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반특성의 힘이라....'
아스카는 원래라면 태어날 수 없는 '엘프'와 '묘족'의 혼혈로.
본래 각성을 통해 얻어야 하는 힘과는 다른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게 바로 '반특성'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특성으로 이루어진 모든 것을 없애버리는 힘이다.
예를 들어 특성을 이용한 공격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사라지고.
특성을 활용한 간접적인 공격을 한다면, 그 간접적으로 이루어진 모든 공격의 물리력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 위험하지 않게 되어버린다고 한다.
예를 들어 특성으로 높은 곳에 철근을 소환해 머리 위로 떨어트린다면, 그 위치 에너지 자체가 취소되어 그냥 철근을 머리 위에 올려놓은 것으로 사건이 '개찬'되어버리고.
몸에 버프를 걸어 놨다면,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버프를 해제하거나.
걸려있는 디버프로 인해 치료되지 않을 때, 그녀가 만지는 것만으로도 치료할 수 있도록 디버프를 해제하는 것이 가능한 능력이란다.
'무시무시한 능력이긴 해.'
괜히 엘프들이 죽여버리는 대신 자신들이 연구해서 힘으로 삼겠다는 만용을 부린 것이 아니리라.
상대의 레벨이나 마력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말 그대로 개념에 가까운 능력인 셈인데.
이건 당장 가장 큰 엘프들의 약점을 극복할 열쇠가 될 수도 있으니까.
엘프들은 당장 지구의 침략을 그렇게 준비하고도 실패한 원인이, 결국은 0레벨 헌터를 이겨내지 못하는 엘프라는 종족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쪽 묘족들의 세상도, 배신자만 없었다면 비슷한 결말을 맞이했을 터다.
그런데 만약 반특성의 힘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되면, 그런 소수의 힘을 차단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거지.
다만 반대로 그 힘 때문에 자신들이 이쪽 세상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성을 감수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당장 아스카가 잡혀가기 직전까지, 아스카의 힘을 세계 전체에 뿌리는 계획을 세웠으니까.
그럼 정말로 혜미가 지구를 지켰던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엘프들을 쫓아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일단 내가 도와야 하는 건 거기까지.'
그렇게 해서 이쪽 식민차원이 자유를 찾게 된다면, 엘프들의 침략이 지구에 곧바로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해지고.
우리는 일단 이번 작전의 기본적인 목표를 달성해 되돌아갈 수도 있게 된다.
뭐, 그 후에 이쪽이랑 외교적 관계를 구축해서 장기적으로 엘프를 막는 시스템을 완성해야겠지만.
지금 거기까지 고민해둘 필요는 없으니까.
"좋아. 장기적인 계획도 일단은 알겠고."
일단 저 부분은 우리의 무력을 키우면서, 아스카에 대한 정보를 구하는 방향으로 생각해두면 되고.
가장 중요한 건, 그 정보와 무력을 키우는 것에 필요한 부분인데.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는 지금 엘프 쪽 주요 인물의 확보와 마음 결정의 여분 확보가 중요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는 그 문제 해결에 가장 잘 맞는 대상을 찾은 상태였다.
바로 미코라는 이름의 배신자를 처단하는 것.
10레벨 각성자인 만큼 마음 결정도 확보가 가능하고, 엘프 쪽에 붙은 묘족 각성자 중에는 가장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자였다.
"그래서 말인데요. 매니저님, 이런 컨셉은 어때요?"
"야, 이건 너무 발랄한데. 아무리 내가 여장을 해도 이건 좀...."
그나저나 정아가 원래 이렇게 아이돌 문화에 빠삭한 녀석이었나?
이외로 괜찮은 도안을 쭉쭉 뽑아오는 걸 보고 있으니, 신기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아이돌 영상을 보는 것조차 보인 적 없는 애였는데?
"네? 아.... 예전에 조금요. 그래도 매니저님한테 마구 당한 이후로는 끊긴 했었네요."
"...그래?"
예전에는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취향이 아이돌에서 마조 변태로 바뀌었다는 것 같은데.
그게 나 때문이라고 하니까 조금 죄책감이 느껴지네.
"아, 그런 표정은 짓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는 지금이 더 행복하니까요. 포상으로 배빵이나 때려주시면 더 좋겠...."
"몰라, 아무튼 내가 미안하다. 항상 고맙고."
"아, 진짜.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하지 말라면 더 해야지."
"하읏...♡"
뭔 말을 못 하게 하네.
하여튼 의외로 정아가 가져오고 있는 도안들은 괜찮다고 느껴졌다.
그냥 내가 워낙 여장이 하기 싫어서 여러모로 까다롭게 구는 것뿐이지.
"방금 그건 옷 자체는 남성에 더 가까운데, 오히려 전체적인 분위기 때문에 여자애 느낌이 팍 나서 싫더라."
"차라리 옷은 치마여도 괜찮다는 거죠?"
"...치마를 꼭 입어야 해?"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서요."
그렇게 말한 그녀가 그려온 건, 치마긴 하지만 그냥 옷이 마구 찢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아이돌이라기보다는 당장이라도 괴롭힘을 당한 듯한 옷차림인데.
그 옷차림을 꾸며주는 액세서리나 주변 분위기 등이 굉장히 신선했다.
"뭐야. 되게 강한 느낌이네."
"예쁘죠? 무슨 천사 같지 않아요?"
"어."
그냥 천사보다는 날개를 꺾이고 추락한 천사에 가깝긴 하지만.
