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페미헌터-260-8화 (268/289)

지금이야 하트Q 문신이 지워질 정도로 교육을 받았으니 괜찮지만.

계속 저 문신이 방해하더라고.

'참 이상하단 말이야.'

다른 셋은 단숨에 효과를 잃은 좆밥 세뇌였는데.

왜 이렇게 공주만 세뇌를 풀기 어려웠는지 의문이었다.

물론, 그 부분도 오늘이 되면서 해결될 가능성이 컸지만.

"자, 3145. 내가 지금부터 기억 관련 특성으로 서포트할 테니까. 과거의 일들을 떠올리는 거야. 그래서 네 본명을 알려줘."

"네."

워낙 녀석들이 그녀의 과거를 핍박하고, 모든 기억이 환각과 꿈이라는 듯이 세뇌했기에.

그것을 복구하는 과정은 꽤나 복잡한 편이었다.

그래도 저번처럼 방해는 없으니까, 천천히 하나씩 되찾아가면 되는 부분이지만.

"좋아, 이 정도면 된 것 같네. 자, 이제 이름을 말해줄래?"

"박하늘, 박하늘이요...."

"응?"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 이름을 듣는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게 고통스러워서,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내 팔에 걸려있던 팔찌 하나가 터져나가더니, 무의식적으로 붙잡으려던 공주의 모습이 점점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의문을 가진 적이 있다.

왜 지난 회차의 나는, 겉으로 티는 내지 않더라도 공주를 좋아했을까.

당장 공주한테 들은 하라, 내일, 소이 셋에게 내가 했던 취급만 봐도 이상하다.

왜냐하면 이 넷은 아무리 세뇌당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소중한 고아원 아이들을 죽인 이들이고.

내가 공과 사를 잘 구분하는 편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이라서 그런 부분에서 마음을 깊게 먹기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공주는 그 당시 내 감정을 그대로 공유받던 설아에게 사랑받는 동생이었고, 이는 내가 진심으로 공주를 좋아하고 아꼈다는 소리가 된다.

지금의 나야, 회귀한 공주에게 구원받았기에.

이미 내가 공주를 좋아하고 있으니, 그녀를 위해 뭐든지 하려고 하지만.

지난 회차의 나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잖아.

"윽...."

팔에 감겨있는 팔찌 하나가 반짝거리는 것을 느끼는 순간.

천천히 시야가 밝아지면서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팔찌가 부서지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식이었나보다.

다만 자세한 내용을 듣기도 전에 날아온 게 아쉽네.

이제 겨우 공주의 이름만 들었는데, 이렇게 내쫓아버리는 게 어딨어.

망할 시스템 같으니라고.

"음?"

이번에는 조금 특이하게도, 아무도 없는 영화관에 덩그러니 있었다.

영화관에 무슨 일로 와 있는 건가 고민하려는 찰나.

갑자기 불이 꺼지면서 상영이 시작되었고, 스크린에 나오는 것은 영화가 아니라....

"나?"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익숙해서, 행동을 자세히 살폈더니.

아무래도 내가 경험한 '레지스탕스'에서의 행동 강령들과 비슷했다.

"분명 지구인데? 레지스탕스...?"

애초에 지난 회차에서 나는 엘프들에게 붙잡혀 죽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사실상 거기서 끝, 저렇게 나이를 먹은 미래에 도달할 확률이 제로에 가깝다.

그렇다면 이 영상은 대체 뭐지?

"허윽...!?"

그 순간 찢어질 것 같은 두통과 함께, 무언가 어렴풋한 기억이 흘러들어온다.

내가 아는 것과 다르게 느릿한 속도로 지구를 침략하는 녀석들과.

뒤늦게 그런 녀석들을 막으려는 나를 비롯한 레지스탕스의 멤버들.

마치 묘족들이 엘프들에게 저항했던 것처럼.

인간들도 아무것도 모르다가 침략당해, 저항하려고 했던 그런 기억.

"이게 뭔...."

나는 공주가 왔던 회차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그야, 공주가 사용할 수 있는 기억 회귀는 단 한 번만 가능한 것이니까.

그걸 사용하면 특성이 사라져버리는,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기억은 절대로 그 회차가 아니었다.

내가 공주에게 들은 것과 전혀 다른 상황이야.

그리고 그걸 떠나서, 엘프들의 행동 방식과 일어난 사건들 자체가 달라.

「사, 살려주세요...!」

그때, 방금 흘러들어온 기억 때문에 신경 쓰지 못하던 스크린에서 비명이 들렸다.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낄낄거리는 엘프에게 강제로 벗겨지고 있는 모습.

스크린 속 나는 어떠한 고민도 없이 달려나가더니, 그 엘프를 베어냈다.

예상치 못한 기습에 엘프는 방심하다 상처를 입었고.

그 상처를 추스르는 사이, 나는 아이를 안고 도망쳤다.

"...설마."

「이름.」 「오, 오나홀...?」 「이름 아니잖아. 불리는 별명 말고.」 「그거 말곤 없어요....」

이미 엘프들에게 세뇌당한 어머니에게 태어나, 엘프의 좆집이 되기 위해 자라나는 교육을 받고 자라났으리라.

