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어차피 가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거잖아?"
"윽...."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채린이가 아픈 곳을 찔렀다.
물론 그건 본인도 '헌터'인 만큼, 나와 같은 생각을 해서 한 발언이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뱃속에 내 아이가 있는 만큼, 반쯤 무리를 하려는 내 행동에 대해서 찔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무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다니까. 전에도 말했지만, 나는 항상 우리 엄마가 자랑스러웠어."
"응...."
"다만, 딱 하나만 약속해줘."
"약속?"
"절대로 죽지 않기."
"......"
매번 유채화 헌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것이 채린이었지만.
그런 그녀가 유일하게 힘들어하는, 트라우마와도 같은 기억이 바로 유채화 헌터가 죽은 던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 저런 말을 하는 것이야 이상하지 않으리라.
"알았어. 그리고 설마 공주가 내가 죽을 만한 일인데 이 전달 방법을 알려줬겠어? 분명 충분히 살아남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했겠지."
"그건 그렇긴 해. 그래도 조심해달라는 거지."
"그야 뭐, 우리 사랑스러운 애들을 아빠도 없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사실 당연한 이야기긴 한데, 반대로 이야기 하면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켜야 할 것이 있으니까 물러설 수 없기도 했다.
여인위 때문에 망가져 가던 이 세상의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본 사람으로서,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는 것을 용납하기는 쉽지 않으니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티가 났는지, 채린이는 갑자기 나를 껴안았다.
"그런 눈, 하지 말고."
"그게...."
"F급 헌터를 물로 보지 말아 줄래? S급 헌터의 생각 정도는 가볍게 읽을 수 있거든?"
채린이와 나는 굉장히 다르지만, 그러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굉장히 비슷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화하는 이 부분이 가장 그런 마인드에 가까운 부분이고.
서로 닮아있는 부분인 만큼, 쉽게 들키기 마련인가 보다.
"미안, 어쩔 수 없는 고질병 같은 건가 봐."
"...하여튼 간에."
사실 채린이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심하게 지적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는데.
그건 아무래도 자기도 비슷하게 행동하는데, 같이 전장에서 싸우고 있다 보니 나오는 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채린이가 제한 때문에 같이 가지 못하기도 하고, 아무래도 F급 헌터들은 애 엄마들인데 그게 아니라도 데려가고 싶지 않긴 했다.
핑곗거리가 있어서 다행이지 뭐.
"진짜 꼭 살아야 해. 죽으면 죽여버릴 테니까 각오하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 악!"
죽은 사람을 죽인다는 미친 소리를 하길래 반박을 하려다가, 결국 등짝을 얻어맞은 뒤에야 대화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이것도 나름대로 허락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겠지?
"왠지 자기야가 한 대 맞을 것 같더라."
"이거 꽤 아픈데.... 치료해주면 안 될까?"
"싫은데. 나도 한 대 때리고 싶은 걸 참고 있는걸?"
"으윽...."
은하는 다른 사람 일일 때는 너무 이타적으로 굴지 말고, 이기적으로 굴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그렇게 희생부터 생각하고 있는 시점에서 맞을 필요가 있다는 반박이 안 되는 말로 나를 쥐어팼고.
결국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채로 미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속상하네. 다른 사람도 다 그렇겠지만.... 너무 속상해."
"...그래?"
"그럼 아니겠어? 다른 것보다, 같이 못 가고 연락 끊긴 채로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는 거잖아. 그것도 성미에 맞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고."
"하긴...."
원래부터 S급 헌터에, 지금은 F급 헌터로 최강자의 자리에 군림하던 사람이.
자신의 가족이 적진에 들어가서 싸우는 걸 돕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엄청나게 답답하고 짜증이 나긴 할 것 같았다.
당장 나도 비슷하게 던전에 들어가서 돕지 못한다는 사살이 답답하던 비전투 시절이 있으니까.
"오히려 같이 가기로 한 4명이 부러울 정도야."
"아하하...."
"...하여튼, 절대 못 가게 묶어놓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그래도 그 바보처럼 착한 성격도 포함해서 자기를 좋아하는 거니까. 이번에는 봐줄게."
"고마워."
엄청나게 욕을 들어먹긴 했지만, 어떻게든 은하에게까지 허락을 받는 것에 성공한 느낌이었다.
이제 두 명을 지나갔으니, 남은 인원수를 생각하면 까마득하네.
아니면 공주를 비롯해서 같이 갈 사람들은 그나마 설득하기 좀 나으려나?
"음, 이해했어. 어떤 상황인지 알겠네...."
"자, 잠시만 설아야?"
"응?"
"왜 갑자기 카드를 꺼내는 건지 알 수 있을까?"
"카드에 오빠를 봉인하면 도망가지 못하지 않을까 싶어서."
얘는 감정을 되찾은 이후로 이런 집착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디까지나 자제하고 있었던 건가 보다.
아니, 무슨 어둠의 듀얼에서 진 것도 아니고 사람을 카드에 가두려고 하냐.
생각해보면 처녀막도 카드로 이동했으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닌데....
"우리 애들 아직 신생아야 알지?"
