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언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 가물가물한 기억의 존재일 텐데, 그런데도 나는 순간 루시퍼 언니가 눈앞에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당황했다.
하지만 그 순간적인 생각은, 더는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에 지친 나에게 거부감을 느끼게 했고.
비현실적이라고 느낄 정도로 내가 원하던 상황보다는, 그나마 그럴듯한 쪽으로 가능성을 돌리기 시작했다.
"어, 어라? 유채린 선배님?"
그나마 저번 사건 때문에 이 자리에 있을 법하고, 내가 언니라고 착각할 만한 사람을 생각해냈다.
그건 바로 언니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좋아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팬이 되어버린 유채린 헌터였다.
아니, 이제 나도 헌터니까 선배라고 부르는 것이 맞으리라.
"아, 이름이 어떻게 되셨죠?"
"배, 배정아입니다."
역시 유채린 선배가 맞았던 모양이다.
아마 워낙 언니를 보고 싶어서 환각 비슷한 느낌으로 착각을 했던 거겠지.
...여전히 내 눈에는 언니처럼 느껴지는 걸 보면, 꽤 중증인 것 같다.
"그렇군요. 그런데 어디 아프신가요? 굉장히 떨고 계시는데."
"저, 그.... 서, 선배님의 팬입니다!"
"아하."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이제까지 유채린 선배의 영상을 많이 찾아보면서 팬으로써 활동했지만.
저렇게 언니처럼.... 아니, 저렇게 예쁘게 웃는 것은 처음 봤다.
"팬이라는 건, 절 좋아한다는 뜻인가요?"
"그, 그렇습니다."
"에이, 거짓말."
"네? 아니에요!"
"흠.... 그럼 내가 뭘 시키든 다 할 수 있겠어요?"
"그, 그거야 당연하죠!"
나도 모르게 저 웃음에 홀려서 대답하고 말았다.
...언니가 아닐 텐데도, 마치 언니가 말하는 것 같아서인가?
나는 내 생각보다 언니에게 굉장히 많이 굶주려 있었던 모양이다.
"뭘 시키든 다 할 수 있다는 거, 정말이죠?"
"네!"
"그럼 벗어."
"네?"
하지만 그런 나도, 방금 그 발언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면 어릴 때도 언니가 나보고 알아서 씻으라고 해서, 언니한테 알몸을 보여준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저런 말을 들으니까 당황스러웠고, 순간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입고 있는 옷 전부 벗으라고."
그래, 저건 언니가 아니라 유채린 선배였지.
그리고 유채린 선배는 이번 사건 때문에 우리에게 짜증이 나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유채린 선배가 대중의 이미지와 다르게 한 성격 한다는 건, 골수팬인 나야 알고 있었기에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왜, 못하겠어?"
"그, 그게...."
"야, 뭐라고? 팬? 어디 C급 따위가 건방지게 그딴 소리를 해?"
"흐, 흐읍...."
유채린 선배가 상대라고 생각은 하고 있는데, 그런데도 언니로 느껴지고 만다.
나에게 항상 상냥하던 언니가, 저렇게 강압적으로 나온다고 생각하니까 솔직히 무서웠다.
물론 언니가 나에게 벌을 주기 위해서라도 나타나 주길 원했지만, 아무리 원하던 것이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10초 줄게. 벗어. 안 그럼 내일 C급 헌터 하나가 실종되었다고 기사 뜨겠지."
"그, 그런...."
"5초 남았다."
나는 그런 그녀의 짜증이 담긴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고.
이런 야외에서 옷을 벗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느껴지는 수치심과 언니로 느껴지는 존재에게 경멸받는 감각이 온몸을 저릿저릿 관통했다.
처음에는 고통이라고 생각했는데, 옷을 다 벗을 때쯤에는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리고 그녀의 계속되는 재촉과 함께, 입고 있던 옷을 정돈했다.
가슴이나 사타구니를 어떻게든 가리려고 했지만, 옷을 접는 이상 대놓고 가슴을 가리는 것은 힘들었고.
결국은 제대로 알몸을 드러내면서 정리를 끝냈고, 그 뒤에는 순간적으로 솟구치는 수치심에 몸이 덜덜 떨렸다.
"엎드려."
"네?"
"절하듯이 엎드리라고, 어디서 눈을 크게 뜨고 있어."
"우으...."
"아하하, 진짜 마음에 든다. 그래, 버러지는 이러고 있어야지."
엄청난 매도 발언을 들으면서 그녀에게 밟히기 시작하는데.
순간적으로 이 상황이 내 나쁜 행동들로 인한 벌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제까지 느끼던 수치심과 고통이 묘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언니가 나를 혼내주러 왔다는 충족감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흡, 흐읍...."
"왜, 나를 좋아한다며? 이 정도는 포상 아니야?"
"아, 아아...."
언니, 언니를 좋아해요.
옆에 있어 주세요. 잔뜩 혼내주세요. 벌해주세요. 마구 괴롭혀주세요...!
아아, 정말로 사랑해요♡
"정아야...!"
내뱉고 싶었지만, 이동으로 인해서 틀어막혔던 목소리가 뒤늦게 터져 나온다.
하필이면 비틀림의 해결 판정이 좆같은 타이밍에 되는 바람에,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 했다.
이미 늦어버린 한탄은, 후회만을 남기고 허공에서 흩어져버린다.
"이런...."
