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페미헌터-253화 (254/289)

<253화>

"그래, 정아야. 어디 다친 부분은 없지? 일단 둘러볼 곳은 다 둘러본 것 같은데."

"...없어요. 힉?!"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 없어."

"죄송합니다."

눈앞의 이 아이를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매니저여도, 요즘 같은 세상에 얘 이력을 전부 알 수 없게 되어있으니.

정아가 현재 시점에서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조차 몰랐었고.

생각해보면 엘프들 때문에 그 사달이 났을 때도, 정아만큼은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꺼리는 모양새였던 것 같다.

사실 그것이야 어느 정도 그럴 수 있는 부분이라고 본다.

당장 나부터 부모님이 계시질 않잖아?

다만 문제는 정아가 송도의 비극의 생존자라는 건데, 공식적으로 송도의 비극의 생존자 수가 0명이라는 점이다.

'정부가 일부러 생존자가 있다는 걸 숨겼다?'

그럴 이유가 없다.

정부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전원 사망이라는 결과를 뒤집고 싶었을 테니, 생존자가 있다는 걸 누구보다 바랬을 것이다.

굳이 최악의 평가를 받는 선택을 했을 리도 없고.

그리고 애초에 숨긴다고 해도,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평범하게 이곳의 봉쇄가 풀리는 순간, 수많은 헌터들이 들어와서 생존자부터 찾았을 텐데.

그 사이에서 들키지 않고 누군가를 빼돌린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아무리 헌터들이 정부 소속이라지만 죄다 한통속일 리도 없고.

'즉....'

정아가 생존자에서 누락된 것은 정부나 헌터보다는 다른 손길이 닿았기 때문이라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정부를 속일 방법은, 애초에 이곳의 생존자를 조사하기 이전에 빼돌리는 건데.

지금까지 상황으로 볼때 그 범인으로 추정되는 건....

"어, 언니?"

"가만히 있어 봐. 치료해줄게."

...말이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나 말고는 없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정아가 혼자 살아남았다는 것이 밝혀지면, 이 조그마한 아이가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될 거고.

그건 이런 자그마한 아이가 쉽게 감당할만한 물건이 아니다.

정부에서 돈 같은 건 엄청나게 밀어주겠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의 인생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

그게 차라리 아예 모르는 아이면 모르겠는데, 하필이면 정아라면?

"와아...? 치료도 할 줄 아세요?"

"내가 좀 만능이라서. 그러니까 어디 안 좋은 곳 있으면 바로 말해."

그래, 이렇게 착한 아이가 그렇게 더럽고 치사한 인간들이랑 엮여가면서 자랄 필요는 없지.

방법은 조금 더 고민해봐야겠지만, 확실히 생존자임을 숨기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아마 이걸 정상적으로 흘러가게 해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정아처럼 생존자가 아닌 상태로 자라게 하는 것이 클리어 조건일 테니까.

'슬슬 시간의 비틀림이라는 게 뭔지 알 것 같아.'

내가 개입을 하지 않으면 본래의 미래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들이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어떤 시스템으로 굴러가는지 이해는 전혀 가지 않지만.

하여튼 어떻게 해야 해결이 되는지 정도는 알아차린 셈이다.

"그래도 다행이네. 전기는 나갔지만, 최소한 식량은 충분한 것 같으니까."

나야 헌터니까 굳이 음식물을 섭취하지 않아도, 마력만 있다면 충분히 생존할 수 있지만.

정아는 지금 각성하기 전이기 때문에 제대로 식량이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다만 이 도시는 얼마 전까지 정상적으로 동작하던 곳이기에, 이곳의 봉인이 풀리기 전까지 상하지 않을 음식이야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 왜 언니 말고 다른 헌터는 안 왔어요?"

슬슬 상황이 안정되자, 나에 대한 거리감이 줄어들었는지.

이제껏 궁금했던 질문을 하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나에 대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구조가 늦어지고 있는 것 자체가 의문이겠지.

그녀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면, 이렇게 헌터가 늦게 오는 것이 말이 안 될 테니까.

"나도 출동해서 온 건 아니야. 어쩌다 이 내부에서 잠들어 있다가, 일어나보니까 상황이 이 꼬락서니인 거지."

"...아, 그런 거예요?"

"아까 투명한 유리 벽 같은 거 기억나니?"

"기억나요."

"그렇게 송도 전체가 둘러싸여 있어, 이쪽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저쪽에서 들어오지도 못한다는 소리야."

나중엔 이런 현상을 던전 브레이크로 인한 지역의 던전화라고 불렀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그 지역 일부가 침식되는 던전 침식이랑은 조금 다른 개념이기에.

따로 명칭을 붙였다고 들었다.

"그래서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았군요...."

"미안하다. 나도 잠들어 있어서 너무 늦었지?"

"아, 아니에요! 언니가 없었으면 저는 진작...."

이게 정아라고 생각하니까 엄청 괴리감 느껴지네.

물론 어린 시절과 다 큰 모습이 얼마나 닮아야 하겠냐만, 이렇게 착하고 소심해 보이는 아이가.

나중에 커서 그렇게 양아치 짓을 하고, 그걸 고치고 나서도 장난꾸러기가 된다니....

하여튼 자신의 부모님이 사망한 것이 확실해진 상황인데, 울지도 않고 이렇게 잘 적응하는 것이 신기했다.

끝까지 부모님이 이 아이를 지키려 했던 걸 보면, 서로 관계도 좋았을 테니.