묘족을 통해서 자주 보았던 장면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그 엘프는 교육이 끝나서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는 소아성애자였고, 아이에게 무리한 관계를 요구하게 되면서 본능적으로 아이가 거부한 것이었다.

「귀찮아지겠네.」 「아, 아저씨는....」 「박은혁이다. 뭐라고 부르든 네 맘이고. 음, 이름이 없는 건 불편하네.」

스크린 속의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피식 웃었고.

오늘 하늘이 참 좆같게 흐린데, 그런 날 좆같은 일을 당할 뻔했으니.

하늘이라는 이름이 어떻겠냐는 말을 했다.

"...잠시만."

하늘이라고?

그 순간 저 어린아이의 앳된 얼굴이, 묘하게 공주의 얼굴과 겹치면서.

조금이지만 닮아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튼, 아저씨는 꽤 무서운 사람이거든. 네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그 엘프들을 다 죽여버릴 거다.」 「네...?」 「...어린애가 이해할 만한 말은 아니었나.」

그 뒤로 하늘이는 나와 함께 생활했다.

가끔 레지스탕스에서 귀여운 공주님 취급도 받고.

갈수록 처음의 무뚝뚝한 표정은 사라지고, 다양한 감정과 표정을 지닌 평범한 아이로 자라갔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아저씨가 아니라 아빠라는 호칭을 쓰게 되고.

레지스탕스의 동료들이 '박하늘'이라 부르면서, 없던 성씨도 생겨버려.

사실상 박은혁의 딸처럼 자라났다.

「이건 뭐냐...?」 「이상해요. 분명 아빠랑 똑같이 했는데.」 「줘 봐. 내가 할게.」

내 생일이라고 미역국을 끓여주겠다며, 괴식을 만드는 모습은 물론이고.

별것 아닌 걸로 다투어서 삐지거나 하는 귀여운 모습까지.

겨우 둘 뿐인 가정이지만, 나름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개같은 년들."

물론 그건 오래갈 수가 없는 행복이지만 말이야.

레지스탕스의 말로라는 것은 굉장히 끔찍하기 마련인데.

그중에서 레지스탕스의 구심점이 되어, 계속 지구의 관리를 방해한 나에 대한 엘프들의 분노는 아주 큰 것이었고.

그 분노는 당연하게도, 나에게 있어 최악을 선사하기 위한 고민을 만들었다.

원래부터 악질적인 행동을 자주 했던 그 자식들은.

나를 붙잡는 순간, 아주 끔찍한 계획을 밀어붙였다.

「하늘이는 아무런 죄도 없잖아. 이 개같은 년아...!」 「우리가 뭘 했다고 그래. 결국 이 아이도 우리의 소유물인 인간이잖아? 그럼 가치 있게 사용하면 되는 거지. 그렇게 쓰이는 것이 인간의 유일한 행복이거든?」 「루이코...!」 「오히려 너에게 감사하고 있어. 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특성이라니, 그런 특성은 처음 봐. 보물을 구해왔다니까?」

엘프 자식들은 하늘이의 특성을 이용해, 부진하던 지구의 식민지화를 가속할 계획을 세웠다.

마음 결정을 이용해서 강제로 하늘이를 10레벨로 만들고.

그녀가 특성으로 갈 수 있는 최대한의 과거로 보내기로 한 거지.

계획의 골자는 과거로 돌아가는 하늘이에게 지구의 식민지화를 가속할 방법에 대한 자료를 동봉하는 것으로.

과거의 그녀들이 그 자료를 받아, 더 빠르게 식민지화를 끝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형태였다.

즉, 맨 처음 공주의 특성은 기억의 회귀가 아니라 아예 과거로 이동하는 것도 가능했다는 소리가 된다.

그래서 공주에게 걸려있는 세뇌는 다른 애들과 달랐던 거다.

애초에 미래에서 따로 세뇌당한 상태로 넘어왔으니.

그 목적과 세뇌의 수준이 다른 것은 당연하겠지.

「음, 이제까지 너한테 받은 선물도 많겠다. 역시 이번에는 자그마한 답례도 줘야겠지.」 「퉤...!」 「후후, 그렇게 화내지 마. 어차피 이 아이가 과거로 돌아가는 순간. 너는 이 자리에 없을 거니까. 그럼 그 침은 다 없던 것이 될 거거든.」 「뭐?」 「너는 과거로 돌아간 이 아이에게 과거에서 살해당하는 거야. 어때, 멋지지?」 「루이코오오오...!」

"아...."

화면 속의 나는 루이코라는 이름의 엘프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완벽하게 결박된 몸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딸아이 같던 하늘이가 고문을 받으며 강제로 특성을 사용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개같은 년들...."

직접 체험하는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저 이 기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솟아 올랐고.

나는 나도 모르게 옆에 있던 의자를 주먹으로 때려 부쉈다.

그 순간 특성을 발동한 하늘이는 빛과 함께 사라졌고.

내 시야도 천천히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기억을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였나 보네.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알고 있는 장소였다.

전에 혜은이랑 같이 엘프들에게서 도망칠 때 지내던 곳 중 하나였으니까.

지난 회차에도 숨을 때는 이곳을 이용한 모양이다.

"공주.... 아니, 하늘아."

"넵 주인님...♡"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혜은이가 아니라 공주가 함께하고 있다는 점.

