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4 11장 - 유혜은(3)
머리가 지끈거리길래, 일단 상황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혜은이는 내가 알던 것처럼 변태가 아니라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혜미도 어릴 때 죽어서 쭉 혼자서 살았기 때문에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같은 타이밍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목격했는데, 이리도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내가 알던 혜은이와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접근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기본적으로 혜은이 특유의 성격은 남아 있는 것이 보여.'
혜은이의 자신이 강간당하는 걸 좋아한다는 기억을 지워줬던 적이 있고, 그런 만큼 야한 것이 약해진 혜은이가 어떤 모습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혜은이와 유일하게 다른 점은 저 까칠한 표정과 우울해하는 감정인데.
아마 저건 까칠한 것이 아니라 혜은이가 찐텐으로 우울할 때 나오는 표정이겠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당황하거나 멘탈이 부서질 정도의 충격을 받은 표정은 자주 봤지만.
평범하게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혜은이의 모습은 처음이라서 어색하게 느끼는 것일 터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마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결국 지금 이 혜은이가 이런 감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건, 내가 알던 혜은이와의 차이점에서 생겨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첫 번째로 야한 머리가 자라나기 전이라, 취미로 자위 같은 야한 행동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
이건 일단 취미 활동이나 성욕 해소 등을 통해서 스트레스 해결이 될 부분인데.
그것이 되지 않으니까 당연히 자신의 삶을 힘들게 느낄 수도 있는 거였다.
두 번째는 당연하게도 혜은이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것인 '혜미'의 존재 여부였다.
본래 혜은이는 자신의 그 변태성을 혜미 때문에 억누를 정도로 혜미를 좋아했었는데.
그만큼 혜은이는 살면서 혜미를 돌보고 함께 살아온 것에 기쁨을 느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그런 혜미가 없었다면 훨씬 건조하기 힘든 삶을 살았겠지.
나도 아마 비슷한 기분 자체는 자주 들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저런 부분을 전부 고아원에 가서 아이들이랑 놀아주면서 풀었으니까 괜찮았던 거지.
요즘 들어 고아원에 가는 횟수가 줄어든 것도, 아마 다른 기쁜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리라.
"아, 죄송해요. 왜 그렇게 알고 있었지?"
"그럴 수도 있죠. 은혁씨는 가족이 있어요?"
"고아라서요. 심지어 고아원 때 녀석들이랑 연락도 잘 안 되고...."
"아, 죄송해요."
"아뇨. 저도 비슷한 질문 했잖아요."
뭐 집안 사정이 별로인 건, 혜은이나 나나 별로 차이가 나는 건 아니니까.
물론 누군가는 혜은이는 어릴 때라도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더 낫다고 하겠지만.
그건 나도 원장님에게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원래 가지고 있던 걸 빼앗기는 게 더 뼈아플 수도 있거든.
"근데 혜은씨는 어쩌다 여기...."
"아, 모르시겠구나. 이 건물이 원래 제가 처음 헌터로 있던 곳이에요."
"진짜요?"
"네."
혜은이가 한 번도 말해준 적이 없어서 이런 부분까지는 몰랐다.
아마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언급도 하지 않은 거겠지만....
그래서 혜은이가 계속 이 주변을 얼쩡거렸던 거구나?
"뭔가 후련하긴 하네요.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는 별로 없어서요."
"그러게요. 사실 답답할 때는 누군가한테 털어놓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질 때가 많잖아요?"
혹시 더 남아 있는 것이 있으면 털어놔 달라는 은근한 요청이었지만.
혜은이는 이제 남은 것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 가능하면 최대한 얻을 수 있는 만큼 정보를 얻어보려고 했는데....
너무 집착하는 느낌이 들면 안 되니까 이쯤 할까?
"아 참. 여전히 그 요청은 거절하시는 거죠?"
"요청이요?"
"저번에 물어봤잖아요? 스카우트 요청."
"아까 보셨잖아요. 같이 챙겨야 할 애들이 많아서요."
"흐응, 하긴 불타는 사내 연애를 하는 중인데. 그 상태에서 이직하기에는 좀 애매하네요."
"그렇죠?"
이쯤에 혜은이가 나한테 스카우트를 넣었던 것이 새삼스럽게 떠올랐다.
그 당시에도 채린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 거절하긴 했지만, 당연히 예의상 했던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진심으로 던져본 생각이었구나?
"크흠, 차였기도 하고.... 이제 슬슬 돌아가서 일도 해야겠네요. 오늘은 고마웠어요."
"저야말로 묻어줘서 고맙죠."