엄청나게 쇼크가 클 텐데.

"많이 무서웠지?"

"......."

"이제 괜찮아. 일단 이곳에 나오는 몬스터들 수준도 그리 높진 않으니까,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는 별로 없을 거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그녀가 정신적으로 안정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뭐, 주변에 몬스터 쓸어버리고 안전하게 만들어두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고.

이번 일을 최대한 순화해서 기억하게 해서, 트라우마가 남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

당장 채린이만 해도, 자신의 어머니인 유채화 헌터의 사망을 트라우마로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강한 줄 알았던 채린이가 그 정도였으니.

정아는 이 사건을 없는 것으로는 못해도 최대한 약하게 맞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자, 이제 걱정은 그만하고 밥이나 먹자."

"고, 고기예요?"

"정확히는 숙성 중이던 것 중에서 멀쩡한 걸 모아둔 거야."

조금 더 시간이 지났으면 아예 먹지 못할 정도의 녀석이었지만.

겉 부분을 거의 다 버리면, 내부에 살아남은 일부분을 조금씩 모으면 우리가 먹을 정도는 충분히 모을 수 있었다.

최대한 많이 익혀서 먹으면 문제가 없겠지.

"우와...."

"왜 그래?"

"아니요.... 헌터가 능력으로 요리를 하는 건 처음 봐서요."

"내가 좀 특성 스펙트럼이 넓어서,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거든."

다행히 맛은 문제가 없었고, 정아도 배가 고팠기 때문인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잔뜩 고기 위주로 먹이고 싶지만, 워낙 지쳐 있을 테니까 밥도 먹여야겠는데.

당장 탄수화물이 딸리면 에너지가 부족할 거다.

"아, 넵...!"

"응, 잘 먹어주니까 내가 다 기쁘네."

처음에는 내 눈치를 보면서 먹었는데, 내가 계속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더니 드디어 마음을 놓고 먹는 것에 집중했다.

이렇게 조금씩 다가가면서 거리감을 없애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래도 나와 있는 것 자체를 긴장으로 느낄 것이고, 그것 자체가 그다지 좋은 영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아, 아아...."

"

"어? 아, 괜찮은데.... 고마워. 잘 먹을게."

평소에 그런 생활을 해왔기 때문인지, 긴장이 풀리니까 꽤나 친근한 행동을 해오기 시작했다.

나한테 밥을 먹여준다는 것 자체가, 아마 가족에게 하던 것을 똑같이 한 것일 테니.

긴장이 풀린 것 같아서 내가 다 안심이 되었다.

"...언니는 신기해요."

"뭐가?"

"원래 헌터라고 하면,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이잖아요. 영웅 같은...."

"그렇지?"

"하지만 언니는 뭔가, 그냥 동네 언니처럼 느껴져요...."

"뭐, 그건 사실이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평범한 사람이기도 하잖아?"

확실히 이런 식으로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처음이네.

내가 고아원 아이들과 친해질 때는, 나는 헌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말로 동네 오빠 같은 존재였으니까.

물론 헌터 매니저라는 특별한 직업이긴 하지만, 헌터와는 좀 다른 수준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헌터치고는 가슴이 작아서 그런가?"

"뭐, 그래서 못 미더워?"

정아는 고개를 마구 고개를 저으며 배시시 웃었다.

확실히 이때부터 웃는 표정은 굉장히 귀엽네, 처음으로 정아의 느낌을 받았다.

확실히 얘가 내가 아는 정아가 맞긴 한가 봐.

"맞다.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어? 이, 이름?"

생각해보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괜히 본명 같은 정보가 들어가면, 여러모로 꼬이는 부분이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굉장히 고민하다가, 지금 내 옷차림을 보면서 생각난 이름을 말했다.

"...루시퍼."

"네?"

"본명은 비밀이고, 헌터들은 별명 같은 게 있잖아? 그런 거라고 보면 될 거야."

"아.... 혹시 뒤에 날개가 검은색이라 그런 이름이에요?"

"루시퍼가 뭔지 알아?"

"나쁜 천사 아니에요? 이런 거 좋아하는 친구가 있어서 들어본 것 같아요."

하긴 저쪽에서야 아무도 모르는 이름이라 아이돌 이름으로 사용한 거지, 이쪽에서 루시퍼는 유명한 이름이니까.

...어찌 되었든 대충 얼버무리는 것에는 성공한 느낌이다.

"히히...."

"왜 그래?"

"안 어울려서요."

"안 어울린다고?"

"루시퍼는 나쁜 천사잖아요. 하지만 루시퍼 언니는 엄청 착한데...."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근데 나도 그다지 착하진 않은데?"

"에이, 거짓말."

"착하게 사는 사람한테만 착하거든. 나쁜 사람들한테는 벌을 내려주는 나쁜 사람으로 보일걸?"

이 정도면 최대한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준 거겠지?

물론 실제로 나는 착한 사람에겐 착하게 대하고, 나쁜 사람에겐 나쁘게 대하니까 틀린 말이 아니기도 했다.

"그런 거예요?"

"응, 정아는 착한 아이라서 언니가 착하게 보이는 거 아닐까?"

"정아 착한 아이예요?"

"응, 앞으로도 그렇게 착한 아이였으면 좋겠네."

"에헤헤...."

나는 배시시 웃고 있는 정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역시 이 아이의 이런 밝은 면모를 지켜줘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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