이 부분만 봐도, 내가 공주를 평범한 노예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했다.

이렇게 사랑을 주니까 자기도 정실이 되고 싶다는 소리를 하지.

"하아...."

다만 나는 그 부분에서, 지난 회차의 나 또한 박하늘이라는 이름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냥 머리로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트리거로 제대로 기억을 느끼고 감정을 일부 계승 받았을 것이다.

방금 있었던 영화관 같은 공간은, 그걸 나에게도 체험하게 하기 위한 것일 테고.

복잡하게 꼬여있는 상황 때문에 슬슬 두통이 밀려온다.

진짜 여러모로 좆같은 세상이네.

이런 세세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좆같은 건 선 넘잖아.

"미안, 오늘은 그냥 자자. 피곤하다."

"넵! 주인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는지, 공주는 꽤 명랑해 보였다.

대부분은 내가 아니라 설아가 도와준 부분이겠지?

설아한테는 이 회차에서도 감사할 일이 많네.

"큭...!?"

그렇게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빠져있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움직인 마력의 흐름과 함께, 심장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몸을 바들바들 떠는 공주가 보였다.

"왜, 왜.... 어째서? 나는 분명...."

"하늘아...."

"주인님, 괜찮으세요!? 아, 안돼. 내가 지금 무슨.... 에...?"

그렇구나.

그래, 그 시발년들이 그렇게 쉽게 나올 리가 없지.

애초에 마스터에 대한 세뇌는 내가 해제할 걸 예상하고, 따로 다른 암시도 깊게 새겨두었던 거다.

침략을 가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레지스탕스의 구심점이었던 나를 확실하게 제거하는 것.

따라서 그녀가 나를 죽이게 하는 명령은 일반적인 세뇌와 다르게 더 심층에 숨겨놓았으리라.

"아, 하으? 아, 아아아악!"

죽은 내 앞에서 절규하는 공주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지고.

그 순간 내 팔에 남아있던 마지막 팔찌가 터져나가며, 천천히 내 시야가 페이드아웃했다.

생각해보면 공주는 여인위에게 잡힌 나에 관한 이야기는 잘 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아예 정보가 끊겨서라고 생각했지, 그 말 자체가 거짓말일 가능성은 생각하지 못했는데.

모든 것을 깨달은 지금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 어떤 사람이, 내가 미래의 당신을 죽였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 아직 서로에 대한 믿음이 완벽하지도 않은 상대에게, 사랑해서 잘 보이고 싶은 상대에게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이 부분은 지금 처음 알게 되는 것임에도, 거짓말을 한 공주에게 어떠한 화도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불쌍하고 애잔하여 껴안아 위로해주고 싶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본인의 손으로 죽였다.

물론 세뇌로 인한, 자신의 의지와 상관이 없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기억은 영원히 자신을 저주하는 고통의 응어리일 테니까.

"응...?"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엄청난 위화감이 느껴져서 기분이 이상했다.

그 어떤 감각도 정상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정보 값으로만 머릿속에 전해지는 느낌이다.

마치 아무 감각이 전해지지 않는 VR기기를 쓰고 움직이는 듯한 묘하게 허전한 느낌이, 단숨에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

"아...?"

그리고 감각이라기 보다는 단순한 정보에 가까운 것들과 시야 정보를 보다 보니.

천천히 내가 움직이고 있는 몸이 왜 이상한지를 깨달을 수 있었고.

확신을 위해서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거울을 확인했다.

"역시."

감각이 비정상이라서 실감하기가 어려웠지만.

이렇게 거울을 보고 신체를 눈으로 직시하니, 이것이 내 몸은커녕 남자의 몸이 아니라는 것은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겨우 그렇게만 표현하기에는 이 몸은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몸이었지만.

'하긴, 이제 나는 죽었으니까 관여를 못 하겠지.'

내가 지금 들어와 있는 몸은 다름 아닌 설아의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설아는 내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사실상 내가 하고 싶었던 행동을 그대로 했을 거고.

그래서 시스템은 내가 설아의 몸을 컨트롤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겠지.

그나저나 여자의 몸이고 뭐고, 유일하게 체감이 되는 것은 마음 결정의 부재였다.

도대체 설아는 어떻게 이런 좆같은 감각으로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내 감정 이외의 것은 전부 무감각해지는 기분 나쁜 감각이다.

그나마 이게 내 몸이 아니라서, 마치 빙의해 조종한다는 감각이라 버틸만한데.

이게 당연한 상태로 10년도 넘는 세월을 살았다는 건, 정말 쉽게 상상하기 힘든 느낌이네.

이러니까 0레벨 도달했을 때 펑펑 울었지.

"아, 지금 신경 써야 하는 건 그 부분이 아닌가...."

음, 그래도 듣는 것은 제대로 들려서 그런지 묘한 느낌이네.

내가 아는 설아의 목소리와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울리는 느낌이야.

이거 적응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움직이는 몸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나를 죽였다는 사실에 상처받았을 공주가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고.

공주가 괜찮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다음으로 할 일이다.

"...하늘아?"

"......."

역시나.

마술 특성을 사용해서, 공주가 있는 곳을 찾아내서 왔는데.

공주는 그 어떤 것과도 대화를 거부한 채, 방에 틀어박혀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나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밥조차 먹지 않고 있었고.

