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최대한 빨리 돌아와. 오랫동안 최고로 쳐주는 영웅이 자리를 비우면, 다들 불안해할 거라는 건 알고 있지?"
"...그래서 굳이 발표도 없이 몰래 다녀오는 거잖아. 잘 알고 있어."
"우리 애들 아빠 없는 애들 만들고 싶지 않으면, 꼭 돌아오는 것도 잊지 말고."
"알고 있어."
오늘따라 혜은이가 진지한 톤으로만 이야기하네.
그래서인지 더 지금 상황이 실감이 나고, 미안한 감정도 크게 느껴졌다.
오히려 저러니까 마음이 약해지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
"다들 준비는 된 것 맞지?"
"응."
"네, 완벽해요."
아무래도 그쪽에서 10레벨과 0레벨로 레벨을 올릴 예정이다 보니, 다들 미리 만들어진 전용 장비를 입고 있었다.
9레벨이 전용 장비를 받는 것은 일반적으로 없는 일이지만, 저쪽으로 이동하면 이쪽에 부탁해서 장비를 수급할 수는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아마 나중에 돌아와서 레벨업 한 능력에 맞게 수정을 해야겠지.
'...하긴, 그건 10레벨에서 0레벨이 된 경우에도 마찬가지니까.'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F급 헌터라는 최고 등급이 새로 발견된 이후로는 자연스레 발전 중인 인프라였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이런 단기간에 다수의 전용 장비를 뽑아내는데 주력해준 제작자들이 고마웠다.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도 워낙 특이한 얘들 취향까지 맞춰서 디자인해야 했으니까.
"...여러모로 너희 옷 디자인을 보면 할 말이 많지만. 그냥 넘어갈게. 그것까지 신경 쓸 시간은 없으니까."
어차피 그 위에 겉옷을 입긴 할 거니까, 좀 정신 나간 속옷이라 생각하면 넘어갈 만하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최대한 챙기겠다고 준비한 소모품들인데....
내가 권한이 생기면서, 시중에 유통이 금지된 것들까지 깡그리 모으니까 무시무시한 것이 꽤 많았다.
"솔직히 평소에 혜은이가 챙기는 약들도 엄청나다 생각했는데, 더한 것들이 많았지...."
"뭐, 그거야 당연하잖아. 아무래도 혜은이는 본인이든 뭐든 사람한테 쓸만한 것만 챙긴 거고. 지금 그것들은...."
"응."
사실상 실패 부산물인, 어떤 안전성도 검증되지 않았고 부작용이 엄청날 것으로 예상되는 약물들이었다.
주적인 엘프들에게 사용한다는 전제를 깔고 가져온 거니까 가능한 거긴 해.
...물론 이 약물이 제대로 통할지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준비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챙긴 것이었다.
"다들 귀는 제대로 동작해?"
"당연히 확인 했지."
"좋아. 음, 근데 유림이 너 하의는 좀 바꾸자. 그거 솔직히 좀 티나."
"그래?"
"너무 달라붙어."
아무래도 엘프로 변장을 해야 하다 보니, 이 부분에 있어서는 조심을 해야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게, 저쪽 세상은 엘프가 다 지배하는 수준의 상황이다.
그런 곳에서는 엘프로 움직이는 것이 훨씬 제약이 덜할 테니, 어쩔 수 없지.
"그런 연유로, 짠!"
"...혜은아, 이건 누구 옷이니?"
"당연히 은혁이 네 옷이지."
"꺼져, 미친년아."
어디서 많이 본 옷을 내밀길래, 혜은이를 한 대 때리려다 참았다.
분명히 내가 여자라고 오인될 때, 혜은이가 타천사의 여자 버전으로 밀던 옷차림이었다.
나는 그냥 고양이 귀랑 꼬리 정도만 달아서, 같이 가는 애들 노예 신분인 것처럼 위장할 생각이었는데.
이걸 굳이 엘프로 여장하라면서 저딴 걸 준비하는 이유가 뭐야.
