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응, 응. 그래. 채유야 이모야."
"아우...?"
"어쩜 이렇게 귀엽지? 하긴 천사랑 타천사 사이에서 나온 금단의 과실인데 아름다울만 해."
그건 또 무슨 이상한 밈이냐.
채유를 껴안은 채로 싱글벙글 웃고 있는 은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아무리 모두 책임진다고 했다지만, 내가 임신시킨 은하가 나와 채린이의 딸인 채유를 안고 저 주책을 떠니까 기분이 이상하긴 하네.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까. 크게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없잖아? 심지어 전 세계적으로도 너는 주요한 예외로 치고 있고."
"끙...."
아무리 요즘 PC가 유행하고, 어지간한 사상이 다 존중받는 추세라고 한다지만.
남자 하나가 여자 여럿을 부인으로 맞이해서 임신시킨다는 건 주류가 아니었다.
아니 해외는 몰라도 일단 한국에서는 좀 이상하지.
그런데도 나와 관련된 것은 인정받고 있는데, 그건 유일하게 S급 헌터를 임신시켜서 F급 헌터를 만들 수 있는 것이 나라서 그렇다.
이제 남자 각성자가 태어날 수 있도록 포경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남자 각성자들 중에서 다시 S급 헌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려면 한참 걸리니까.
'뭐, 당장은 의미 없는 전력이지만....'
던전들이 거의 다 소멸하면서, 굉장히 이런 전투력 부분에서 인류가 부족함을 느끼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최근까지 다른 종족에게 침략을 받고 있었던 만큼, 분위기 자체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만큼 나라도 잘 활용해서 인류의 전투력은 늘려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 대부분의 생각이라서 나온 생각이라고 보면 된다.
'다행이지.'
결국 이건 헌터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유지되었기 때문인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가장 신경 쓰고 노력을 해왔단 부분이기에, 어쩌면 이것도 다 우리가 노력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었다.
솔직히 각성자들이 사고 쳐서 이미지를 망쳤다면, 이렇게 상위 스펙의 각성자가 고평가를 받을 리 없었을 테니까.
잠재적 위험이 아니라, 여차할 때 우리를 구해줄 보호책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는 것은 굉장히 잘된 일이었다.
"그건 뭐. 자기야가 엄청나게 뛰어다니면서 노력한 결과잖아? 다른 사람들도 그걸 알아준 거고."
"걱정이 많았는데, 의외로 잘 넘어가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내가 워낙 좆같은 일을 많이 겪어서, 딱히 인간을 믿거나 하지는 않거든요.
그런 만큼 최악의 사태를 대비하려고 여러모로 준비해놨는데, 그런 부분들이 무산되었다는 점에서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아무래도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썩었나 봐.
'하긴, 결국 세상이 이상한 건. 그 썩은 주원인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지구에서 암약하면서 집어삼킬 준비를 하던 엘프들, 즉 여성 인권 위원회가 고의로 만든 악의가 많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냥 그 녀석들에게 속아서 나쁜 일을 일삼던 사람도 많았다 보니, 그 녀석들이 해결된 지금은 좀 더 세상이 깨끗해 보이는 것일 터다.
여러모로 쓰레기 청소하니까 도움 되는 것이 많네.
혜미한테 감사할 일이지.
"미안, 너무 늦었지. 이제 채유 주고 너희는 놀러 가. 오늘 너희 데이트할 차례라며."
"나는 채유랑 있어도 괜찮은데."
"에이, 그건 나중에 나랑 따로 시간 잡아서 보시고요. 이 바쁘신 남편분이랑 데이트할 시간은 있어야죠."
"...미안하네."
"뭐가, 당연히 너는 나누어 쓰기로 한 건데 미안할 게 뭐 있어. 어디 몸 아프지나 말고 잘 다녀와."
"응, 채유아 이모 갈게."
이게 은하랑 데이트 가면서 채린이한테 배웅을 받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애 아빠가 다른 사람이랑 데이트한다니, 좀 레전드긴 해.
