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FF급 페미헌터-164화 (165/289)

EP.164 8장 - 서은하(5)

우리가 지금 공략하고 있는 이 던전은 정말 많은 헌터를 잡아먹은 무시무시한 곳이었다.

솔직히 전투 난이도 자체는 엑스트라 난이도 중에서도 적절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는, 큰 방심만 하지 않으면 본인 실력으로 어려움 없이 클리어가 가능한 수준이지만.

자기 자신의 자존감을 바닥까지 긁어서 심연으로 빠트린다는 특징이 너무 강력하게 작용해서 그렇다.

'그래서 이 던전을 깨려고 미국도 정말 미친 짓을 많이 했었지.'

그중에서도 레전드는 사실상 일반인으로 취급받는 E급 헌터들까지 죄다 던전에 쑤셔 박은 거였다.

솔직히 그 정도 레벨이면 전투 경험 자체가 없어서, 아무리 몬스터가 약해도 위험하지 않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죽어 나간 E급 헌터만 해도 두 자릿수였지.

다만 아무래도 다른 등급보다는 낮은 가치로 생각했는지, 미국 정부는 꾸준히 E급 헌터를 투입했었다.

그래서 이 비인륜적인 행위 자체는 지금까지도 욕을 처먹고 있지만, 그래도 심한 비판까지는 못하는 이유가 있다.

정말로 이 던전을 E급 헌터 둘이서 클리어한 파티가 있었거든.

S급 헌터의 파티가 전멸한 던전을 E급 둘이서 클리어한다니.

당시 상식으로는 세상이 뒤집힐 정도의 대사건이었다.

당연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미국도 굉장히 당황했고.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온 E급 헌터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분석한 끝에야 어떻게 클리어했는지를 예상해서 보고서를 정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매니저 시험에 엑스트라 난이도 문제의 단골로 나오는 지문이라서 달달 외우고 있다.

'나라는 존재를 비우고, 옆에 있는 동료만을 믿었다고 했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놓고 다른 한 명에게 온전히 의지한다.

서로가 서로한테 의지하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아무리 쓰레기더라도 버틸 수 있는 정신 상태를 만든 것이다.

물론 그걸 일부러 의도했다기보다는 우연히 서로에 대한 강한 의지와 마음이 일으킨 기적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여튼 이 던전에서 완벽하게 자책을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나마 가능한 것은 서로를 믿는 마음만으로 자신을 비우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은하가 다 이겨내고 이 망할 던전을 클리어해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문제는 은하도 그런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고.'

물론 나는 은하가 그 정도는 간단하게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도 은하는 내가 도와주기를 원했을 테니까, 최대한 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했다.

물론 나 따위가 생각한 계획이 그렇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은하는 이런 행동을 하는 나를 좋아하는 거니까 그렇게 행동했다.

"나, 나도 사랑해."

울면서 나를 껴안은 은하의 목소리가 굉장히 달콤하게 귓가를 간질인다.

순간적으로 나 같은 것이 은하와 붙어 있어도 되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이걸 선택한 것은 은하라는 사실을 자각하며 그 생각을 밀어낸다.

은하가 하는 일에 감히 이상한 생각을 끼워 넣지 마.

내 생각을 비워.

오로지 은하가 어떻게 판단하고 움직이는지만 생각해서 은하를 위한 행동을 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은하는 나를 좋아해 주니까, 나도 은하를 힘껏 껴안으면서 사랑을 전해야 한다.

이게 은하가 원하는 길이고, 그렇기에 나는 은하를 믿고 따라갈 뿐이다.

서로를 완벽하게 믿고, 그 서로가 원하는 '자신'의 모습을 어떻게든 그려낸다.

그럼 상대방을 믿기 때문에 '자신'을 원래의 형태 그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상대가 원하던 평범한 자신을 그려낼 수가 있다는 것.

그게 사실상 이 공략법의 핵심이었다.

"생각보다 후련하지?"

"그러네. 사랑하는 자기야가 가득해서 엄청 반짝반짝거려."

"나도 온몸이 은하 너로 가득 차서 포근포근해."

사실상, 이 던전의 가장 큰 문제를 해결해버린 셈이다.