옥상에서 나가려던 혜은이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 잠시 멈춰 섰지만.
금방 자신의 고개를 휘젓더니 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저러니까 오히려 찜찜하네.
"특성 자체는 동작하지만, 혜은이한테는 통하지 않았고...."
일단 혜은이랑 다시 이어지라는 걸 보면, 여기서도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라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특성이 동작하질 않으니까 특성을 이용해서 조교 하는 식으로 꼬시는 건 불가능.
그렇다고 기존에 만났던 혜은이와의 시간을 참고해서 그대로 행동하면서 마음을 키워나가기도 어렵다.
지금 혜은이는 기존의 혜은이와 완전히 다른 사고방식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냥 천천히 친해지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네."
일단 내 특성은 혜은이에게만 통하지 않는 거지, 그 이외의 사람들에겐 잘 통한다.
이전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서 어지간하면 특성 사용을 자제했었다.
근데 어차피 여기는 혜은이 기억 속이니까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결국 나는 관리자들한테 하나하나 특성을 걸어서, 자연스럽게 내가 혜은이와 만날 수 있는 상황들을 만들어버렸다.
그럼 이제 당연히 그때의 일을 기억하게 될 거고, 나는 그 반응을 지켜보는 것부터 시작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은혁씨도요."
말투 자체는 평범하지만, 나를 볼 때는 어느 정도 웃음기가 생겨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다행히 혜은이가 나에게 미미하지만, 호감을 보인다는 거지.
이럴 때 밀어붙여야 한다.
"그럼 저랑 저녁이나 같이하시죠? 요즘 수다 떨 친구도 없고 해서 심심해요."
"여자친구분은 어디에다 두시고요?"
"친구끼리만 할 수 있는 이야기도 있는 법이에요."
"그렇긴 하죠."
그리고 굳이 혜은이가 이야기를 하도록 유도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신이 난 것처럼, 내가 즐거웠던 것부터 재밌었던 것, 심지어 힘들었던 것까지 썰을 풀며 웃는다.
이렇게 계속해서 채워 넣다 보면....
"그쵸?"
"그러게요. 으음...."
너무 내가 할 말만 하니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할 말을 파고들 타이밍을 놓치고 있었다.
착한 행동은 아니지만, 내가 계속 이러면서 혜은이는 충분히 대화를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거다.
저렇게 안달이 나면, 자연스레 마음이 급해져서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내뱉는 법이다.
"이게 뭔지 아세요?"
"뭔데요?"
"A급까지 통하는 독약이래요. 원래는 연구용 샘플인 걸, 몰래 일부지만 훔쳐 왔어요. 이 정도 양이면 저는 확실히 죽을 거예요."
"네!?"
...당연히 주제 유도까지는 일부러 했던 거지만, 그것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는 내 상상 이상이었다.
그녀는 솔직히 팀원들과 자신을 비롯한 헌터들을 믿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참으려고 했지만.
갈수록 의미를 잃고, 이젠 견딜 수가 없다는 거였다.
"그랬는데. 이상하죠. 왜 당신을 보니까 그럴 마음은 없고. 이 이야기도 말하면 새 비밀이 생기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뭔가 하기 싫어졌어요."
"그건 다행이네요."
내 생각보다 더 혜은이의 상태가 심하다는 걸 깨닫게 되는 부분이었다.
달래주려고 여러 이야기를 생각해왔던 것 같은데, 워낙 방금 들은 내용이 충격적이라서 다 까먹었다.
시발 이럴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하, 씨. 혜미한테 면목 없을 뻔했네."
"네? 뭐라고요?"
"아, 혼잣말이에요."
"음.... 근데 혜미라고 하셨죠? 이상하네요. 죽은 제 동생 이름도 혜미인데. 지인 중에 혜미라는 이름이 있는 사람이 있나 봐요?"
"...있죠. 되게 착한 여자애로."
나는 무의식적으로 목에 걸려있던 혜미의 뿔을 만지려고 했지만.
당연하게도 지금은 내 목에 걸려 있을 리가 없었다.
원래 이 시점에는 혜미가 뿔이 잘리지도 않았지만, 애초에 이 세상에는 혜미가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필요할 때면 말하지 않아도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해주고. 괜찮다는 데도, 오지랖 부리면서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려 하는.... 아주 좋은 아이예요."
"오.... 좋은 사람이네요. 저도 소개해줄 수 있어요? 이름 때문인지 뭔가 정감이 가서.... 그런 동생 하나 있으면 좋겠다."
혜미라는 키워드에서 여기까지 반응을 한다니.