"아, 왜."
"내가 왜 여장을 해.... 아니, 필요에 따라서 여장을 한다 해도! 그런 노출 심한 치녀 복장은 절대로 안 해."
"...역시 안 통하네. 이런 시기면 받아줄 줄 알았는데."
"안 통할 줄 알았으면 준비를 하지 마."
결국 여장을 해야 한다는 의견은 무시하기 힘들었기에, 어느 정도 타협점을 찾는 걸로 했다.
전체적으로 중성적인 스타일에, 엘프 귀는 보이면서 얼굴은 선글라스랑 마스크 등으로 가리는 코디인데.
그래도 이건 여장이라기보단,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기 힘든 정도에 가까워서 할만해 보였다.
"괜찮아?"
"응, 어느 정도 체형을 착각해서 보이게 옷에 걸어둬서.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하긴 힘들어."
하지만 엘프 귀와 하반신에 자지가 툭 튀어나온 점 때문에, 어지간한 이들은 빈유의 엘프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겠지.
사실, 그냥 남자처럼 해도 자지랑 귀만 있으면 그렇게 착각할 것 같긴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의 최소한의 조심은 필요한 일이라, 여기까진 받아줄 수 있었다.
"...뭔가 긴장이 풀리네. 고마워."
"응? 뭐가?"
잘 생각해보면, 저렇게 까일 줄 알면서도 준비했다는 건....
내가 긴장해 있다는 걸 알아차린 혜은이가, 일부러 그걸 풀어주려고 준비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척해도, 은근 속이 깊은 애니까 그랬을 가능성이 크겠지.
"그냥, 여러모로. 아, 미안. 나도 준비 끝났어. 이제 출발하자."
방금 그 실랑이 탓에, 원래 계획했던 출발 시간보다 조금 미뤄지고 말았다.
다들 준비 다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너무 시간을 끌었네.
나는 별생각 없이 나를 바라보는 녀석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치고, 천천히 편지로 복사해둔 특성을 발동하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발동만으로도 온몸의 마력이 뒤엉키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혹시나 해서 지켜보고 있던 은하가 회복시켜준 덕에, 억지로 버텨가며 진행할 수 있었다.
혹시 이 단계에서 문제가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포탈의 생성까지는 문제가 없네.
"엄청 고난이도의 던전 입구처럼 생겼네."
"애초에 던전시스템을 활용해서 만든 걸로 알고 있어. 엘프 녀석들도 비슷하게 이쪽으로 왔을 거고."
걱정스럽게 우리를 바라보는 모두에게 인사를 한 뒤, 우리 다섯은 천천히 포탈로 진입했다.
강렬한 빛을 넘어서 포탈 내부로 완전히 진입하자, 내 몸을 회복시키던 은하의 특성이 차단되었고.
나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급하게 포탈을 닫아버렸다.
"윽...!"
"달링?"
"여보...!"
"매니저님!"
"뭐야, 자지 너 괜찮아?"
내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자, 다들 놀라서 나를 부축하며 난리를 쳤다.
아마 너무 오래 유지했다면 위험하긴 했겠지만, 바로 깨닫고 닫아버린 덕분에 생명에 지장이 가진 않았다.
뭐, 일단 목숨만 붙어 있으면 천천히 회복시켜서 버티면 되는 거니까.
"어째서 몸을 과거로 돌려도 상처가 그대로인 거야...!"
"공주야 괜찮아, 천천히 치료하면 되니까. 그보다 주변 조사부터 좀 부탁해."
아마 이 피해는 차원 자체가 다른, 격이 다른 데미지라 10레벨 이하 특성으로는 회복하기 어려울 거다.
은하는 0레벨이라서 그것조차 극복이 가능했던 거겠지.
하여튼 도착에 무사히 성공했다는 가정을 한다면, 지금은 내 몸의 회복보다는 최대한 빨리 주변을 조사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음, 이 반발력.... 약하긴 해도 던전이야."
