은 이해하세요.

"아빠는 알아차리셨어요?"

"...일단, 꽤 특이한 특성을 각성했다는 정도까지는 파악했는데."

그야, 이제 갓 각성한 유기의 특성 정도야 금방 파악하셨겠죠.

10레벨이 된 것이 최근인 저도, 금방 알아차릴 정도잖아요?

아, 저는 그냥 각성 여부만 알아차렸었던가요?

"난 유기보다 네가 무섭다...."

"귀여운 딸한테 무슨 뜻이에요?"

"그러게, 우리 하늘이 이렇게 이상한 말만 안 하면 귀엽고 예쁜데 말이야."

"으브...!?"

아빠는 제 뺨을 잡아당기면서 장난을 치셨습니다.

...애정이 듬뿍 담긴 장난이라 그냥 받아주긴 했습니다만, 나중에 꼭 복수할 겁니다.

최연소 S급 헌터를 얕보지 말라고요.

"애초에 아빠 아들딸은 어딘가 다 이상해요."

"그거 너도 포함이다...?"

"이상하잖아요."

그 정도는 자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초등학생에 S급에 도달할 수가 있고.

이런 식으로 어른에 가까운 대화를 하겠어요.

"그나저나 걱정이네요."

"뭐가?"

"제가 이렇게 잘났으면, 성인이 되자마자 아빠랑 결혼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건 또 뭔...."

"그야 그렇잖아요. 아빠는 엄마도 읍...!?"

엄마도 원래 아빠 딸이었고.

심지어 이름이 하늘이었으니까.

저도 가능성이 있다는 수준 높은 농담이었는데.

아빠한테는 너무 자극이 강했나 봅니다.

"너, 진짜. 아빠 화낸다."

"농담이에요."

"알고는 있는데, 아무래도 아빠는 식겁한다고...."

그때 엄마는 피가 섞인 딸이 아니었고.

심지어 시간 여행으로 인해서 많이 달라진 모습까지 있으니.

당연히 저와는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애초에, 아빠를 그런 식으로 좋아하지도 않고요."

"그건 정말 다행이네...."

하지만 항상 고민인 것은 있습니다.

아빠는 13명 모두가 정실이고, 사랑하는 부인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에 그런 평등함 따위가 존재할 리 없습니다.

과연 누가 정실일까요.

딱히 엄마가 정실이어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아빠라는 소설의 애독자로서, 관심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나름대로 기준을 잡아서 스프레드시트에 티어표를 작성하고 있지만.

아빠의 기억이 진행될 때마다 매번 바뀌어서 고민입니다.

거의 온라인 게임 직업 티어표 같은 느낌일까요.

밸패가 꾸준해서 뭐라고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최근에는 설아 이모가 좀 높던데요.'

다만 항상 약세인 이들이 있는데.

바로 아이가 없는 4명의 이모입니다.

아무래도 가족이라는 틀은 애정도를 높이는 기준이 되고, 이벤트도 많이 발생하니까요.

"요즘은 몸 좀 괜찮아?"

"네. 어느 정도 조절 가능해진 후로는, 가족들의 기억만 받아들이고 있으니까요."

제가 가진 특성은, 다른 사람이 겪은 경험을 흡수하는 형태입니다.

하지만 말이 흡수지, 그냥 어떤 기억을 제가 경험하는 것과 비슷하거든요.

지금에야 익숙해져서, 어드벤쳐 게임 같은 감각으로 즐길 수 있고.

대상을 선택할 수 있어서, 믿을만한 사람들의 기억만 읽고 있습니다.

'...고생이었죠.'

아무것도 모르는 초등학교 저학년 여자아이가.

모르는 아이들이나 어른들의 기억에 갇혀서, 강제로 그 인생을 체험한다는 것은.

끔찍하게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필이면 학교에 갔을 때 벌어진 일이라, 아빠랑 엄마가 도와주기도 힘드셨고.

기억을 흡수하는 것은 정말 짧은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무언가 대응하기도 전에 다음 특성이 발동해, 저를 괴롭혔습니다.

