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15 14장 - 유혜미(10)
근데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니까.
어쩌다가 쟤는 내 노예라는 밈을 밀면서 사랑을 전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냥 좋아한다면서 달려들어도 충분히 먹힐 것 같은데.
"노예 같은 거 때려치우고 그냥 내 사랑스러운 부인 같은 거 하면 안 되냐?"
"네? 네엣!?"
"야, 야. 커피!"
화들짝 놀란 혜미가 갑자기 깜짝 놀라더니 커피를 사정없이 따라서 잔을 넘치게 따르기 시작했다.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그건 절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커피를 질질 흘리는데.
음, 뭔가 엄청나게 싫어하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커피는 금방 정령술로 청소하긴 했지만.
아직도 상상만 하면 끔찍하다는 듯 저러고 있으니까 조금 당황스러웠다.
왜 그렇게 노예라는 직책에 큰 의미를 두는 거야.
"그치만 노예라는 건 주인님이 저한테 가장 최초로 부여한 약속의 관계잖아요. 여기 보지에 덜렁거리는 클리 피어싱을 보고 부디 떠올려주세요!"
"그걸 모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거 최면으로 한 거잖아."
"그래서 더 소중한 거죠. 아무것도 모르던 저랑 주인님이 만난 계기인데."
그걸 우리는 강간범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개인적으로 내가 혜미한테 미안한 점이 있다면, 아무리 혜은이가 부탁했다지만 그때 그런 식으로 혜미를 괴롭혀가면서 개발했다는 건데.
오히려 그게 나와의 관계를 시작해준 트리거라, 더욱 소중하다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
"...그럼 사실 언니도 좋아하겠네."
"그야 당연히 좋아.... 혜밋!?"
"역시, 너 일부러 다 알면서도 괴롭혔구나."
"...그야, 주인님이 알려주셨잖아요. 언니를 괴롭히는 즐거움.... 그걸 어떻게 참아요."
"오...."
근데 솔직히 혜은이가 괴롭히면 존나 귀엽긴 해.
딱히 혜은이가 나한테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그런 가학심이 드는 거 보면 혜은이가 문제가 있는 거다.
심지어 나뿐만 아니라 혜미도 느끼고 있다?
솔직히 혜은이가 찰진 게 문제야.
"아무튼, 그 부분은 다행이네. 계속 신경 쓰였거든."
"그랬어요!?"
"내가 소중한 자매의 관계를 망친 건 아닌가 했지."
"...원래 자매라는 건 싸우면서 지내는 거예요."
원래 너희들 그런 관계 아니었잖아.
그리고 싸우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네가 패는 거고.
물론 혜은이도 원죄가 있으니, 딱히 그러지 말라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후우, 커피 좋네. 여러모로 혜미가 챙겨주는 밥이랑 커피에 길드는 느낌이야. 다른 거 먹으면 기분이 별로더라."
"좋은 일이네요. 평생 제가 옆에 있어야겠는데요?"
"그랬으면 좋겠다. 어디 아프지 말고 평생 내 곁에 있어 줘."
사실 모두에게 바라는 건 그게 가장 크다고 생각한다.
다 같이 여인위를 몰아내야 하고, 던전에서부터 세상을 지키기도 해야 하지만.
그 이전에 모두가 멀쩡하게 살아있었으면 좋겠다.
워낙 사상자가 많이 나오는 것이 헌터 업계고, 지금은 차원 단위의 전쟁을 하고 있다 보니 요즘은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
"오히려 F급이 되지 못하는 주인님이 가장 걱정이에요. 괜찮겠죠?"
"괜찮지 않을까? 우리 사랑스러운 노예, 유혜미씨가 내가 위험할 때는 구해줄 테니까."
"저, 저는 전투력은 약하거든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강력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
내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혜미도 알아차렸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FFF급 페미헌터'를 읽어서 내용을 파악할 때는, 의외의 것이 해결의 열쇠였다는 점은 감탄이 나왔었다.
"생각나네요.... 주인님이 저한테 어차피 보더라도 만나러 와야 한다고 했던 거요."
"어때, 거짓말이었어?"
"주인님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 안 했거든요? 이해를 잘 못 했을 뿐이지."
혜미의 눈동자에서 하트 모양의 빛이 반짝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어제 내 아기씨를 받아들여서 임신하는 것으로, 혜미도 0레벨에 도달했고.
그것으로 인해 F급 헌터가 되면서, 새로운 세부 특성을 부여받았다.
굳이 나한테 설명을 해주지는 않았지만, 소설을 통해서 미리 내용을 확인했기 때문에 나도 무슨 능력인지는 알고 있었다.
