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시간 참 빠르네."
"그러게, 그래도 이 아이 처음 가질 때는 되게 감동했는데. 잘 생각해보면 이용당한 거라 화가 나기도 하고."
"그건 미안해."
"뭐, 정작 진심으로 다가온 건 사실이니까 참은 거지만."
채린이는 자신의 커다랗게 변한 배를 쓰다듬으면서 미소를 지었다.
벌써 채린이가 출산이 임박했다니, 뭔가 정신을 차릴 때마다 시간이 훅훅 지나가는 기분이야.
하긴 슬슬 여러모로 안정화도 된 시기니까, 딱 아이 낳기에도 좋은 타이밍이긴 하지.
"응, 정말로 사랑해."
"채유 태어나면 잘 해줘야 해? 애 많다고 소홀하게 하면, 정말 가만 안 둔다."
"당연하지."
아이가 예쁜 공주님이라는 걸 알았을 때, 그리고 고민 끝에 채유라는 이름을 지어줬을 때가 새삼스레 떠오른다.
엄마가 낳기도 전에 모유를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 떠올라서 농담으로 던졌던 이름인데.
뭔가 어감이 이뻐서 좋다면서 채린이가 저거로 정했었지.
아마 그런 이유로 정한 이름인 걸 들키면 한 대 맞을 거다.
하여튼 채유도 그렇지만, 내 아이들인데 당연히 모두 아껴줘야지.
누굴 차별하거나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럴 생각이면 애초에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아이를 가지겠다는 선택을 고르지 않았을 거다.
당연히 내가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인 거지.
"오늘 또 기사 떴더라."
"그래?"
"응, 아무래도 지금 세계에서 가장 이목을 집중 받는 게 우리니까."
슬슬 채린이가 출산 예정일이라고 시끄러워지는 중이었다.
하긴 굳이 우리가 세상을 구하지 않았어도, 채유는 F급 헌터에게서 태어나는 첫 번째 아이잖아?
당연히 다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긴 할 거다.
'이 부분은 조금 미안하네.'
우리 애들은 대부분 그런 시선을 받으면서 자라날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긴, 그 부분은 굳이 내가 이야기하지 않아도 채린이가 가장 잘 알 거다.
채린이가 진짜 유채화 헌터 때문에 그런 이미지에 괴롭힘을 많이 받은 녀석이니까.
솔직히 성격이 좀 더럽긴 해도, 그런 경험을 하고 살아온 걸 가정하면 착한 수준이지.
"아니야."
"응?"
"나는 엄마가 헌터라는 게, 영웅이라는 게 자랑스러웠어."
", , , 그래."
"하지만 하나 아쉬운 게 있다면, 조금은 이기적으로 내 옆에 있어 줬으면 했어."
하긴, 채린이가 가진 트라우마가 괴롭힘 따위가 아니라 유채화 헌터가 죽은 던전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유채화 헌터가 자랑스럽고, 사랑하는 엄마였으니까.
그녀가 느낀 트라우마와 고통, 분노 등이 유채화 헌터가 아니라 그녀를 죽인 던전을 향한 거겠지.
"그럼, 더 조심해야겠네. 너는 무조건 살아야지."
"...응."
뭐, 이제 가장 문제가 되는 녀석들을 처리했으니 걱정 없지.
물론 처리했다기보다는 쫓아냈다는 것에 가깝긴 한데....
일단은 혜미의 특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차단했으니까.
"윽...!?"
"괜찮아?"
"아, 응. 슬슬 진통이 강해져서. 물론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네, 슬슬 동작해도 늦지 않을 텐데."
지금 채린이는 '자궁의 맹약 시스템'을 통해서 아이를 가진 상태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임신처럼 진통을 느낀 이후, 출산을 진행하는 방식을 사용하지 않는다.
출산이 가능해지면 부풀어 오른 배에 문양이 나타나면서, 출산 기능을 이용할 수 있는 식이랬지.
'아무래도 만든 게 지난 회차의 혜은이라 그런지, 이 부분도 좀 어지럽네.'
일단 아공간의 아기라 배가 부풀어 오를 필요가 없는데, 아이의 성장에 따라 유사하게 배가 팽창하도록 상상 임신 비슷한 형식이 진행되게 해둔 것도 어이가 없었다.
그런데 심지어 임산부 배에 자궁 문신이 나오면서 애가 태어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걸 알린다?
진짜 미친 소리라서 듣기만 해도 정신이 어지러워지더라.
"어?"
그리고 그 어지러운 상황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빛나기 시작한 채린이의 배에서, 날개 보양의 귀여운 문신이 살짝 자궁 형태를 이루며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날개가 자궁처럼 살짝 말린 듯한 문신으로, 임신한 사람의 특성에서 따온 디자인인 모양이었다.
"후우, 드디어 태어날 때가 되었네."
"긴장돼?"
"너야말로 긴장되는 모양인데?"
"그렇지 뭐."
하긴 우리가 엄마랑 아빠가 되는 순간인데, 아무리 우리가 이 세상을 구했어도 긴장이 될 만하다.
와, 근데 이렇게 진지한 순간에 또 미친 짓을 해야 한다는 것이 좀 그렇네.
지난 회차 유혜은이 좀 원망스럽다.
"크흠...."
"빨리 인증 해."
"아니, 이게 뭔가.... 아오."
기본적으로 배꼽으로 이어져 있는 아공간 보지는 내 자지가 아니면 통과할 수 없다.
영원히 나만의 사람이 된다는 인증 비슷한 것으로, 내 자지가 자궁의 맹약 때문에 상대의 자궁을 여는 열쇠가 된다는 형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반대로 말하면 이 아공간 자궁에서 아이가 나오는 것도, 내 자지의 허락이 없으면 나오지 못한다는 거다.