아무리 울고 무섭다며 도망치려고 해도.

연속해서 찾아오는 누군가의 인생 경험은 고역이었습니다.

사실 아이들의 것은 나은 편이었습니다.

어른들의 것은 길이가 워낙 길었던 터라, 제가 그 사람인지 저인지 헷갈릴 정도로 그 인생에 심취하게 되었으니까요.

그 어른이 나쁜 사람이면, 나쁜 감정에 너무 매몰되고.

기고한 인생을 살았으면, 무척이나 고통받았습니다.

...지금은 웃으면서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사건이지만, 당시에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살하려고 옥상에서 뛰어내렸습니다.

"힘들면 꼭 아빠랑 엄마한테 말하고. 엄마랑 아빠가 힘들면 다른 언니들이나, 이모도 괜찮아."

"너무 걱정이 많으시다니 까요."

"......."

하지만 눈앞에서 딸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본 아빠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아빠의 관점에서 그 상황을 지켜본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습니다.

...죄송할 뿐입니다.

'아니, 감사하다고 말하기로 했었죠.'

아빠는 그쪽을 더 좋아하시니까요.

아무튼 그때의 저는 아빠에게 구해졌고.

아빠와 엄마의 인생을 경험하면서 구원받았습니다.

'정확히는, 엄마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의 기억이었던가요.'

제 이름이 왜 하늘이 인지.

왜 다른 언니들과 다르게 아빠의 성을 따왔는지.

그 이유를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이었습니다.

엄마가 아직 박하늘이라는 이름으로 지내던 시절.

엄마의 양아빠였던 아빠의 사랑은.

당사자가 아닌 저까지 구원해줄 정도로 따뜻했으니까요.

'어쩌면 당사자일지도 모르죠.'

저는 엄마의 그 시절의 다음을 이어받은.

두 번째 박하늘이니까요.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때 있었던 제 각성은 사고였잖아요. 예상할 수 있는 게 더 이상해요."

오히려 제 이상을 연락으로 듣자마자, 하던 일도 다 때려치우고 달려온 아빠가 멋있는 겁니다.

나름 아빠가 열심히 놀아준다고 해도, 다른 가족이 많은 터라.

아빠는 엄마보다 나랑 안 놀아준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과 상관없이 아빠가 저를 무척 사랑하신다는 걸 깨닫는 사건이기도 했었고요.

'뭐, 아빠 관점으로 그걸 다 경험해서 할 수 있는 말일지도 모르죠.'

아빠가 저를 비롯한 가족들을 모두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저는 그대로 체감했기에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받는 제가, 이깟 능력에 져서 자살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거고요.

엄마 '박하늘'과 관련된 기억이, 제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구원자였다면.

정신을 차린 제가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도록 손을 벌려준 것은, 현재의 저에게 쏟아지는 아빠의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자책할 이유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빠는 제 걱정할 시간에, 엄마랑 이모들을 어떻게 만족시킬지를 고민하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요."

"그거 초등학생이랑 대화할 주제가 아니라니까...."

"저는 슈퍼 초등학생이라 괜찮아요."

따지자면 아빠보다 오래 살았다고요.

물론 그만큼 정신적으로 성장했냐고 한다면, 그건 아닙니다.

제가 판단한 건 없고 전부 기억을 강제로 시청한 것일 뿐인지라.

제대로 어른이라고 말하기에는 쪽팔린 수준이니까요.

"어른인데 저보다 못한 사람도 많잖아요?"

"그건 그렇지."

진짜 이상한 사람 많거든요.

남자아이들을 성욕의 대상으로 보는 여자 선생님의 기억을 봤을 때는.

진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나마 저에게 있어서는 또래 아이들이라, 심한 침식이 일어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좋지 않은 경험이었음은 분명합니다.

물론, 제 신고로 선생님은 바로 잡혀들어갔습니다.

몰래 찍어둔 남자애들 나체 사진을 가지고 계셨거든요.

"그래도 다행이네. 요즘에는 갈수록 감정도 늘어가고....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

"게임이 도움이 많이 되더라고요. 비슷한 상황을 다룬 작품들을 보니까,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서...."