"추방의 결계, 엄청난 거긴 해."
"...하지만 아시죠? 그거 딱 한 번만 사용 가능한 거."
아마 혜미가 여성 인권 위원회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탓에 이런 특성을 각성한 것 같은데.
'추방의 결계'라는 이름의 특성은, 단 한 번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존재들을 전부 원래 세상으로 추방하는 힘이 있었다.
차원 단위로 행해지는 광역 공격인 만큼, 단번에 여인위의 시스템을 조질 수 있다.
솔직히 엘프만 다 쫒아내면 여인위는 금방 정리할 수 있지.
다만 문제라면 그만큼 강력한 능력인 만큼, 이 능력 이외에는 혜미가 아무것도 부여받지 못했다는 거다.
원래 자기 특성의 강화 같은 서브 적인 버프도 있는데, 그것조차 존재하지 않고.
혜미는 10레벨도 그냥 계약의 제약을 넘는 거여서, 9레벨 시절의 무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중이었다.
심지어 이 새 능력은 일회용이라, 사용하고 나면 혜미의 몸에서 완벽하게 증발하고.
배에 내 아기만 임신한 연약한 A급 헌터가 되어버리게 된다.
물론 정령술은 키우면 S급 수준에 도달하긴 하겠지만, 다른 애들에 비해서는 여러모로 위험에 처해있는 편이지.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번 일 끝나면 던전은 좀 조심하고, 쉬는 걸로."
"네? 주인님, 그건 아무리 그래도...."
"홑몸도 아니잖아? 다른 애들처럼 압도적으로 강한 것도 아니고. 다들 F급이라는 특별한 스펙 때문이지, 원래는 임신 상태에서 싸움 엄금이야."
"...맞다, 그랬었죠."
혜미는 그래도 배 속의 아이에는 제대로 반응하면서 이해해줬다.
자기 몸도 좀 그렇게 아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혜미의 뿔을 만지작거리면서, 무리하지 말라고 말했다.
"하읏.... 거기 민감하다니까요."
"그래서 싫어?"
"좋아요♡"
좋으면 다치지 말고 내 옆에 계속 있으란 말이야.
암튼 여러모로 오늘 많은 생각이 드네.
사실상 이겼다고 생각해서 더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마 이때쯤이면 혜은이한테 전화가 올 텐데.
"어, 왔네. 여보세요?"
"몸은 좀 괜찮아? 혜미는?"
"무사히 성공. 방법도 찾았고."
"...그럼 빨리 시일 잡는 게 좋을 것 같아. 녀석들이 지금 심상치 않거든?"
한국에 대한 가짜 소식을 꾸준하게 퍼트리고, 세계적인 연락망을 최대한 차단한다.
그게 나랑 혜미가 자궁의 맹약을 맺기 위해 노력할 때 벌어지고 있던 일이다.
그렇게 작업하던 것이 길게 이어져서, 지금은 완전히 한국과 다른 나라들이 단절된 상태였다.
무역이 단절된 거야 꽤 오래전 일이고, 지금 슬슬 정의를 위해서라지만 너무 힘들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하긴 현대의 인간은 헌터조차 뭔 일만 있으면 욕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인데.
세상을 제대로 만든다는 정의 따위를 신경 쓸 리가 없지.
그나마 엘프의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아서 한국에서 버티는 건데, 이러다 물량으로 지면 어차피 노예가 될 거면 이러다 뒤지는 게 더 개죽음처럼 느껴질 거다.
"우리 무력을 보고도 그런 반응이라는 게 참 웃긴다니까."
"...그래도 우리가 적절하게 대응책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잖아. 단일 무력만 강하지, 본인들을 지켜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생길 만하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우리가 없는 사이에 다들 최대한 대응을 잘한 덕분인지.
남자와 여자의 갈라치기를 비롯한, 여인위가 벌여놓은 여러 사건은 꽤나 잘 마무리되어 있었다.
오히려 이 상태로도 한국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걸 보면, 오히려 더 아슬아슬하게 느껴지기도 하네.
"그래서 방법이 뭔데?"
혜은이는 내가 방법을 설명해주자, 역시 자기 동생이라면서 우쭐거렸다.
하긴 나도 내가 사랑하고 책임지는 사람이고, 내 노예가 혜미라는 것이 자랑스럽긴 해.
아마 역사서에 엄청난 영웅 같은 거로 남지 않을까?
"아, 근데. 면역인 녀석이 하나 있어서. 걔는 우리가 직접 잡아야 해. 만약에 잡지 못하면 걔가 다시 엘프들을 불러올 거야."