"이렇게 하면 되나?"
"맞는 것 같은데?"
방금 아기가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신이 표시되었는데.
이 문신에 자지를 가져다 대서, 자궁이 열릴 수 있도록 인증을 해야만 한다.
그래도 무슨 진통이나 질을 돌파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바로 아공간을 통해 나오는 식이라고 하더라.
조심스럽게 자지를 그녀의 자궁덮개살 위로 올려두자, 자궁덮개살 위의 문신이 빛나며 자궁의 봉인을 풀어내기 시작한다.
갑자기 자궁이 비워지기 시작하는 감각에, 채린이는 내 몸을 붙잡으며 놀란 표정을 지었고.
천천히 내가 자지를 떼어내자, 배꼽 근처에서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며 공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온다!"
강렬한 빛에 순간적으로 시야를 잃었다가, 정신을 차리는 순간 아기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갑작스럽게 자궁 밖의 세상을 맞이한 채유의 울음소리였다.
나는 급하게 옷을 고쳐 입고, 조심스럽게 채유를 받아들었다.
"내가 알던 출산이랑 다른데."
"그래도 탯줄은 그대로 연결되어 있네...."
물론 평범하게 질 속의 태반에 이어진 것이 아니라, 채린이의 배꼽에 이어져 있긴 한데....
하여튼 아이는 잘 태어난 모양이라, 탯줄만 특성을 사용해서 깔끔하게 잘라내서 채린이의 품 안에 안겨줬다.
뭔가 갑자기 끝이 나니까 실감이 나질 않네.
"채유야, 엄마야."
"울기만 하는데?"
"뭐, 그럴 나이잖아. 우리 예쁜 채유한테 말 거는데 태클 걸지 마."
"채유야, 엄마가 나 구박한다."
채유는 대체 이 눈부신 곳은 어디고, 어서 자궁으로 돌려보내달라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지, 네가 살아야 할 곳은 앞으로 여기란다.
와, 근데 우리 애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왜 이렇게 귀엽지?
"객관적으로 태어나자부터 외모가 빛나네, 느낌이 참 좋아."
"널 닮았겠지."
"이렇게 예쁜 딸인데?"
"너 잘생겼잖아. 나야 어릴 때 각성해서 그때부터 각성빨로 외모를 키웠다 쳐도, 너는 무능력자 때부터 잘생겼었으니까."
"그렇게 되나...?"
내가 느끼기에는 채린이 얼굴을 많이 닮은 것 같은데.
뭐, 사실 크게 상관있을 법한 부분은 아니지.
내가 탁란 걱정할 만한 상황도 아니니까.
애초에 자궁의 맹약은 그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는 특성이기도 하고.
"요즘 계속 그러고 다니네, 안 힘들어?"
"우리 애인데 힘들면 안 되지."
채유가 사랑스러운 거랑 몸이 힘든 건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채린이는 채유를 낳자마자 금방 배가 줄어들어서, 임신하기 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면 모유가 훨씬 잘 나오기 시작했다는 정도?
이제야 자신의 딸 아이 이름이 채유라는 것을 깨달은 것처럼 잔뜩 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즘에는 꼭 모유 수유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아이를 상시로 업어 키우는 중이었다.
확실히 헌터인 만큼 그다지 체력적인 힘든 부분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자주 깨서 모유 먹이다 보면, 아무래도 정신적으로 힘들 텐데....
"어차피 그다지 내가 필요한 상황도 아니고.... 이럴 때 아이랑 같이 있어 줘야지."
"멋진 엄마네."
다만 그런 힘든 마음 자체를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커버한다고 해야 하나.
나도 우리 애가 예쁘지만, 채린이가 하는 걸 보면 감탄스럽다.
거의 애한테 모든 신경을 쓰면서 사는 수준이잖아.
"그래, 아빠야. 아빠."
채유의 자그마한 손이, 내 손가락을 한가득 붙잡았고.
헤실거리면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솔직히 채린이의 마음이 좀 이해가 가긴 했다.
우리 애가 이러고 있는데 저런 마음가짐이 생길 만도 하지.
"울고 막 칭얼거리지 않아?"
"어디 문제 있는 거 아니면 절대로 안 그러던데?"
"착하네."
엄마처럼 좀 신경질적인 성격이면 큰일이었을 텐데, 나름 다행인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근데 이렇게 아기한테 닿아서 체온을 나누고 있으니까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온몸이 다 따뜻해지는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부럽다. 너희 엄마 모유 맛있는데, 요즘 초유라 더 맛있다던데 아빠도 좀 줄래?"
"주책이야. 꺼져."
"후, 채유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내가 독점하던 F급 헌터의 모유였는데...."
농담이 아니라 채린이의 모유는 일반적인 우유보다 맛이 풍부하면서 거부감 느껴지는 맛도 없어서, 어떤 방법으로 먹든 최고로 즐길 수 있는 우유였단 말이야.
내가 그다지 우유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꾸준히 챙겨 먹는 것이 채린이의 모유였는데.
솔직히 뭔가 안타까운 느낌이 있네.
"뭐, 어쩔 수 없지. 아빠 거지만 우리 딸이 먹어야 하니까 양보 좀 해줄까?"
"아우?"
"애한테 헛소리 그만해."
채유는 제대로 상황을 이해를 못 했는지, 여전히 내 손가락만 붙잡고 몸을 채린이에게 기대고 있었다.
후, 어지간한 상대라면 나도 이렇게 간단히 지지는 않았을 텐데.
하필이면 상대가 우리 딸이라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