"예상했던 거랑 같네. 일단 이동 자체는 성공인 것 같으니까, 도착지가 맞는지 알아보는 게 다음이야."
솔직히 처음으로 해보는 차원 도약이다 보니, 당장 우리가 목표하던 묘족의 세계가 아닌 곳에 불시착했을 수도 있다.
...근데 이렇게 다시 포탈을 열기 힘들면, 만약 불시착이면 일이 굉장히 복잡해지겠는데.
시간도 오래 걸릴 거고.
"던전 난이도 자체는 엄청 쉬운 편인데.... 아무래도 인위적인 느낌이 강하게 나네."
"확실히, 뭔가 용도를 만들어서 쓰고 있는 느낌이지?"
지금 지구도 비슷한 작업을 하는 만큼, 대충 감이 오는 곳이었다.
여긴 던전으로 취급되긴 하지만, 실제로는 던전보다는 공장에 가까운 식으로 운영되는 곳일 가능성이 컸다.
던전의 환경이 필요한 몬스터의 사육이나, 특별한 식물 등의 서식지 조성에 필요하니까.
"이제 좀 움직일 만하네.... 최대한 방어적으로 특성 사용하면서 둘러보자."
"응."
우리 예상대로 이곳이 그런 장소일 경우, 그냥 던전을 클리어해 버리고 나간다는 선택지는 고를 수 없다.
왜냐면 여길 클리어 해서 사라지면, 공장이 사라진 덕에 한바탕 난리가 날 테니까.
그렇다고 출구를 마력을 강하게 사용해서 찾았다간, 그것대로 보안 부분에서 걸릴 수 있다.
그렇게 위험하게 눈길을 끄는 것보다는 입구를 평범하게 찾아서 조용히 나가는 것이 최선이다.
"생각보다 조용하네요. 왁자지껄하게 작업하거나 하는 광산 같은 건 아닌가 봐요."
"그러게.... 관리만 하면서 먹이만 주면 되는, 뭐 그런 용도의 공간이 아닐까?"
"오, 슬슬 뭔가 나온다."
"온도가 낮은 걸 보면, 냉장고인가?"
냉장창고로 보이는 커다란 방들이 몇 개나 존재했고, 그곳에는 처음 보는 글자를 붙여 정리된 액체들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통에 큼지막하게 대충 담겨있는 데다, 상표 비슷한 것도 없는 걸 보면.
아마도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이 바로 저 액체들인 모양이었다.
확실히 몬스터의 체액 같은 경우에, 저렇게 추출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음, 슬슬 소리가 들리긴 하네. 이제 슬슬 작업장인지 공장인지에 가까워진 거 아니야?"
"그렇겠지. 애초에 창고랑 그렇게 멀리 떨어트려 놓으면 이송만 귀찮으니까."
우리는 자그마한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이동했고, 슬슬 엘프로 보이는 이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며 작게나마 안심했다.
역시, 이동 자체는 정상적으로 된 모양이네.
그다지 우리 쪽을 신경 쓰지도 않는 걸 봐서, 그다지 우리가 의심스러운 복장도 아닌 모양이고.
그럼 이제 나가는 길만 찾으면 되겠네.
'...공개된 지도는 보안상 없는 건가?'
그래도 결국 사람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이상, 사람들이 이동하는 흐름만 보면 찾을 수 있을 거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들리는 소리가 좀 이상하네.
왠지 사람의 비명인지 신음인지 알 수가 없는 무언가가 울려 퍼지는 느낌이었다.
'인간을 따라 하는 몬스터라도 있나?'
그리고 그런 생각은, 이 던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을 보는 순간 완전히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확실히 그곳에는 우리의 예상대로 몬스터들이 양식되고, '체액'의 생산을 열심히 해내고 있었다.
...문제는 그 작업장 내부에, 몬스터가 아닌 인간에 가까운 무언가가 함께 있었다는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