그리고 사실 지금 제가 기억을 읽어도 괜찮은 건.

혜미 이모님에게 배운 기술의 덕이 큽니다.

제가 받아들여야 하는 기억을, 다른 형태로 받아들일 수 있는 훈련을 도와주셨거든요.

기억 관련 특성의 선배라 그런지, 그런 활용에 대해서 빠삭하셨고.

저에게 딱 맞는 형태를 찾아서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혜미 이모님은 항상 스승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방에 격리되어서 쉬고 있었죠,'

누군가랑 접촉하는 것 자체가 저에게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특성을 제거하는 것은 최후의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그야, 제 몸에 손을 대가면서 부자연스럽게 고쳐내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제가 이미 경험한 것을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녔다 보니.

아빠는 당장 그 부분은 격리로 해결하고, 장기적으로 저를 어떻게 구해줄지 고민 중이셨습니다.

그때 스승님이 나서신 거고요.

그 당시 제가 그나마 의지할 수 있던 기억은, 미연시를 좋아하던 담임 선생님의 기억이었기에.

저는 격리된 방에서 어드벤쳐 게임을 하며 위안을 많이 받았고.

그 덕분에 가장 안정적으로 다른 기억을 보는 방법이, 어드벤쳐 게임처럼 기억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담임 선생님께는, 모든 일이 해결된 뒤에 따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선생님이 괴짜에 변태 시긴 해도, 굉장히 올바르고 좋은 분이셔서.

그 선생님의 바른 인생 덕분에 제가 나아갈 길을 찾았으니까요.

하여튼 스승님은 그걸 이용해서, 제가 기억을 순하게 읽는 방법을 만들어주셨고.

그 덕분에 지금도 어드벤쳐 게임을 하는 감각으로 가족들의 기억을 즐기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제 주위에 좋은 분들이 많았네요.'

방황하던 아이인 저를 이끌어준 어른들이 많았기에.

저는 이 자리에서 유기의 기억을 읽으며 웃을 수 있는 거겠죠.

...저도 그런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뭐, 벌써 고민할 건 아니겠지만요.'

아빠가 그러셨습니다.

지금은 고민 없이 장난치고 놀면서 지낼 시기라고.

그러니까 당분간은 좀 더 어리광을 부려볼 생각입니다.

"너희, 또 싸웠냐...?"

"아니 저 인간이 또 지랄하잖아."

"설화야, 오빠한테 지랄이 뭐야, 지랄이.... 예쁜 말 써야지?"

분명 더 어릴 때는 사이가 좋았던 것 같은데.

요즘에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원래 남매는 이러는 거라고 듣기는 했지만.

"야,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나도 내가 하고 싶은 것 좀 하고 살자."

"그럼 피해를 주지 말던가! 밤 중에 시끄럽다고."

"그건 미안한데, 다짜고짜 와서 사람을 패냐?"

"내가 때려봐야 얼마나 아프다고? 그렇다고 귀여운 여동생을 똑같이 쥐어패냐?"

서로 잔뜩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벌써 머리가 아프다.

사이 좋은 혜정 혜자 자매의 모습과는 상반되는 모습.

너희도 좀 걔들처럼 잘 지내면 안 되겠냐?

'뭐, 어릴 때는 다 이런 느낌일지도 모르겠지만.'

치고받고 싸우면서 친해지는 관계도 있는 법이지.

따지고 보면 지금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도, 예전에는 그런 관계였던 경우가 많으니까.

...시간이 해결해주려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금은 마음을 풀고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애들 엄마인 설아는 마냥 웃으면서 안아줄 뿐이지, 이걸 해결할 생각도 없는 것 같고.

나도 역시 비슷한 스탠스를 취해야 하나?

"그리고 애초에 저 자식이 왜 오빠야? 기껏해야 1분도 안 되는 차이일 텐데. 억울해 죽겠다니까?"

"으음...."

항상 쌍둥이의 문제긴 하다.

거의 동시에 태어났는데 오빠와 여동생의 관계가 되는 거니까.