이번 혜미의 능력은 이 세상에 있는 보안체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라서.
내쫓는 것뿐만 아니라 다시 들어오는 것도 막아버린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잘하면 던전의 존재도 이 지구에서 깨끗하게 사라질지 모른다.
'그럼 그 혜미랑 맹약 맺던 그 세상처럼. 던전 같은 게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 찾아오는 건가?'
그것도 꽤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여튼 그렇게 보안을 마련해서 막으면, 한참은 다시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그사이에 여길 완전히 정비하면 아무런 문제 없이 여인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문제는 아무리 보안을 정비해도 안쪽에서 뚫는 건 훨씬 쉽다는 건데.
이런 상황을 예측한 건지, 아니면 어쩌다 그런 기능도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여인위를 이끄는 '코코로'는 혜미의 능력을 무시하고 혼자서 여기 남게 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고민해야 하는 건 그 코코로라는 엘프를 어떻게 쓰러트릴지야?"
"그걸 그다지 고민할 건 없어."
내가 아까 굉장히 마음이 편해진 이유가 있는데.
결국 코코로가 남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이게 쉬운 싸움이라는 거다.
걔가 뭔 뒤통를 치더라도 다 미리 대비할 수 있으니까.
그나마 0레벨 특성에 비빌 수 있는 건, 엘프가 10레벨을 찍은 경우인데.
코코로 혼자면 솔직히 우리가 특성 다 때려 박으면 금방 찾아서 없앨 자신이 있었다.
물론 시간은 좀 필요할 거다.
엘프가 사라져도, 남아있는 여인위의 잔당이 정신 못 차리고 엘프 편을 들면서 발악할 수도 있고.
완전히 안정화가 되어야 우리도 병력을 한국을 지키는 것에서 녀석을 조지는 것에 집중하지.
"그래서 말인데."
사실 내가 생각해낸 건 아니고, 내가 생각해내는 내용을 소설에서 읽어서 알고 있었는데.
이게 꽤나 그럴듯하다고 생각해서 말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코코로를 잡는 것부터 보는 게 아니라. 코코로를 잡는 것에 온 신경을 쓸 수 있게 만들자는 거야."
이번에 혜미가 어떤 식으로 이 세상을 구해내는지를 실시간으로 보여줄 거다.
그럼 이제 자신의 주인님들을 없애버린 혜미한테 분노한 여인위 소속의 녀석들이, 체계가 다 무너진 상태로 혜미에 집중포화를 하려고 하겠지.
하지만 오히려 한국을 노리는 것보다는 그렇게 우리한테 어그로가 끌리는 편이 훨씬 낫다.
혜미의 곁에는 항상 최고의 전력인 F급 헌터와 최고의 세뇌 전력인 내가 함께할 거고.
그렇게 지킬 것이 적어진 타이밍에 여유로워진 나머지 F급은 코코로를 잡아 패는 것에 집중한다.
아무래도 코코로가 여인위 소속의 녀석들을 완벽히 컨트롤 하면 먹히지 않겠지만, 워낙 폐쇄적이면서 마스터 자체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여인위에서 그게 될까?
자기가 사랑하던 마스터 못 잃는다고 폭주할 게 뻔하지.
"오, 그건 진짜 괜찮네."
"다만 조금 마음에 걸리는 건 혜미가 진짜로 위험해질 가능성이 지금보다 늘어난다는 거야."
상황이 끝나고 나서도, 여인위의 잔당은 남기 마련이고.
워낙 긴 시간 세뇌당한 녀석들은 정말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폭탄 같은 거다.
그 폭탄들이 노리는 1순위가 혜미가 된다는 거잖아?
"저는 괜찮아요. 오히려 하고 싶어요. 어차피 제가 어그로 안 끌어도, 우리나라나 아니면 우리를 이끈다고 알려진 주인한테 어그로가 끌릴 거잖아요."
차라리 주인님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것보다는, 자신이 그렇게 되는 것이 낫다면서 웃어주는데.
그 표정이 너무 아름다워서 뭐라고 말리기 어렵게 느껴졌다.
사실 내가 대신하고 싶은데, 아무래도 혜미의 특성인 만큼 대리로 하면 티가 심하게 날거다.
괜히 걸리면 역효과고.
"...알았어. 대신 내가 위험해지는 한이 있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지켜줄게."
"나도 마찬가지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알았어요. 둘 다 믿으니까 청승맞게 그만하고 세부 계획이나 짜서 추진하세요."
...라고 소설에 그대로 적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독백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