그 데이트 대상 배도 불룩 튀어나오게 만들어둔 상태라는 건 더 대단하고.
"흐아, 요즘 자기야가 얼마나 바쁜지. 이렇게 날 잡고 노는 것도 오랜만이네."
"미안하다. 그래도 이제 슬슬 시간이 있을 거야."
"뭐, 정작 우리도 네가 하자는 거 다 하느라 바빴으니까 상관없긴 해."
"그것도 고맙고."
아무래도 5명의 F급 헌터라는 타이틀이 있다 보니.
다들 새로운 시스템이 정착하는 것에 도움을 많이 줘야 했다.
다만 아무리 아공간이라 무리가 안 간다고 해도, 배가 부른 임신부를 부려 먹었다는 점에서 미안한 부분이었다.
잘 따라줘서 고맙기도 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일인가? 사실 그 정도 일이면 자기야가 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해야 했다고 생각하는데."
"여전히 착하네."
"...그냥 소중한 게 망가지는 게 싫은 거야."
"응, 알아."
저렇게 자기 성격을 포장하는 것까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예전처럼 집착하지 않고, 특히 나와 관련된 것을 비롯한 전체적으로 자기 욕심을 채우거나 적당한 선에서 만족하게 바뀌었지만.
그런데도 신기할 정도로 착해빠진 성격은 여전하다니까.
"그니까 망가지지 마. 내 소중한 거."
"응?"
"응?"
"아, 나 말한 거였어?"
"당연하지. 내가 자기야 말고 소중한 게 뭐가 있어? 자기야가 이 세상을 소중하게 여기니까 나도 지키고 싶은 건데?"
"아하."
조금 내가 생각하던 거랑은 다른 이유였나보다.
...근데 이건 또 이것대로 나를 생각해주는 거라서 기쁘네.
그냥 무지성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게 아니라, 내가 정말 어떤 미래를 원하고 그리는지를 보고.
그것이 이루어져서 행복할 내 미래를 위해 함께해준다는 거잖아.
좀 감동적인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긴, 이제 조금 달라지긴 했다."
"응?"
"이렇게 둘이 놀이공원에 오는 상황이 올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
사실 은하랑 데이트를 한다고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상황이면 우리는 항상 봉사활동 비슷한 걸 했다.
애초에 내 취미도 고아원에 가서 애들이랑 놀아주는 거고.
은하도 봉사활동을 엄청난 수준으로 하는 애니까.
근데 오늘은 의외로 딱 둘이 즐길 수 있는 약속이 잡혀서 이렇게 놀고 있잖아?
예전이었으면 상상도 못 했을 텐데, 꼭 그렇게 의미 있는 일이 아니라도 우리끼리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괜찮다는 식으로 여기까지 왔거든.
뭐, 다른 애들이 좀 그런 데이트도 하라고 했던 것도 원인이긴 한데.
그걸 듣고 괜찮겠다며 실행했다는 점에서 많이 바뀐 거다.
"이런 거 처음 타봐?"
"그러네. 처음인 것 같아."
"진짜 무슨 어디 수도원에 박혀있다가 나온 성직자 같네."
"뭐 하는 건지 정도는 알거든?"
그게 그거지.
이런 부분이 개선되기는 했어도, 기존에 행동해왔던 것들 때문에 보이는 은하의 성격이 도드라지는 느낌이다.
나는 그래도 이런 곳 좋아하는 고아원 애들이랑 가끔 와서, 저렇게 어리어리한 표정을 짓지는 않는다.
"근데 이런 게 재밌나? 헌터라 그런지 잘 모르겠어."
"그건 뭐 어쩔 수 없지. 그래서 이렇게 무서운 것보다는 평범하게 둘이서 즐길 수 있는 데이트 코스가 선호되는 느낌이긴 해."
근데 결국 이런 것도 좋아하는 사람은 또 좋아하더라고.
실제로 헌터들은 취하지 않는데도, 채린이처럼 술 마시는 걸 즐기는 사람도 있는 거고.