오빠인 설빙이도, 여동생인 설화의 그 주장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치, 그저 네가 너무 애처럼 굴어서 여동생일 뿐."

"뒤진다, 진짜?"

그냥 도발이었네.

아무튼 둘은 굉장히 잘 지내다가.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사이가 나빠졌다.

아마 처음 시작은 설화가 시작했던 것 같은데.

설빙이도 처음에는 그런 히스테리를 받아주다가.

어느새 포기하고 같이 부딪히면서 지금에 이르렀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아빠가 뭘 어떻게 해줄까?"

"저 인간이랑 방 좀 떼어놔 달라고. 우리 둘 다 엄마 방이랑 붙어 있으니까 맨날 부딪히잖아!"

"야, 누가 들으면 바로 옆방인 줄 알겠어. 까놓고 말해서 엄마 보러 갈 때 부딪히는 거지, 평소에는 보이지도 않으면서."

"...그, 그런가?"

뭘 설득당하고 있는 건데.

아직 애들이라서 그런지 싸우는 것도 서툰 느낌이다.

...하긴, 저런 걸 보니까 딱히 걱정이 안 생긴 하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응?"

2차전을 시작한 둘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더니.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하늘이가 웃으면서 말했다.

...최근에는 다시 많이 웃어서 다행이네.

"언니랑 오빠는, 서로를 엄청나게 좋아하니까요."

"안 좋아하거든!?"

"보세요. 얼마나 잘 맞아요."

음, 원래 동족 혐오라는 말도 있잖아.

그래서 잘 맞는데 자꾸 싸우는 거 아닐까?

뭐, 하늘이가 그런 간단한 것도 생각하지 않고 말했을 리 없지만.

"정말로 안 좋아하세요?"

"당연하지. 이 짜증 나는 자식을 좋아할 리가 있냐고!"

"에에, 전에 설빙 오빠가 감기 걸렸을 때. 전전긍긍하면서, 계속 훔쳐보셨잖아요."

"내가 언제!?"

말은 아니라고 하고 있었지만.

설화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해버려서, 이미 자신이 그랬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때 걱정을 많이 하는 것 같긴 했는데.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온종일 오빠 걱정만 하다가. 결국 몰래 가서 물수건 갈아주고."

"아, 아니라니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다,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겠지!"

그 정도였구나.

사실 우리 딸은 츤데레였던 건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설빙이도 모르고 있었는지, 조금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오빠도 다를 건 없죠. 매번 언니가 뭐라고 하니까. 틱틱거리면서 대응하는 척하지만. 왜 그러는지 항상 고민하고 계시잖아요. 무슨 나쁜 일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서 알아보려고 하고."

"아닌데!?"

"저번에 언니가 생리해서 끙끙 앓고 있으니까. 혹시 누가 괴롭힌 건가 해서 싹 살펴보셨잖아요."

"너 내가 그런 짓 하지 말라고 했지!?"

"아니, 요즘 이상한 애들이 많잖아."

"그리고 별일 없는 것 같으니까, 몰래 진통제 사다 놓으셨잖아요."

"그, 음...."

이런 것만 들으니까, 진짜 사이좋은 남매 같은데?

그냥 겉으로만 싸우는 거지, 평소에 서로를 엄청나게 걱정하고 아끼는 거 아니야?

약간 내 사람은 나만 괴롭힐 수 있다는 그런 건가?

"오빠는 매번 그런 식이야...."

"뭐?"

"닥쳐, 이 여동생 생리까지 챙기는 변태 시스콘아...!"

"야,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쓰레기 같잖아."

틀린 말은 아닌데, 묘하게 무지막지한 워딩이 되어 버렸는데.

고로시 좀 잘 치네.

딸아, 아빠는 너를 그렇게 무지막지한 언론인으로 키우지 않았단다.

"사실 제가 말한 건 빙산의 일각이고. 매번 두 분 서로 어떻게든 챙겨주지 못해서 안달이잖아요."

"그런 거 아니거든!? 그냥 의무감에 하는 거야!"

"뭐, 그런 느낌."