10레벨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벌써 탈수나 아사로 사망했을 만큼, 자살에 가까운 행위를 지속하는 중이었다.

이거 애가 완전히 망가졌네.

"괜찮아?"

"...죄송해요. 설이 언니, 제가.... 제가 주인님을.... 주인님은 저를 구해줬는데, 저는 주인님을.... 아, 으...."

"네 잘못이 아니야."

"제가 없었어야 했어요. 차라리 제가 없었으면 주인님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결국 저는 주인님한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

자기 자신에게 저주의 말을 마구 쏟아내는 공주를 보고 있으니.

나는 참을 수 없어져서, 그녀를 꽉 껴안아 주었다.

"도움이 되지 않으면 어때서."

"......."

"은혁씨는 그런 마음을 가지라고 너를 구한 것도 아니고, 너를 옆에 둔 것도 아니야."

"언니.... 저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해요? 모르겠어요. 다 엉망진창이에요....."

무슨 말을 해줘야 하는 걸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막막한 것은 공주가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이렇게 망가져 버린 공주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내가 원하는 것은 그렇게 복잡한 것이 아니야.

지금 공주 너에게는 너무나 어렵겠지만, 그런데도 내가 바라는 건....

"은혁씨가 원하는 건, 네가 웃는 거야 하늘아."

"웃는...?"

"네가 죄책감을 느끼길 원했던 것이 아니야. 네가 더 평범한 또래 아이처럼 자라고 싶길 원했던 거야."

"설이 언니는.... 대체 왜...."

"그저 즐겁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야."

"저는 언니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했는데...."

"그저, 네가 행복했으면 했어."

"그런데 왜, 저 같은 걸 보면서 그렇게 울어주시는 거예요...."

서로의 말이 맞물리지 않는다.

어느새 감정이 복받친 나는 그녀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공주를 보며 느끼고 있는 슬픔을 쏟아내고 있었다.

모든 감각이 없어지는 바람에 감정에 더 민감한 건지, 치솟아 오르는 미안함과 슬픔이 내 심장을 쑤셔온다.

"미안해, 미안해 하늘아."

"언니가, 대체 뭐가 미안해요...!"

"네가 이런 경험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왜, 왜...!"

"정말, 미안해...."

그것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물론 내가 잘못했다고 보기는 어렵긴 하다.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이미 사라져버린 지난 회차의 내가 저지른 죄의 일면일 뿐이니까.

그런데도 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다짐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무척이나 미안하고 안타까운 것이었고.

조금이라도 이 아이가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만큼은 진심이었다.

"설이 언니...."

어느새 내가 공주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공주가 나를 위로하는 것으로 상황이 역전되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상황 덕분에 공주가 정신이 들었다는 거였다.

...정작 내가 방금 했던 행동이 쪽팔리긴 했지만, 이쁜 설아 얼굴로 울었으니 좀 덜 꼴사나웠겠지 뭐.

"설이 언니는 제가 원망스럽지도 않아요?"

"왜 원망스러워."

"아까도 말했잖아요. 제가 주인님을...."

"은혁씨를 죽인 건 여인위야. 네가 아니고."

"......."

이건 당연한 부분이다.

물론 본인이 직접 찌른 감각과 상황이 생생하니, 공주가 저렇게 패닉에 걸리는 것도 당연하지만.

만약 이것에 패닉이 걸려서 공주가 고통스러워하면, 그거야말로 진짜 적인 여인위가 기뻐할 일일 것이다.

애초에 이런 상황을 연출하고 싶어서, 굳이 그냥 죽이지 않고 공주를 통해 내가 죽도록 설계한 것일 테니까.

"자기 자신을 자책할 시간에, 그년들한테 한 방 먹여줄 생각을 해야지."

"네...? 하지만 저는 그래봐야 잠깐 시간을 되돌리는 정도의 능력 밖에 쓸 줄 몰라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하지만...."

그 능력을 대부분 힐로만 썼으니, 그다지 대단하지 못하다고 느꼈나 보다.

정작 내가 죽어갈 때도 세뇌의 영향으로 특성이 발동되지 않아서 더 그렇겠고.

공주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뿌리 깊게 박힌 건, 정말 여인위의 의도가 제대로 성공했다고밖에 볼 수 없어서 짜증이 날 정도였다.

"이게, 뭐에요?"

"너 주려고 만들고 있던 총이랑 탄이야. 딱 한 발만 쏠 수 있어."

내가 있던 회차에서는 시작부터 공주가 훔치고 만들어서 사용하던 무기지만.

이때의 공주는 이런 활용법 자체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하긴, 누가 이렇게 귀중한 성유물을 1회용으로 쓰려고 했겠어.

일반적으로 S급 헌터의 전용 장비를 만들 때, 중심이 되는 엔진부에나 조금 들어가는 것이 성유물 조각인데.

그걸 조금도 아니고 아낌없이 사용해, 단 1회의 화력을 위해서 개조해놓았으니.

어지간한 S급 헌터도 제대로 맞으면 치명상인 무기가 탄생한 거다.

"그런 일회용 무기지만, 너는 이걸 과거로 돌려서 무한하게 쓸 수 있어. 맞지?"

"언제 이런 걸...."