자기가 즐거우면 다 좋은 취미 생활이 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이 좋아할 것들이 많네. 나중에 우리 애들 크면 데리고 와야겠다."
"그 이전에 더 어린애들이 노는 곳들도 있으니까 거기에 가야 할 걸?"
"아하. 잘 아네."
그야 고아원에서 애들 데리고 갈 때 알아본 적 있으니까.
은하의 경우에는 꼭 애들만 보는 게 아니라, 그럴듯한 봉사활동은 다 하던 애니까.
이런 식으로 한쪽만 깊게 알고 있진 않을 거다.
"그나저나 우리 애들이라니, 뭔가 그렇게 들으니까 다 형제자매 같네."
"따지고 보면 자기야의 애들이니까 형제자매가 되는 게 맞지."
"흐음.... 그런가?"
이게 엄마 성을 따라갈 테니, 성이 서로 다른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점이 좀 걸리긴 해서....
하긴 그걸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감수해야겠지.
그나마 어릴 때부터 다들 친하게 지내게 하면 좀 나으려나?
"우리는 여기까지 놀러 와서 애들 이야기만 하네."
"당장 배에서 자기도 있다고 시끄러운데, 그걸 어떻게 이야기를 안 해."
"하긴.... 이제 너도 얼마 안 남았지?"
"응, 그래도 설아가 조금 더 빠르겠지만."
우리는 대강 놀이공원을 다 즐긴 뒤, 왠지 자연스럽게 아기용품이나 옷 같은 걸 구경하는 방향으로 데이트의 성질을 바꾸었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의 물건만 잔뜩 손에 들고 있었다.
애는 태어나는 것도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이게 뭐 하는 짓이지...?
"너무 많나?"
"기대를 많이 해서 좀 오버했을지도...?"
"뭐, 그래도 재밌었어."
"은혜가 좋아해 주려나?"
은하가 낳을 아이의 이름은 은혜라고 짓기로 했다.
굉장히 성녀 서은하의 딸이라는 걸 알기 쉬워지는 이름인데.
은혜는 자주 쓰이는 이름이니까 아마 이상할 것까지는 없을 거다.
"이거 하나만 더 사자."
"아까 비슷한 거 사지 않았어?"
"이건 채유 선물인데?"
"아."
그 와중에 채유한테 줄 것까지 신경 쓰고 있었구나.
나는 어지간해선 채린이가 다 준비해서 해결하고 있다 보니, 굳이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는데.
사람이 마음이라는 게, 뭔갈 받으면 기분은 좋은 법이긴 하잖아?
특히 채린이는 오늘 애랑 놀지 말고 이렇게 나가라고 적극적으로 밀어줬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확실히 듣고 보니 이제까지 생각을 하지 않은 내가 나쁜 놈 같았다.
"음, 그럼 그건 은하가 고른 거로 하고. 나도 하나 골라볼까...."
"이건 어때?"
"괜찮은데?"
그렇게 조금 성질이 변한 데이트를 하늘이 어두워질 때까지 즐기고.
둘이서 같이 선물을 전해주겠다며 채린이의 집으로 향했다.
요즘 거의 애만 보고 있던데, 힘들지 않나 모르겠다.
"채린아, 우리 다녀왔어."
"쉿."
"아, 자는구나."
"응. 뭐, 원래 이 나이대에는 계속 잔다더라."
"천사 같네...."
잠들어있는 채유를 보던 은하가, 그런 말을 하며 헤실거리는 웃음을 보였고.
나와 채린이도 비슷한 표정을 지으면서 의자에 앉았다.
채유가 우리 애긴 하지만 진짜 예쁘다니까?
"아 지쳤다.... 너희 끝난 거야? 바로 돌아가게?"
"그럴 생각이었는데.... 너 안 잘 거면 조금 있다 갈까?"
"그럼 좋지. 같이 한잔하자."
"오케이."
"나도 마실래."
평온하고 포근한 일상이, 오늘따라 굉장히 따뜻하고 기분 좋게 다가오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