지금 보니까, 대부분 짜증은 설화가 내고 있고.

설빙이는 대충 그것에 맞춰주는 느낌인 것 같기도 했다.

방금도 되게 설렁설렁 받아쳤지.

'딱히 걱정할 필요는 없었네.'

얘들이 알아서 해결할 문제라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아마 하늘이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나에게 알려주면서.

본인들도 그 마음을 깨닫게 해주려는 생각이었겠지.

"에, 그건 아닌데요."

"응? 아니야?"

나중에 하늘이랑 같이 이야기하고 있을 때 물어봤더니.

그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꺼내서 조금 당황했다.

그러면 왜 굳이 그런 짓을?

"재밌잖아요. 언니 오빠들 당황하고 그러는 거 귀여우니까."

"......."

하늘이가 밝아진 건 좋은데, 기억 읽는 능력을 들고 악동이 되는 건....

솔직히 좀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오빠가 좋았다.

사실 말이 오빠지, 태어날 때부터 같이 지낸 친구 같은 거였다.

심지어 오빠는 소심한 나를 많이 챙겨주고 도와줬으니까, 더더욱 그런 마음은 커져만 갔다.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우리끼리의 이야기를 하기에 가장 좋은 상대였고.

심지어 그렇게 오래 함께하는데도, 오빠는 단 한 번도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오빠를 좋아하기에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좋아하는 사람의 행동이, 거북하게 느껴질 리가 없으니까.

"으에에에엥!"

"설화야, 괜찮아?"

그렇기에 나는 항상 오빠를 찾고 의지했다.

그럴 때면 오빠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도와줬고.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으니까.

...내가 잘못한 거다.

힘든 일이 있으면 오빠가 아니라 엄마랑 아빠를 찾으면 되는 건데.

사실 생각해보면, 오빠는 나랑 같은 또래의 남자애일 뿐인데.

뭔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데.

"오, 빠...?"

"빙아, 괜찮, 아?"

"에...?"

내가 초등학교에서 친구랑 싸웠는데.

그 친구가 갑자기 각성이라는 걸 했고.

특성이 폭주해서, 다투고 있던 날 공격해왔으니까.

그날은 싸운 친구와 화해하는 걸, 엄마나 아빠가 아니라 오빠가 도와주기로 했었고.

오빠는 아무것도 없는 맨몸으로 내 친구와 싸웠다.

아니, 싸웠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오빠가 일방적으로 맞았으니까.

처음에는 무서워하며 당황하던 나도.

중간부터는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계속 고통스럽게 얻어맞고 피가 흩뿌려지고 몸이 피멍투성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아무 힘도 없는 나는 계속 지켜보아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오빠가 버텨준 덕분에.

마력이라는 게 다한 내 친구가 기절했다는 거고.

그 후에는 어른들에게 발견되어, 그대로 병원에 이송되었다.

'다행은, 무슨 다행이야....'

그날 이후 오빠는 한동안 병원에서 살아야 했고.

그때 그 아이가 사용한 능력이 돌멩이를 사용하는 것이었기에.

아직도 돌멩이가 날아오거나 하면 긴장하고 무서워한다.

그걸 보고 있었던 나도 무척이나 무섭고 괴로웠는데.

직접 맞고 있었던 오빠는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오빠는 나보다 강했다.

육체적인 힘이 강한 게 아니라.

아무리 위험한 것이 있어도, 나를 지키겠다고 앞에 나설 수 있는....

정신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런 강함이 없었기에.

좋아하는 오빠에게 내 모든 힘겨움을 의지하고 전가했다.

오빠가 그렇게 된 건, 결국 그 결과일 뿐이었다.

아무리 지금 그 자리에 오빠가 없었기를 바라더라도.

그때의 연약한 나는 움직이지 않고.

꿈속의 오빠는 매번 고통 속에 신음한다.

"정말, 싫어...."

나 자신이.

오빠는 정말 좋지만.

그 옆에 있고 싶은, 연약해 빠진 나 자신이 너무 싫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빠를 상처 입게 만드는 내가 싫다.

그래서 나는 오빠랑 멀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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