지금부터는 은하만 믿고 아무 걱정 없이 쭉 나아가면 던전의 클리어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은하와 함께 공략을 속행했고, 예상 그대로 아주 간단하게 최종 보스의 방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가자."

"응!"

그리고 이 던전의 악질스러운 점은 최종 보스의 방에서도 드러나 있는데.

채린이의 비틀림에서 봤던 던전이 마지막에 희생을 요구했던 것처럼, 이 던전도 보스를 사냥하는 대신 원한다면 자신이 희생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 있었다.

자신만 희생하면 이 보스랑 싸울 일도 없이 바로 클리어할 수 있다는 거지.

차라리 그것뿐이었다면 악질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한쪽만 희생해야 그런 식으로 클리어가 되고, 양쪽 모두가 희생하면 클리어에 실패한다고 한다.

양쪽 모두가 희생하면 클리어가 실패하는 것은, 선택을 위한 방문에 있는 족적을 분석해서 미리 알아낸 것이고.

한쪽만 희생하면 클리어할 수 있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이 던전이 클리어되었기 때문이다.

이곳을 클리어한 E급 둘은 이 망할 던전의 저주를 이겨내었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로 공략을 이어나갔지만.

문제는 어느 한쪽이 절대로 희생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다른 하나가 완벽하게 믿고 있었다는 거다.

그래서 확신하고 선의의 희생을 하는 판단을 했겠지.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어.'

무려 은하가 있고, 그 은하가 믿어주는 내가 있다.

내가 나를 필요 없다고 직접 판단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오만한 짓이다.

은하가 나를 필요하다고 말했으니, 무조건 여기서 해야 하는 선택은 희생하지 않는 것이다.

이제까지 아무도 택하지 않아서 위험부담이 큰 보스와의 조우지만.

그 보스를 클리어하는데 어떤 공략이 필요한지도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런데도 그까짓 보스는 은하가 있다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으리라.

나는 희생하지 않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아, 자기야."

"오...."

보스방에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나는 구간이 있었다.

아마 이쪽에 문이 하나 더 있는 걸 보면, 여기서 한 명이 희생하면 저쪽 문으로 클리어 진행이 되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열린 문이 두 개인 걸 보면, 각기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건가?

"여기부턴 공략이 없어. 미안해."

"아니, 자기야 공략은 있어."

그렇게 말한 은하는 우리가 서로를 믿는 것이 공략일 거라고 말했다.

이제까지 이 던전은 그걸 요구해왔으니, 마지막 보스도 마찬가지의 패턴일 거라는 거다.

확실히 그렇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그 의견에 동조했다.

"역시 은하는 최고네."

"히히, 애초에 이거도 자기야가 말해준 거잖아."

"나는 그걸 여기에까지 적용된다거나 하는 생각은 못 했거든."

하여튼 은하의 말대로 여기의 클리어 방법은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런 신화 던전에서는 스토리가 이어지는 테마 같은 걸 중요시하니까.

이곳의 테마는 자신을 믿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을 믿어서 자신을 정립하라는 거잖아?

그럼 당연히 마지막 보스도 그렇겠지.

"어우, 씨."

은하의 군더더기 없는 완벽한 공략, 나는 그 공략의 내용을 곱씹으면서 천천히 보스방을 살폈다.

다만 그걸 기다려주기 싫었는지, 보스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나에게 달려들었다.

근데 뭔가 보스가 2개라는 느낌이 있네?

"미친...!"

약간 흐릿한 보스랑 진한 보스가 있는데, 진한 보스의 공격이 너무 강해서 일격에 죽을뻔했다.

반대로 흐릿한 보스한테 엄청나게 밀리고 있는 은하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이거 다른 문으로 들어왔지만, 실제로는 사실상 하나의 방에서 공략하는 느낌이네.

"설마...."

혹시나 해서 흐릿한 보스를 은하 대신 막아주고 공격하자, 생각보다 쉬운 느낌으로 처리가 되었다.

흐릿한 건 나한테 약하고, 진한 건 나한테 강하네?

마찬가지로 나를 공격하던 진한 색감의 보스는 은하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확실히 키워드가 믿음이긴 하네.'

나를 공격하는 이 망할 진한 색의 보스는 어차피 내가 막을 수 없으니까 무시한다.