내가 준비한 건데, 나중에 슬쩍 주라고 설아한테 맡겨놓은 상황이더라고.

그런데 하필이면 이걸 전해주기 직전에 봉변당했던 거고.

참 타이밍도 얄궂어.

"이거 들고, 나랑 같이 여인위에 복수하는 거야."

"복수...."

"은혁씨를 죽인 건, 네가 아니야. 여인위지. 명심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자존감이 바닥이던 이에게 힘을 전해주고.

자기 잘못이라며 자책하던 사람에게, 진짜로 원망해야 할 진범을 전해준다.

그제야 마구 부서져 있던 공주의 마음이 고쳐지기 시작했고, 방금까지 깊게 녹아있던 자책감은 여인위를 향한 복수심으로 변한다.

"그래, 차라리 그렇게 화를 내."

물론 저것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저런 복수심이 자책감보다는 나으니까.

당장은 저런 감정이, 그녀가 일어날 원동력으로써 작동할 필요는 있었다.

"아...."

그 순간이었다.

공주가 여인위에 대한 분노를 가지는 순간, 몸이 강렬하게 빛나더니.

마치 마음 결정이 빠져나오는 것 같은 느낌으로, 금색의 펜던트 하나가 빠져나왔다.

그 펜던트가 잠시 열리자, 그 안에는 꽤 나이 든 모습의 나와 어린 하늘이의 사진이 있었는데.

그 가족사진을 본 그녀에게서 무서운 기세로 마력이 발산되기 시작했고.

곧 그 여파로 주변 건물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하늘아!"

"아, 그렇구나."

"정신 차려!"

"

"설이 언니, 저 알았어요."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가...!"

"제가 가진 10레벨 특성이 뭔지, 드디어 알았어요."

"뭐?"

"그러니까...."

이거라면 아빠를.... 아니, 주인님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네. 원래는 아예 과거로 돌아갈 수 있었을 텐데. 제약이 있는지 그건 어렵네요."

하지만 한 번이라면 기억과 펜던트만큼은 과거로 돌릴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랑 같긴 한데, 이런 식으로 각성하는 거였구나.

여인위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과거로 돌아가는 힘을 잃었던 10레벨 특성에 마지막 불꽃을 붙인 셈이었다.

"그래서 구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구나."

"지,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서 모든 걸...."

"아니, 그러지 마."

"네?"

내가 알기로 공주는 그렇게 급하게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과거로 돌아가기 전에 필요한 정보들을 미리 답사하고, 여인위를 확실히 이길 무기까지 들고 갔지.

따라서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그때 설아가 해줬던 것처럼 나 또한 해주는 것이다.

"무기...."

"일단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한 시점부터 알려줄래? 그래야 돌아간 직후에 네가 어떻게 시설을 탈출해서 여인위 몰래 행동할 수 있을지 설계가 가능하니까."

"음, 아마 이쯤이 한계일 것 같아요."

최대한 돌아갈 수 있는 과거의 날짜를 알려주는데, 역시 내가 아는 이공주 헌터가 등장한 시기와 일치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이공주라는 연고가 그다지 없는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정보를 구할 수 있었기에.

그것과 관련된 위조 서류를 만들 방법에 대해서 알려주는 것부터 진행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헌터로 활동하면서 은혁씨한테 접근하려면, 일정 이상의 무력은 필요할 거야. 지금도 나쁘진 않지만, 워낙 위험한 일을 많이 겪으니까 강할수록 좋겠지?"

"하지만 제 능력은 전투 쪽이 아니잖아요."

"이번에 선물해준 무기. 만드는 방법이랑 재료를 구하는 곳들 알려줄게."

불법적인 일들을 할 때 필요한 브로커나, 돈을 구할 수 있는 정보 등.

과거에서 적응하기 위한 잡다한 정보를 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이런 서포트는 내가 전문이니, 시간만 급하지 않다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설아는 내가 하는 걸 스토킹하면서 자주 봤을 테니.

나름 그럴듯하게 서포트할 수 있었던 거겠지.

아무튼 이런 느낌이면 아무 문제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될 때까지, 공주에게 교육을 해줬다.

"계속 포위를 좁혀오네요."

"너무 신경 쓰지 마. 그래봐야 마스터들은 소수야. 마스터만 아니면 우리 실력으로 충분히 돌파할 수 있고."

여인위가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버틸만한 편이었다.

아직은 마스터들이 최대한 수면 위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태니.

환경만 잘 조성한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수준으로 싸울 수 있거든.

특히 설아를 포함한 7인의 정실은, 그렇게 약한 이들이 아니었다.

이 시점에서는 이미 대부분이 마음 결정을 이용해 10레벨을 달성했을 정도니까.

그럼 특성만 잘 살리면, 같은 S급 헌터에 대응하는 거야 쉽지.

"설이 언니, 정말 고마워요...."

"뭐가."

"저를 믿고, 이렇게까지 열심히 해주시잖아요."

"그게 아니면 은혁씨를 구할 수 없으니까."

"에헤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미 늦었거든요?"

그리고 희망이 생겼기 때문인지, 점점 공주의 표정은 밝아져 갔고.

이전의 활기차 보이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조금 장난스러워진 점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만드네.

"뭐가 늦어."

"주인님을 구하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도, 설이 언니는 저를 구해주려고 했잖아요."