나는 잠시 한숨을 쉬다가, 역시 나는 이런 걸로 뭐라 잘 말할 수 있는 성격이 되지 않는 다는 걸 꺠달았다.
그냥 무지성 펙트로 때려 박으면 편해질 텐데.
'차라리 그래볼까?'
그랬다가 미친놈 취급받아도 어쩔 수 없는 거지만.
솔직히 내가 각성자인 시점에서, 그걸 이용해서 설명하면 믿어줄 가능성도 있었다.
남자가 각성자인 것도, 일반적인 상황에선 비상식이라 여길 만한데.
그걸 쿨하게 받아들여 주는 것이 혜은이의 성격이니까 먹힐지도 모른다.
"혜은씨, 혹시 예언 계열 특성에 대해서 아시나요?"
"...잘 없지만 유명한 이야기니까요.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이는 사람도 많다곤 하는데. 개인적으론 그런 운명론 좋아해서 재밌게 찾아봐요."
당장 혜미만 해도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뭐, 지금은 내가 그런 걸 가지고 있다고 말해야 하는 셈인데.
솔직히 조금 다른 세상에서 과거를 체험하고 있는 거면, 미래를 봤다고 해도 크게 다르진 않겠지.
"만약 제가 그런 특성이 있다면 어떻게 하실래요?"
"농담 하시는 거죠?"
"...솔직히 좀 진지한데. 농담이라고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뭐, 이런 중대한 비밀은 제 다른 비밀도 아는 혜은씨 정도가 아니면 말해주기 어렵거든요. 이미 아주 친한 여자친구 정도면 모를까."
"예언이라.... 뭐, 저에 대한 미래라도 보신 건가요?"
미래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것을 봤으니 설명이 어렵다.
예언이라고 함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것을 설명하는 건데.
내가 하려는 것은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것을 설명하는 거니까.
"그런 건 아니고요.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봤죠."
"일어나지 않은 미래요?"
"저에게는, 조금 다른 미래가 보여요. 과거에 다른 선택이나 다른 사건이 일어나서 바뀌어버린 세상의 미래요."
혜은이는 조금 흥미로웠는지, 집중해서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실제로 여기부터는 혜은이가 굉장히 흥미로워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저번에 만났을 때도 혜미라는 이름에 강하게 반응했으니까,
"조금 전에 제가 혜미라는 여자애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죠?"
"네. 그렇죠?"
"그거.... 혜은씨 여동생의 이야기가 맞아요."
"네?"
혜미가 죽지 않은 세상에서, 두 자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얼마나 혜은이가 혜미를 아꼈는지, 반대로 혜미가 얼마나 언니를 잘 따랐는지.
또한 그 세상의 혜은이가 얼마나 변태 같은 여자였는지.
마지막으로 언니가 변태적인 취미로 폭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혜미가, 언니를 경멸하는 척하는 취미를 가지게 된 것까지 전부 설명해줬다.
"그 예언에서 봤다는 저, 진짜 좀 이상하긴 하네요. 자신을 강간해달라고 요청한다니. 아니면 은근슬쩍 은혁씨 취미를 곁들인 소설이려나?"
"아니에요. 저도 많이 당황했었다니까요."
"혜미라.... 진짜 그리운 이름이네요. 혜미랑 같이 살았다고 생각하면, 제가 이렇게 되지도 않았을 거란 거죠?"
"좀 변태가 되긴 했지만, 그렇게 쓸쓸한 표정은 짓지 않으셨어요."
"그게 그렇게 마음에 걸리셨어요?"
"...아무래도 그 기억 속에서는 저랑 사랑했던 사이잖아요? 그런데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마음이 아프죠."
"사실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왜 저 사람은 나를 저렇게 애틋하게 쳐다볼까. 아니면 가슴이라도 보는 변탠가, 하고."
내가 그렇게 쳐다보고 있었나?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혜은이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믿어요. 아니, 정확히는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이 세상에는 없더라도, 다른 세상에서라도 혜미가 살아 있다면.
그럼 그것만으로도 굉장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혜은이는 굉장히 아련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내뱉었다.
"혜은아.... 앗, 죄송해요 혜은씨."
"아뇨. 이해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그 이야기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네? 전체적인 건 거의 다 설명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러니까요. 더 자세하게요."
혜은이는 부끄럽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고.
나는 대체 왜 저러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랬더니 결국 혜은이가 결심했다는 듯 내 귓가로 입술을 들이밀더니 속삭였다.
"직접, 몸으로, 야한 거, 경험, 해보게요...."
아, 역시 이 혜은이도 혜은이는 혜은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