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자, 혜정아. 곧 네 동생이 태어난다?"
"왜 네가 여기 있는데."
혜미는 혜정이를 안은 채로 싱글벙글 웃는 혜은이를 보더니, 한숨을 푹 쉬면서 불만을 중얼거렸다.
하긴 뜬금없이 출산일에 와서는 저러고 있으니 어이가 없긴 하겠지.
나도 거들어서 한소리를 했지만, 혜은이는 이미 마음을 굳혔는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우리 혜자가 태어난다는데, 큰엄마가 못 보면 안 되잖아."
"안 봐도 될 것 같은데. 애까지 데려와서 뭐 하는 거야."
"혜정이도 보고 싶어 하거든?"
혜정이가 벌써 그걸 말할 나이는 아니잖아.
하여튼 여러모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굳이 크게 상관할 필요도 없었기에 우리는 한숨만 푹 쉬고는 출산을 준비했다.
설마 이것까지 방해할 생각은 아닐 테니까.
"슬슬 문신도 나타났겠다. 잠금 풀게."
"네 주인님."
우리가 진지하게 출산을 진행하기 시작하자, 혜은이도 조용히 하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의외로 이런 부분에는 눈치가 좋아서 할 말이 없다니까.
나는 커다랗게 불러있는 혜미의 배를 쓰다듬으며 자궁 문신을 보다가, 천천히 자지를 꺼내서 자궁 아공간의 잠금을 해제했다.
"윽...."
"괜찮아?"
"처, 처음 느끼는 감각이라 그런 것뿐이에요. 괜찮아요."
혜미는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천천히 받아냈다.
벌써 혜미를 닮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귀여운 공주님이었다.
그나저나 지금 생각해보면 이번에 낳은 여섯 아이 중에서 다섯이나 여자애네?
"우리 혜자 이쁘네. 혜미를 많이 닮아서 그런가."
"주, 주인님을 닮아서 예쁜 거겠죠."
이제 이렇게 애를 낳고, 씻기고 탯줄을 자르는 일련의 과정이 굉장히 익숙해졌다.
하긴, 벌써 6번째 애인데 당연하겠지.
물론 혜미는 처음이기 때문에, 아이를 안고 감동에 빠진 느낌이지만.
"둘 다 닮아서 엄청 귀여워...."
"아, 깜짝이야."
"맞다, 너 있었지...."
워낙 조용하게 있어서 그런지 혜은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렇게 주접 타이밍에 찔러 들어오니까 깜짝 놀랐다.
하긴, 이전부터 둘이서 같이 아이 이름 짓는다고 어쩌고 하면서 관심이 많았으니까.
'이름도 결국 혜은이가 지은 것 같더니만.'
혜미가 혜자라는 이름이 맘에는 들어서 나에게 말했지만, 아마 혜은이가 저 난리인 걸 보면 혜은이가 말했거나 둘이 논의해서 정한 이름일 거다.
유혜정과 유혜자라는 꽤나 생각보다 평범한 이름이라, 나는 둘 다 듣자마자 오케이를 했었지.
"아이고 우리 아기."
조막만 한 아기의 손이 내 손가락을 반사적으로 붙잡고.
방금 자궁에서 나온 탓인지 느껴지는 따스한 감각이 손가락을 감싼다.
역시 우리 아기라는 느낌이 엄청나게 들어서 기분 좋아진다.
아기가 많이 태어나도 이건 여전히 감동적인 느낌이네.
"혜자야, 응. 아빠야."
물론 아직 이런 말을 알아들을 시기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애가 있으면 이렇게 하게 된다니까.
어느새 혜미의 손에 혜자가 안기게 되면서, 내 양옆에는 자신의 딸을 안은 두 자매가 서있는 느낌이 되었다.
이러니까 진짜 뭔가 느낌이 이상하긴 하네.
"역시 혜정이랑 혜자도 거의 자매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혜정이나 이리 주고 밥이나 하러 가."
"맞다. 우리 혜미 이제 모유도 만들어야 하니까 힘들겠네.... 빨리 가서 언니가 밥해올게."
"그냥 꺼져."
혜미가 말은 저리 험하게 해도, 요즘 언니를 대할 때의 표정은 꽤나 밝은 상태였다.
진짜 싫으면 애초에 평소에 어울리지도 않을 텐데, 꼭 친하게 지내면서 여러 가지 의논도 하잖아?
뭐, 처음 만났을 떄 느껴지던 그 특유의 서로 애정이 묻어나오던 자매가 아닌 건 아쉽지만.
솔직히 나라도 저런 언니면 아무리 친해도 고운 말이 나오진 않을 것 같긴 해.
"요즘 들어 매일 품에 아기가 있으니까 이상한 기분이야."
"후후, 저야말로 이렇게 주인님의 아이를 낳고 부부처럼 이러고 있다는 게 이상한 기분이에요."
"일단은 부부가 맞으니까 부부처럼 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걸."
부인이 아홉 명이나 되고, 그중 애 엄마가 다섯이나 되어서 문제인 거지.
그래도 분명하게 각기 모두가 내 배우자인 건 맞으니까.
소중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이 아이들이 지낼 미래는, 조금 더 평화로울까요?"
"지금도 평화롭잖아."
"주인님 덕분에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과도기니까요."
"그때는 그렇지 않을까? 하긴, 아직 우리는 이번에 발생한 던전의 이상 현상도 끝내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그 부분은 계속 조사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정확한 원인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일단은 매니저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대응하게 하고 있고.