"구해준다니.... 단순히 은혁씨가 생각한 거랑 다르게 흘러간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아무튼요. 제 능력이랑 상관없이, 저를 도와주려고 하신 거잖아요."

"그거야 그런데...."

"에헤헤.... 설이 언니랑 있으면, 마치 주인님이랑 있는 것 같아요."

순간 들킨 줄 알고 뜨끔했지만.

딱히 내가 설아의 몸에 들어와 있어서 저런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설아가 내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라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후, 괜히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음, 그건 그다지 틀린 감각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네?"

"아무것도 아니야. 오늘 아직 밥 안 먹었지? 언니가 해줄게."

"정말요?"

"뭐가 어렵다고. 잠시만 기다려봐."

...그렇다고 공주가 한 음식을 먹을 수는 없으니까.

솔직히 이 시점의 공주가 한 요리는 사람이 먹을 게 안 된단 말이지.

왜 어릴 때부터 요리만 하면 이상한 걸 만드는지 모르겠다.

"아, 펜던트 말인데. 펜던트의 내용물은 바꿀 수 있다고 했었지?"

"네 맞아요. 지금은 사진이 들어있는 거라, 이건 빼도 괜찮아요."

그걸 빼는 공주의 표정은 꽤 아련한 느낌이라, 저걸 빠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 기억처럼, 저 장소에는 인공 특성이 깃든 시계를 넣어야 하므로 자리가 없었다.

...확실히 아빠랑 찍은 유일한 사진이 사라진다는 건 아쉽겠지.

"괜찮아요. 아빠의 사진은 사라지지만. 주인님을 구할 수 있으니까요."

"미안하다. 이런 역할을 하게 만들어서."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애초에 사진 따위보다 주인님이 살아나는 게 더 중요한걸요."

그나저나 나름대로 회차에 따라서 아빠와 주인님을 나누어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체감하는 나이대 자체가 다른 상대니까.

실제로는 같은 인물이더라도, 저런 감각을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하늘아, 너는 그거로 괜찮아?"

"네?"

"주인님이라는, 노예와 주인의 사이로 괜찮겠어?"

"그야 당연하죠. 저를 구해주신 주인님의 은혜를 전부 갚을 때까지는 노예여야 하는데. 갚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아니, 그건 지금 이야기고. 너는 과거로 돌아갈 거잖아."

"아...?"

혹시나 해서 이야기를 꺼내 봤는데,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하고 있었나 보다.

정말 순수하게 내가 살아나고, 내 곁에 있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모양이네.

진짜 어떻게 이렇게 천사 같은 아이가 있을 수 있지?

"네가 맨날 우리보고 정실부인 7명이라고 부르는 건 알고 있거든?"

"앗."

"그럼 과거로 돌아가면, 너도 충분히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제가, 정실이요? 하, 하지만 저는...."

그녀는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에 관해서 이야기하려다가도.

그 모든 것이 과거로 돌아가면 일어나지 않을 사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굉장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미래를 알고 있는 네가, 은혁씨를 제대로 이끌려면. 노예라는 자리보다는 동등한 정실의 자리가 맞을 테니까."

"화, 확실히 그러네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어서 당황했어요."

다만 그렇게 해야 한다는 상황이 결정되고, 천천히 그 상황을 상상하기 시작하자.

그녀의 입꼬리가 점점 올라가기 시작했고.

이제는 실실 웃으면서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몸을 배배 꼬고 난리가 났다.

"아, 미안. 혜은 언니한테 연락이 와서."

혜은이는 실시간으로 '자궁의 맹약'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연구 중이었는데.

지금 거의 마무리 작업 중이라고 들었으니.

이 연락은 완성된 '자궁의 맹약' 특성을 시계의 형태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응, 언니. 지금 바로 와서 주면 좋지."

사실 이쪽 혜은이의 경우 나에게는 꽤 익숙한 느낌이었는데.

내가 혜은이의 비틀림을 해결할 때 경험한, 그 혜은이와 굉장히 닮아 있었다.

다만 나랑 관계가 이어지면서 완전히 변태로 각성해, 지금은 자궁의 맹약 같은 정신 나간 물건을 만들고 있지만.

"고생했어요. 언니."

"그렇게 말하기는 애매해. 사실상 우리가 모두 힘을 합쳐서 만든 거니까."

"그래도 가장 노력한 건 언니잖아요."

솔직히 나는 이 과정을 대충 봤는데도,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0레벨이 아닌 10레벨 수준인데, 그 안에서 인공적인 특성을 만들어내다니.

물론 기다린 것처럼 시스템에 이런 특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곤 해도, 그걸 찾아내고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은 그녀니까.

"혹시 모르니까, 방법에 대해서도 간단히 알려줄게. 방법을 안다고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나한테 말해주면 시간은 단축할 수 있을 거야."

"네? 네...!"

나를 잃은 상황에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공주였고.

다들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면, 최대한 찾아서 해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여인위의 포위망은 좁혀져 와서, 점점 그녀가 떠나야 하는 시기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늘아, 잘 부탁해."

"네, 언니."

"거기로 가면, 나는 너를 알아보지 못할 거야. 은혁씨도 마찬가지고."