"응...."
"진짜 오빠는 그 시절부터 전혀 달라지지 않았네...."
"그 시절?"
"겁도 없이 코코로한테 덤비던 어린 시절 오빠 말하는 거야."
"아...."
설아는 굉장히 불안한 듯한 손짓으로 들고 있던 카드를 섞다가.
한숨을 내쉬면서 자신의 손에 있던 카드를 없애버렸다.
...카드에 가두는 건 포기한 건가?
"이 바보 오빠를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
"어쩌겠어. 나 말고는 할 수 있는 사람도 없잖아."
"말이나 못 하면."
결국 내가 이런 말들을 들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가는 걸 결심한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애초에 지금 나 말고는 인류에서 F급 헌터를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잖아.
F급 헌터를 만들려면 10레벨의 남성 헌터가 있어야 하는데, 지금 나를 제외한 남성 헌터라곤 갓난아기가 각성한 것이 전부니까.
"이기적인 소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그냥 기다리면 안 될까 싶어."
"...일단 쳐들어오더라도 여기서 싸우자는 거야?"
"응, 예전처럼 쉽게 당하지 않게 준비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결국 끝이 없는 싸움일 거고, 그러다 보면 결국 언젠간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잖아."
"알아, 아는데...."
은하가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차라리 같이 싸우고 싶다는 거겠지.
하지만 결국 자신의 말이 설득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입술을 꽉 깨문 그녀가 결국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다들 저렇게 슬픈 표정을 짓게 만든다는 점이 굉장히 미안하네.
"대신, 만약에 오빠가 죽으면,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죽었는데...?"
"영혼이라도 찾아내서, 카드에 가둬놓고 애들 아빠 일은 하게 할 테니까 각오해."
"어? 어...."
채린이도 그렇고 왜 너희는 그렇게 협박을 하려고 하냐.
물론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정도로, 내가 죽는 게 싫다는 것이 보였기에 기쁘긴 했다.
반대로 이런 결정을 내려서 미안하기도 하고.
"주인님...."
"아, 뭐야. 둘이 같이 왔네."
"같이 있는데 그런 전화를 받으면,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혜미는 굉장히 불안한 표정으로, 혜은이는 그녀답지 않게 아주 진지한 표정을 하고 찾아온 상태였다.
와, 일할 때도 저렇게까지 혜은이가 굳은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참,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뭘 그렇게 심각해지고 그러냐."
"하지만, 이제 은혁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단 말야...."
"와, 미친."
그딴 대사를 매우 진지하게 말하지 말아 줄래.
그 부분에 오히려 굉장히 너다운 부분이긴 한데, 나 방금 굉장히 당황스러웠어.
진짜 유혜은 쟤는 내가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를 아직도 모르겠네.
"그냥 좀 장기 던전에 다녀오는 정도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잖아."
"돌아오면 그렇지만, 그게 아니면?"
"...결국 그거였냐?"
걱정하는 방향은 다 똑같네.
하긴 내가 들어도 지금 같은 상황이면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거기긴 하겠다.
아무리 우리 애들이 강하고 믿을만하다고 한들, 사랑하는 애들인 만큼 그런 걱정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알잖아. 내가 얼마나 이런 부분에서 머리를 잘 써먹는지. 제대로 처리하고 돌아올...."
"주인님...."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 있는 척을 하면서 말을 하고 있는데.
여전히 울먹이는 표정을 유지하던 혜미가 그대로 나에게 안기더니, 버려진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FFF급 페미헌터'의 내용으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다 보니, 걱정이 많이 되는 모양이었다.
"혜미야, 걱정하지 마."
"구, 굳이 가지 않고 해결해도 되는 거잖아요. 여기서 오는 대로 격파하면...."
"아니야. 세상을 위해서도,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도 이건 가서 끝을 보는 것이 맞아."
"하지만, 하지만...."
"이상하네, 우리 강인한 줄 알았던 혜미가, 사실은 울보였나?"
...뭐, 애초부터 혜미는 그렇게 강인한 아이는 아니긴 했다.
미래를 알고 있으니까 그 부분에서 조금 확신하고 움직인 것이 많았을 뿐.
원래부터 자신감이 부족해서 힘들어했다고 혜은이도 푸념했었지.
"알잖아. 나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그렇게 쉽게 당하겠어?"
"아니요...."
그나마 혜미 한정으로 통하는 설득이 있다면, 'FFF급 페미헌터'라는 이름의 소설에 대한 것이다.
그 예언서와 비슷한 것이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고, 그 소설에서 주인공이 나였으니.
그 소설 속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는 혜미에게는 이렇게 설득하는 것이 가장 빠르겠지.
"그럴까요...?"
"응,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혜은이 너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나는 혹시나 혜미가 저 질문에 있는 커다란 약점을 찔러올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혜미는 거기까지는 생각이 닿지 않았는지,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정말 내가 소설 주인공이면, 내가 주인공이니까 높은 확률로 모두를 구하긴 하겠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희생하는 내용으로 끝이 나는 소설일 수도 있다는 걸.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해서 굉장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