던전을 제압하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원인이 엘프 녀석들일 가능성이 있는 이상.
아무래도 계속 알아보려고 노력해야겠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녀석들이 다시 쳐들어오더라도, 주인님이랑 다른 모두라면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상황이 오는 것 자체가 싫어서 그렇지. 믿어주는 건 고마워."
일단 여기서 싸운다는 것 자체가, 겨우 복구하고 있던 시스템이 개박살나는 거잖아.
전쟁을 매번 우리 쪽에서 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불리한 일이야.
그래도 뭐,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벌벌 떨면서 사는 것도 그다지 좋은 방향성은 아니겠지만.
"다들 밥 먹어."
오랜만에 먹는 혜은이의 집밥은 맛있었다.
특히나 굳이 말은 하지 않지만, 이 식사에 길들어 있는 혜미가 엄청 즐겁게 먹더라.
혜미가 해준 밥도 맛있지만, 역시 그 혜미한테 음식을 알려준 본인의 솜씨도 좋은 게 당연하잖아?
"먹는 거 그만 보고, 와서 너도 먹어."
"먼저 먹어. 나는 혜자 보고 있을게. 어유 이뻐. 누구 닮아서 이렇게 예쁘지?"
은근슬쩍 두 아이를 같이 눕혀두고, 자매인 것처럼 돌보기 시작한 혜은이의 모습을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진짜 자기 자매 관계가 복잡해진걸, 자기 딸 단계에서 부활시키고 싶은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생각인지를 모르겠네.
"에휴, 누가 네 속을 알겠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혜은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나는 그냥 반쯤 포기하는 느낌으로 밥 먹는 데 집중했다.
저러다 배고프면 자기가 알아서 급하게 먹겠지.
사실 헌터인 이상, 굳이 매끼 챙겨 먹지 않아도 큰 상관은 없고.
"...정작 주인님이야말로 너무 신경 쓰는 거 아니에요?"
"어?"
"계속 휴대폰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계시잖아요. 역시 던전이 이상해진 게 마음에 걸리는 거죠?"
"끙...."
사실이라서 뭐라고 반박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튼 나는 지금 지키고 싶은 것이 정말 많단 말이야.
혹시 이 평화를 깨버릴 무언가가 있을까 봐 걱정이 많이 된다.
"주인님이 우리를 그렇게 걱정한다는 사실은 좋지만.... 그래도 너무 신경을 쓰지는 마세요."
"응, 노력할게."
하지만 그렇게 답하면서도, 나는 새로 올라온 던전들에 대한 보고서를 급히 확인하며 이상한 사항이 있나 찾아보고 있었다.
지금의 이 일상을 망가트릴 것이 있다면, 지금 최선을 다해 막고 싶고.
절대로 나중에 늦어서 후회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응, 이야기는 들었어. 이상한 걸 찾았다며?"
"처음 보는 물건인데.... 아무래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게 나오면 가져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일단 가져왔습니다."
"펜던트라고 했지?"
"네, 평소라면 평범한 아이템이라 생각했을 텐데.... 이게 절대로 열리지 않더라고요."
내부를 열어서 확인할 수 있는 펜던트 형태의 아이템이라는데.
사실 그냥 평범한 아이템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런 사소한 것 하나도 다 가져오라고 했던 만큼 일단 나한테 가져온 모양이었다.
일단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물건 같은데....
"잠시 전화 좀 할게. 응, 공주야. 시간 있어? 어, 보여줄 게 좀 있어서. 이쪽으로 오면 될 것 같아."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이 물건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것이었다.
물건의 겉 디자인이야 아예 다르지만, 마력에서 익숙한 형태의 구성이 느껴졌다.
바로 공주가 나한테 '자궁의 맹약'을 전해줄 때 사용했던 펜던트와 거의 같은 느낌이야.
"여보, 무슨 일이야? 무슨 물건을 봐 달라는 건데?"
"이거야."
"어라? 이 기술 내가 아직은 안 꺼내지 않았어?"
"응. 아무래도 위험하다고 안 건드리고 있었지. 아직 나한테도 전수하지 않았고."
이 펜던트에 들어간 기술은 본래라면 지난 회차에 우리 쪽에서 혜은이가 개발했던 물건인데.
우리가 그런 방향으로 상황이 급해지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개발이 되지 않은 물건이다.
아니, 애초에 그런 기초 개발은 하지 않아도 공주 머릿속에 다 있으니까 의미도 없고.
"이게 던전에서 나왔다고...?"
"혹시, 그때 너 말고도 다른 무언가를 준비하거나 했어?"
"아닐 텐데.... 우리한테 그런 여력이 있을리 없잖아."
"그럼 우연히 비슷한 기술을 구현한 놈들이 있다는 건데."
일단 공주는 여기 걸려있는 봉인을 풀 줄 알았기에, 어렵지 않게 펜던트의 봉인을 풀어냈고.
나는 그곳에 미러링으로 담겨있는 특성을 복사해 사용하는 것으로 효과를 전달받았다.
뭔가 특별한 능력은 아니었고, 어떤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이 전부인 별것 없는 능력이었다.
"미치겠네...."
다만 그 만들어진 물건이 평범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물건이라는 것이 문제지.
누가 보아도 어떤 물건인지 알아차릴 만큼 평범한 물건이지만.
그렇기에 지금 나를 굉장히 긴장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물건이다.
"이거, 편지지...?"
사실상 일회용인 능력에서 튀어나온 그 특별한 물건은.
수신인이 '박은혁'으로 되어 있는 새하얀 편지 봉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