"...그렇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너라는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 박하늘이라는 아이는 그만큼 사랑스러운 아이니까."

"설이 언니...."

이건 그 미래를 경험한 나라서 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공주는 정말이지 사랑스러운 아이고.

나는 그런 그녀에게 푹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 열심히 준비했잖아. 다 잘 될 거야."

"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성공했을 때 행복할 우리를 떠올리자."

결국은 우리가 있는 장소를 들켰는지, 여인위 녀석들이 공격해왔지만.

이미 공주는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특성을 발동하기 시작했고.

지금부터 우리는 공주가 무사히 떠날 수 있을 때까지, 몸을 바쳐서라도 지키면 그만인.

엄청나게 유리한 조건을 담보로 들고, 마지막 전투를 시작했다.

"

공주의 펜던트를 기점으로, 마력 흐름이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하고.

마치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는 듯한 진득한 울렁임이 퍼져나간다.

누가 봐도 강력한 무언가를 준비하는 모습에, 여인위의 공격은 공주에게로 집중되었지만....

"설이 언니!?"

"나는 괜찮아! 그러니까 집중해!"

"...네!"

그녀에게로 향하는 공격을, 마술을 써서 전부 나에게로 돌렸다.

사실상 아주 잠깐 시간 벌이를 할 수 있는 자살에 가까운 기술이었지만....

지금은 그걸로 충분하거든.

"...끝났나?"

열심히 공격을 맞고 있다 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상황을 알아차리기 힘들었는데.

감각이 원래대로 느껴지는 것을 보면, 설아의 몸에서 나와 내 몸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 말은 즉....

"끝났구나."

맨 처음 도착했던 우주 느낌의 공간이다.

그때와 달라진 점이라면, 부서진 시계들이 고쳐져서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정도?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이 공간을 이루는 빛의 형태가 안정적으로 느껴지긴 했다.

"이게 방금 내가 나온 시계인가?"

연속으로 해결하다 보니, 명확하게 어떤 것을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방금 나온 이 시계는 내가 마지막으로 고친 부분이겠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가까이했더니, 화면이 나타나서 공주의 모습을 비추었다.

"

「이번에는, 정실로 다시 시작하는 거야!」

과거로 회귀하며, 귀여운 다짐을 하는 공주의 모습이었는데.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모르게 아빠 웃음이 지어졌다.

저 귀여운 애가 지금의 우리 여보입니다.

부럽죠?

"그나저나, 이제 끝난 것 같은데? 뭐 남은 거라도 있나?"

[대상의 비틀림을 해결했습니다!]

[귀환을 시작합니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스템이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완료 메시지를 띄웠다.

이 공간이 일반적일 때랑 달라서 그런지, 평소보다 한 박자씩 늦네.

뭐, 이건 이거대로 여유로워서 좋지만.

"공주야. 다녀왔어."

"...여보?"

"몸은 좀 괜찮아?"

아무래도 몸 일부가 변화하는 것이다 보니, 감당하기 어렵지는 않을까 싶어서 조심스러웠다.

바로 괜찮았던 경우도 있지만, 많이 힘들어한 예도 있었기에.

지금 안색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공주가 조금 걱정스러웠다.

"괜찮아. 이 정도야.... 하윽...?"

"괜찮긴 뭐가 괜찮아. 몸에 힘도 안 들어가면서."

이래서는 바로 아기 만들기 섹스로 돌입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지금 우리가 무언가에 쫓기는 상황도 아니고, 너무 급할 필요가 없지.

일단 공주의 건강이 가장 중요한 법이다.

"에헤헤...."

"아프면서 웃기는."

"아프지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행복하기도 하거든?"

하긴, 아플 때 혼자면 가장 서러운 법이다.

그럴 때 누가 옆에 있어 준다면, 그것도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그것대로 나름 행복한 것일지도 모르지.

"그래도 아픈 건 사실이니까, 무리하지는 마."

"정말로 괜찮아. 그것보다 빨리 여보야랑 아이를...."

"어허, 뭐가 그렇게 급하실까. 몸이 불덩이면서."

정확하게 어떤 것이 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이마가 화들짝 놀랄 정도로 뜨거웠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감기겠지만, 10레벨 헌터가 감기에 걸릴 리가 없지.

"아흐...."

"머리 아파?"

"......."

"정곡이네, 아픈 몸으로 왜 무리하려는 거야."

"혹시, 혹시 이렇게 방심하는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겨서 여보가...."

아, 그 부분 때문이었구나.

방금까지 비틀림을 해결하면서, 그녀도 어느 정도 과거의 기억을 되돌아봤을 것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나를 잃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거겠지.

"괜찮아. 다른 애들이 지켜주고 있잖아. F급 헌터가 지켜주는데도 미덥지 않은 거야?"

"미덥지 않다기보단...."

"무슨 생각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지금은 네 몸도 생각해야지."

별 이유가 없다면 공주의 말대로 빨리 진행해서 나쁠 건 없다.

하지만 지금 공주는 아픈 상태고, 그런 아픈 애를 무리하게 하면서 임신시키는 건.

우리의 하나뿐인 첫 임신 섹스에는 너무 어울리지 않는 기분 나쁜 행위였다.

"역시, 여보는 상냥하네...."