은하가 날 그 보스에게서 지켜줄 거라 믿으며, 나는 은하를 공격하려는 흐릿한 보스에게서 은하를 지킨다.

자기 자신을 지키는 건 내가 아니라 상대방.

상대방을 믿고 상대방을 지키며 싸우는 것만이 이 보스의 공략 방법이었다.

그래, 보스의 1페이즈는 딱 그걸 알려주려는 느낌이었다.

다만 곧 시작된 2페이즈부터는 각기 보스가 위험한 패턴으로 보이는 걸 준비하고, 그것까지 캔슬하는 과정이 추가되었다.

캔슬 방법이 그냥 무력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라서, 이 캔슬 때문에 위험한 상황에 직접 찾아가는 상황이 된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도 은하가 해줄 거라고 믿고 움직이지 않으면 은하를 구할 수 없다는 딜레마.

그 딜레마 속에서 최선을 다해 상대를 지켜내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고 마지막 3페이즈는 거기에 확실하게 강해진 본체가 압박해오는 부분까지.

이전 페이즈와는 다르게 솔직히 그냥 1대1로만 붙어도 꽤 버거운 난이도다.

그런데 기존 페이즈들의 패턴은 그대로 가지고 있으니, 이게 난이도가 꽤나 버거웠다.

"뜨하압...!"

당장 눈앞까지 날아드는 즉사에 가까운 공격은 엄청난 압박감을 준다.

나는 그걸 은하가 막아줄 것이라고 최대한 간절하게 믿으며 무시한다.

저거에 신경을 쓰면 절대로 딜을 넣을 시간을 낼 수 없다.

희생하면 도달할 수 없는 이곳에서, 희생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상대를 믿어야 하는 패턴.

정말 악랄하지만, 이 던전에 걸맞은 보스라는 생각이 들었다.

"헉, 허억...."

"이, 이제 된거지?"

"그런 것 같은데?"

숨이 차오를 정도로 마력이 아슬아슬했다.

솔직히 마지막엔 죽어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받았던 건데.

역시 은하는 내 상상 이상인지, 완벽하게 나를 지켜줬다.

"와, 갑자기 사라지니까 기분 묘하네."

"그래? 그럴지도."

보스를 모두 쓰러트리고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자, 이제까지 던전을 통해 전해지던 자기혐오에 대한 효과가 깨끗하게 사라졌다.

은하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그래도 이제 좀 강박감 없이 정상적인 사고가 되는 것 같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이 던전은 개좆같은 시스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무사히 클리어 해서 다행이지, 조금만 탈선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다.

"수고했어."

"응. 어라? 바로 밖이 아니네?"

"그러게. 원래는 바로 나가질 텐데."

하긴 그건 보스를 클리어하지 않고 희생을 이용해 클리어해 나간 경우였지.

우리의 경우에는 보스를 클리어했으니까 조금 루트가 다르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적당한 크기의 공동과 그 중앙에 있는 기도하는 여인의 석상이 눈에 들어온다.

"아, 이거 특별 보상이구나. 만진 사람한테 주는 건가?"

"뭔지는 모르겠지?"

"모르지."

사실상 우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건데 그걸 알고 있으면 내가 회귀자지.

솔직히 이게 그냥 물건이면, 일단 뭔지를 살핀 다음에 필요한 사람을 주면 된다.

근데 그게 아니라 처음 만진 사람 하나한테만 전해주는 무언가 같은데....

'이 던전의 디자인상 이게 함정 같은 건 아닐 것 같고. 굉장한 난이도의 던전이니까 보상도 쏠쏠할 것 같은데....'

그렇다면 10레벨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보다는, 곧 0레벨에 도달하게 되는 은하가 저걸 받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솔직히 나보다는 이 던전에서 은하가 훨씬 많이 고생했잖아.

은하는 저걸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런 이유야."

"하지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받으라니까? 어차피 네가 강해지는 게 곧 내가 안전한 길이야."

"알았어."

은하는 천천히 석상을 쓰다듬었고.

석상에 깃들어있던 빛은 강렬하게 빛나더니, 순식간에 은하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그래서 왜 하필 저기로 날아드나 싶었는데, 내 시야를 가리던 빛이 사라진 이후에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미친?"

석상에서 나온 빛은 야한 형태의 문신이 되어 자궁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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