최대한 정아에게 좋은 기억을 심어주고 싶었는데, 이래서는 마무리가 굉장히 기분 나빴을 터다.
정아가 똑똑한 아이고, 멘탈도 튼튼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친해진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지는 건, 아이가 버티기엔 굉장히 충격적인 일이다.
그래서 고아원에서도 봉사자가 아이들과 일정 이상으로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고는 한다.
계속 오겠다고 했던 봉사자가 오지 않는 것으로, 아이들이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높은 확률로 이번에 정아도 나 때문에 상처를 입었으리라.
"미안해, 정아야."
"...언니?"
"정말 미안해...."
"언니다. 언니...."
아마 진작에 정아는 내가 루시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거다.
그래서 내가 루시퍼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도와줬겠지.
그래, 그것까지는 이전에도 예상했지만....
'이런 결말이었을 줄은 몰랐지.'
정아는 내가 루시퍼라는 걸 알게 된 이후에도, 원망의 한마디 내뱉지 않았다.
그래서 나름 내가 생각했던 정도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되리라 생각했는데.
오랫동안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헤어진 거였다니.
"...매니저님, 그렇게 우시면 엄청 바보 같아요."
"정아야, 우리 정아...."
"누가 보면 매니저님이 제 엄마인 줄 알겠어요."
"몰라. 비슷한 거잖아. 받아들여."
"와, 당당하게 근친 선언."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나쁜 놈 같잖아.
키잡도 아니고 그걸 넘어서 방치잡은 너무 쓰레기 같은데.
솔직히 정아는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저렇게 미소를 지어주고 있지만.
그녀가 홀로 남아 겪었을 마음의 고통은, 내가 감히 상상하지 못하는 영역에 있으리라.
그렇게 착하던 정아가 비뚤어지고 나쁜 짓을 한 이유가, 어쩌면 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애를 그렇게 몰아붙이며 강간하고 괴롭혔으니.
과거의 내가 이렇게까지 짜증 나긴 처음이었다.
물론 그 사건 덕분에 정아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그 행동 자체는 부정하지 않지만....
그래도 미안할 수밖에 없잖아.
"매니저님, 슬픈 표정 짓지 말아 주세요."
"정아야...."
"지금은, 제가 매니저님의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몸이 된.... 축복해 마지않을 자리잖아요?"
"그건 그렇네. 내가 눈치가 없었어."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 자리에서 정아가 불쌍하다면서 눈물을 흘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나 많이 늦어버렸다면, 이미 그건 끝이 나버린 셈이다.
지금부터라도 정아가 행복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리라.
"매니저님, 기억나요? 매니저님이 저를 잔뜩 벌해주기 전에.... 제가 설아한테 매니저님 험담을 했어요."
"알아. 듣고 있었으니까...."
"왜 그랬었던 줄 알아요?"
"......."
"언니랑 너무 닮았더라고요. 외모도 그렇지만, 하는 행동이 너무 비슷했어요. 그렇게 자꾸 언니랑 겹쳐 보이니까, 나를 보러 오지 않는 언니 때문에 화가 났던 거예요."
그때는 그냥 짜증 나는 대사로만 들렸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구나.
물론 과거의 나로서는 억울하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 당시 정아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매니저님이 절 강간할 때 채린 선배라고 오해했던 것도. 언니가 채린 선배랑 꽤 닮아서 그랬어요. 매니저님, 솔직히 채린 선배랑 엄청나게 닮은 거 알아요?"
"...몰라."
"괜히 타천사라는 별명이 붙은 게 아니라니까요? 뭐, 성격은 딴판이지만요."
생각해보면, 예전에 정아를 강간한 것이 유채린이 아니라 박은혁이라는 사실을 밝힐 때.
정아는 거의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 모습을 보였다.
생긴 것만 닮고 성격이 딴판인 채린이보단, 생긴 건 물론이고 성격까지 닮은 내가 더 루시퍼에 가깝게 느껴졌을 테니까.
'...실제로 동일 인물이기도 하고.'
그 사건을 계기로 정아는 돌아오지 않는 루시퍼 대신 나에게 의지했고.
그 이후로는 내 옆을 착실히 지켜주는 동료이자, 서로 사랑을 나누는 이가 되어주었다.
"매니저님.... 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응."
"언니, 언니.... 루시퍼 언니...."
"그래, 정아야. 나야."
내가 천천히 정아를 껴안아 주자.
울컥한 그녀가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저, 엄청나게 착하게 살았어요. 언니가 그랬잖아요? 착하게 살아서 언니를 만난 거라고."
"정아야...."
"그래서 착한 정아로 있으면, 언니를 다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항상 웃으면서 모두를 도와주는, 바보 같은 애라는 오명까지 써가며.
그녀는 내가 말했던 착한 아이의 삶을 지켰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내가 돌아오는 일은 없었겠지.
"지쳤어요. 다들 저를 써먹기 좋은 도구 취급하는 것도, 적반하장으로 내 잘못이라고 하는 것도, 언니가 오지 않는 것도.... 전부 지쳤어요."
"......."
"그러다가, 결국 눈치를 채고 말았어요. 언니는 나쁜 사람을 혼내주는 무서운 타천사, 루시퍼라는 사실을요."
"너, 설마...!"
"제가 나쁜 아이가 되면, 저를 혼내주러 언니가 올 것 같았어요."
시발....
결국 전부 나 때문에 애가 망가진 거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