"상냥한 게 아니라 당연한 행동이야. 너랑 같이 행복해지고, 행복한 미래를 그려 나가고 싶은 거지. 아픈 걸 참아가며 힘만 끌어내서 도구로 쓰려는 게 아니야."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공주는 내 말을 받아들이고 편안하게 누웠다.

나름 이마의 열을 날려주려고 특성을 사용 중인데.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 확 상태가 호전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끙...."

"많이 어지러워?"

"주인님.... 저, 토할 것 같아요."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보다.

존댓말은 물론이고 호칭까지 주인님으로 돌아가다니.

나는 공주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쓰다듬어주며, 괜찮을 거라고 계속 말해줬다.

"아...빠? 하윽,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에요. 깨질 것 같아...."

"조금 잘까? 그럼 괜찮아질지도 몰라."

하긴, 이전에 혜은이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내가 비틀림을 해결하는 동안, 꿈 비슷한 느낌으로 상대방도 상황을 체험하게 되는 모양이었으니.

공주의 경우에는 내가 주인님인 상황과 아빠였던 상황을 다시금 겪은 느낌이었을 거다.

그럼 지금의 정실 관계까지 생각하면, 나라는 사람은 여보면서 아빠면서 주인님이니.

머릿속이 혼란스러워도 이상하지 않겠지.

이건 어느 정도 정돈될 때까지 휴식을 취하는 수밖에 없을 거다.

"원래는, 아빠는 기억도 잘 안 났는데. 이상해요. 지금은 자꾸 여보랑 아빠가 겹쳐 보여서...."

"공주야...."

"아빠...."

저 눈이 그려내는 것이, 나면서도 지금의 나는 아니었기에.

나는 뭐라고 대답하기 어려워졌다.

아마도 이번 일로, 공주의 머릿속에서 세뇌 때문에 흐려졌던 1회차의 일이 되살아났겠지.

"보고 싶었어...."

"......."

"이상한 약물을 주사 당하고, 고문을 받으면서 강제로 특성에 대해서 말하고, 사용하고.... 너무 무서웠어."

"미안하다. 하늘아."

"그래도 믿고 있었어. 구해줄 거라고. 아빠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나를 구해줄 거라고."

"응."

요행에 지나지 않지만, 나는 그녀의 주인님이 되는 것으로 그녀를 구해냈다.

그녀에 대해서 알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평소 생각으로 인한 것이었다.

다만, 완벽하게 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죄송해요 주인님. 몰랐어요. 차라리 알았으면 구해지지 말걸. 그냥, 혼자 쓸쓸하게 죽어버렸어야 했는데.... 저 때문에 주인님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너는 아무 잘못도 없어. 오히려 잘 버텨줘서 고마워."

오히려 죽지 않고 버텨준 것이 더 감사할 일이다.

나는 지난 회차의 나와는 어느 정도 다른 인물이지만.

내가 아는 기억과 내 성격을 생각하면, 무조건 이렇게 생각했겠지.

"고마워, 죽지 않고 버텨줘서. 내가 너를 구할 기회를 줘서."

"여보, 거짓말해서 미안해."

"괜찮아, 이해해. 나라도 말하기 힘들었을 거야. 하나도 화 안 났어."

오히려, 그녀를 이렇게 껴안아 주고 싶어질 정도다.

반대로 그런 것 하나 예측하지 못하고 죽어버려서 미안하다고, 내가 사과하고 싶어질 정도다.

그녀가 얼마나 그 사건으로 힘들어했는지, 나는 전부 지켜보았으니까.

"공주야. 너는 내 은인이고, 지구를 구한 영웅이야."

"하으...."

"물론 시작은, 네가 아빠라고 부르는 다른 회차의 나일지도 몰라."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공주의 첫인상은.

나를 누구보다 열심히 지켜주려던 나만의 영웅이었다.

그녀가 한 일은 그런 것이었다.

"고생했어."

"하으...."

"정말, 많이 고생했다. 공주야."

구태여 그녀의 본명 대신, 지금 사용하는 이름을 불렀다.

이제 그 이름과 이전 회차들은 추억으로 남겨두고, 우리는 지금 회차를 살아가야 할 시간이었으니까.

"그거 잠시 줘봐."

나는 공주가 항상 가지고 있는 펜던트를 받아서 열어봤다.

나에게 자궁의 맹약 특성을 알려주기 위한 시계가 들어 있지만, 이미 그것을 배운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마술을 사용해, 펜던트 안쪽에 있는 내용물을 기억에 있는 무언가로 바꿔치기했다.

"...이건?"

"이거, 잃어버리지 않고 싶어 했잖아.

원래 그녀의 몸에서 펜던트가 나올 때는, 1회차 시절의 가족사진이 들어있었다.

가족사진이라고 해봐야, 1회차의 나와 하늘이가 둘이 찍은 사진이지만.

그녀가 모진 고문을 당해가면서 과거로 돌아갈 때, 유일하게 몸 안에 박아 넣어가면서 숨긴 보물이다.

"...고마워요."

"고마워겠지. 이건 3회차 박은혁이 주는 선물이니까."

"응, 여보 고마워."

저렇게 사진을 보면, 나름 그때와 지금이 구별되겠지.

내가 봐도 그냥 형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른 느낌이 들거든.

나이 자체가 꽤 차이가 나니까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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