담겨있는 분위기의 강인함이, 어떤 것에도 꺾이지 않겠다는 듯한 의지가 느껴진다.
말이 치마지, 아까 입고 있던 바지보다도 훨씬 힘이 있어 보이는데....
"맘에 드세요."
"은근히?"
"...신기한 일이네요."
"응? 뭐가?"
"아니에요. 그냥, 원래 이 옷의 주인이 떠올라서요."
"주인? 원래 어떤 아이돌이 입던 옷이야?"
"그렇다고 할 수 있겠네요."
흐음, 하긴 이렇게 퀄리티 높은 컨셉이랑 복장을 뚝딱 만들어내기도 어렵겠지.
아무래도 이전에 본 것을 그대로 그려낸 것일 가능성이 컸다.
하여튼 그나마 이제까지 본 것 중에는 이게 제일 괜찮아 보였다.
"제가 대충 생각나는 건 이 정도네요."
"역시, 결국은 아까 봤던 그게 가장 괜찮네. 옷 찢어진 느낌의 컨셉."
"그럼 이거로 만들어 달라고 할게요. 세부 검수는 제가 해도 괜찮죠?"
"응, 네가 제일 잘 알 테니까."
그리고 그다음은 이쪽 계획을 진행하던 여명의 호랑이단에게 컨셉에 맞는 곡을 받는 거였다.
이 부분에서도 정아가 거의 모든 작업에 참여하며, 엄청나게 퀄리티를 높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쯤 되면 내가 아니라 쟤가 매니저인 게 아닐까 싶을 정도.
"달링, 수고했어."
"어, 고마워. 정아는?"
"달링 연습 영상 보면서 엄청나게 집중하고 있던데?"
"또 개선사항 나오겠네. 각오해야겠다."
솔직히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아이돌 경쟁이, 말처럼 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나 혼자 각성자라는 점에서, 신체적으로 부족함을 느끼기 어렵고.
기본적으로 일반인 노래에 까다롭게 구는 한국에서 매니저로 살았으니, 전체적으로 밀릴 것 같지도 않았다.
심지어 '기존 문화 죽이기' 때문에 오로지 미코의 노래만 남은 이 세상이라, 신곡을 만들어야 한다는 상황 자체가 굉장히 어려운데.
그걸 우리는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다른 세상이지만 자유롭게 문화 활동을 즐기며 얻은 감각과 그나마 제약 적게 과거의 문화를 알고 있는 레지스탕스가 힘을 합쳤으니까.
그렇게 내가 우승할 확률이 높은 상황이라고 확신은 하고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나도 처음 배우는 노래와 안무를 완벽하게 하려면, 그에 걸맞은 연습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최소한 우리 눈에는 완벽하다고 느낄 정도가 되어야, 이쪽 세상에서도 먹힐만한 노래가 될 테니까.
"아, 혹시 이쪽 안무에서 표정을 조절해주실 수 있어요?"
"표정?"
"네, 솔직히 이제 안무는 되게 좋은데. 목소리에 담기는 감정이 부족한 느낌이라서요."
"어...."
사실 가장 애를 먹은 건, 정아가 내가 전혀 알아먹기 힘든 설명을 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노래는 그냥 기술로 목에서 연주하는 건데, 거기 무슨 감정을 담으라는 건지.
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 그거. 달링이 확실히 노래가 좀 무뚝뚝하긴 하더라."
"너까지 그렇게 말하기냐.... 그럼 그걸 어떻게 바꾸면 되는 건지나 말해 주던가."
"모르지 그건. 나도 노래 겁나 못 부르는데."
"도움이 안 되네."
하여튼 이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수준이긴 했지만.
그 묘한 기준 때문에 정아에게는 통과를 받지 못했다.
정아가 실망하는 눈초리긴 했는데, 어쩌겠어 내가 이해 자체를 못 하는 부분인데.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대로 가시죠."
"네?"
그런데 놀랍게도 현재 내 무대를 본 여명의 호랑이단 사람들은, 지금 이대로가 더 좋을 거라는 말을 했고.
이제까지 있었던 대회의 영상을 다시 보여주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걸 보고 있던 정아가, 뭔가 깨달은 듯이 손뼉을 짝 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감정이 강하게 호소 되지 않네요. 그나마 강하게 호소 될 때는 그 감정선이 미코의 노래들과 비슷해요."
"음?"
솔직히 노래에 감정이 담기는 걸 이해하지 못한 나도, 대충은 상황을 알 것 같았다.
예선전에서 애초에 감정이 강하게 담기는 참가자는 탈락시킨다는 건데.
그건 당연하게도, 미코가 몸을 빼앗은 이후에 들키지 않는 데 필요한 조건이었다.
괜히 따라 하기 힘든 감정선이 그려지면,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물론 본선에 들어간 다음에는 오로지 실력 싸움이지만.... 그런 조건이라면 충분히 우승할 수 있을 거예요."
"그건 다행이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어쩌나 싶었는데, 악재가 오히려 기회로 다가온 셈이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정아 본인은 완벽하지 않은 무대를 보여준다는 것이 조금 불만인 표정이었지만.
결국 우리는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코를 암살하기 위해서 판을 짜는 거였으니까.
"저, 매니저님."
"응?"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뭔데, 이번 작전은 완전히 정아 덕에 성공하는 거니까 가능한 거라면 뭐든 해줄게."
"...이번에 미코를 잡아서 얻는 걸로, 저부터 임신시켜주시면 안 돼요?"
그렇게 대회가 시작되기 직전, 정아가 굉장히 뜬금없는 타이밍에 임신을 요구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